#132화
‘-또다.’
라이안이 검은 돌 사용자에게 보이는 원색적인 적대감.
그건 아렌이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문제는, 그 이유였다.
‘왜지? 저토록 적의를 보일 필요가 있는 건가?’
만약 그 적의가 아렌을 향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아렌 또한 운명석 계약자였으므로.
“…아, 실례했군. 난 단지 소문의 출처를 묻고 싶었을 뿐이야. 어떤 신묘한 힘을 가진 검은 돌에 대해서 말야.”
“신묘한 힘이라… 혹시 저도 의심하셨습니까?”
아렌의 말에 라이안은 피식 웃었다.
“물론, 처음엔 자네를 의심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조사해본 결과 자네의 점괘는 다른 점술가와 비교해 그렇게 특출나지도 않았어.”
“…….”
아렌 스스로는 꽤나 잘 들어맞는 점괘를 냈고, 사람들 역시 특별히 놀랐지만 라이안의 성에 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 실례했군. 자네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야. 도리어 대단한 기술이라고 생각해.”
“무엇이, 말씀입니까?”
“그야 사람의 속내를, 눈치만으로 파악하는 것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아무래도 라이안은, 아렌의 점술이 뒷조사와 눈치로 이뤄지는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물론, 거의 맞는 말이었다.
“아, 물론 자네의 동의를 구하는 건 아니네. 그냥 흥미 삼아 들어주게. 점술가나 예언가, 영능력자든 뭐든 좋네. 그들이 결국은, 그럴듯한 말만을 반복한다는 이론서를 본 적 있어서 말야.”
“그 이론서는-”
“그래. 도국과 인접한 국경에는 여러 도서가 많이 흘러들어오지.”
실리와 금융, 자연과학이 발달한 도국이니만큼 미신은 최대한 배척된다.
도국과 인접한 땅일수록 그런 도국연합의 사상을 접하기 쉽다.
특히 황자가 도국 연합과 계속 교류해온 만큼, 더더욱.
‘…하지만 그건, 영혼석 사용자에 대한 적대감을 설명해주진 않아.’
라이안은 계속해 물었다.
“검은 돌로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치유하는 신의(神醫)가 도국 땅을 전전하고 있었다고. 자네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건가? 그도 아니면, 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도국과 깊은 관계를 쌓은 라이안이다.
도국땅에 존재하지 않는 소문을 멋대로 지껄였다가, 꼬리가 잡히면 곤란해진다.
“그도 아니면, 자네가 지어낸 건가? 묘하게 구체적인 소문을?”
‘-이미 숨길 순 없어.’
아렌은 결심했다.
이미 라이안은 아렌과 황자들 앞에서 영혼석 계약자, 속칭 ‘비 나그네’라 부리는 남자를 죽인 이력이 있었다.
그때에도 라이안은 영혼석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설명했지만, 워낙 허황된 이야기니 진지하게 들은 사람은 몇 없었다.
제국의 가장 유망한 제1 황자가, 황궁 안까지 민간인을 끌고 들어와 죽였다는 사실이 흉흉한 소문으로 퍼지지 않게 모두 쉬쉬했으니 더욱 그렇다.
영혼석을 알고 있고, 그 사용자에 적대감을 가진 황자.
“…특수한 힘을 지닌 흑옥, 영혼석에 대해서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호오.”
라이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전하께서 알려주신 것보다 훨씬 전부터였습니다. 6년 전, 동부 국경 너머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죠.”
“동부 국경이라. 대강의 소문은 들었네. 사람을 홀리는 안개로 뒤덮인 땅이었다면서.”
“네. 그 안개의 주인은 아마, 옛 아티스 왕국의 왕자였던 노인이었겠죠. 그의 품에서 나온 흑옥피리는 그가 죽자마자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그럼 그 뒤부터, 흑옥에 대해 조사 해오고 있었나?”
라이안의 눈빛은 줄곧 아렌을 쏘아보는 것 같았다.
“-설마요. 시간 낭비입니다.”
뱀을 앞에 둔 개구리가 침착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평생을 뱀 소굴에서 지내며 그들을 속여먹은 개구리라면, 억지로라도 평정심을 가장 하는 건 쉬운 일이다.
“제국의 역사서에는 신비한 흑옥에 대한 변변한 기록도 없었습니다. 기록이 없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영혼석의 숫자가 많지 않고, 국가의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아렌은 강변했다.
“아티스의 왕자를 보십시오. 그토록 강대한 힘이었지만, 결국 왕국의 멸망조차 막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운명석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해볼만한 요소, 이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흠, 그런가.”
라이안 황자가 아렌의 말을 얼마나 믿어줄까.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말에 수상한 기색은 섞이지 않았다고, 아렌은 확신했다.
“그럼, 반대로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째서, 그토록 흑옥에 대해 과민반응하시는 겁니까.”
“-지금 내게 묻는 건가?”
“결례라면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아렌이 눈도 깜짝 않고 허리를 조아리자, 라이안은 건방지다는 듯 웃었다.
“이 자식, 왜 레온나토스가 그토록 총애하는지 알겠군. 꽤나 담이 크구나. 목숨이 두 개는 되는 것 같아!”
“…….”
‘사실, 정말 두 번째이긴 하지.’
한동안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라이안은, 순간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놈들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그야 아렌 네 생각과 달리, 국가 안위에 위협이 되는 자들이기 때문이지. 가령 비 나그네라 불린 자.”
“…?”
“그는, 도시국가 레데에서 관리하던 운명석 계약자였다. 알고 있나?”
“…몰랐, 습니다.”
“그렇겠지. 평소에는 서부해안의 내륙 깊은 곳을 전전하다가, 레데의 지령을 받으면 비를 내리게 할 도시로 숨어드는 형태였지. 물류에서 항운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도국이니만큼, 한 도시에 비 나그네가 오래 머무는 건 치명적이었다.”
‘과연, 그래서 도국으로부터 현상금이 붙은 건가?’
“헬데움과 카르도나는 각각 그 사실을 눈치챘고, 그를 수배했지. 도국 땅에 발붙일 수 없게 된 비 나그네는 레데와의 연락도 끊어버리고 제국으로의 국경을 넘은 거다. 머리 위에 비구름을 잔뜩 머금은 채.”
“…하필이면, 왜 축제 기간에?”
“글쎄. 그건 우연의 일치거나, 혹은 죽음이 다가오는 걸 알고 생애 마지막 축제라도 즐기려 한 걸지도 모르지.”
아렌은 그제야 사로잡혔던 레데의 제독, 카슬 랜돌프가 한 말을 알 것 같았다.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이라는 말은, 레데의 전략자산인 비 나그네를 축출시킨 건 이쪽이 먼저라는 뜻이었다.
‘비 나그네를 먼저 운용한 게 레데인 만큼 심히 억지란 생각이 들지만…’
“생각보다도 알고 있는 게 많구나. 레온 녀석의 가신이지만, 어쩌면 나와도 자주 볼지도 모르겠군.”
“좋게 평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가웨인 옆에서도 느끼지 않았던 목숨의 위협을, 아렌은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렌이, 운명석 계약자인 것이 알려지면 그대로 끝, 그야말로 파리목숨 신세다.
아렌은 물러가려 하자, 라이안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 참. 혹시나 해서 붇는데, 알고 있는 다른 계약자는 없나?”
“운명석 계약자 말씀입니까? 그런 자가, 그렇게 자주 나타날 리 없지 않습니까.”
“흠, 물론 그렇겠지.”
아렌은 라이안의 별궁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다른 변수가 없으면 아마 라이안이 황자가 되겠지. 그러니 변수가 될만한 일은 최대한 죽이려는 건가?’
물론, 아렌이 아는 계약자가 한 명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제국 땅이 아니라 저 아래, 교국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
라이안이 말했던 대로, 제2 황자 엔지는 한순간에 역모로 지목되어 철저한 압수수색을 받았다.
엔지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황실 권위를 등에 업은 라이안은 엔지가 가진 모든 기반을 철저하게 부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엔지가 진범이라는 물증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엔지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진짜 증거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조작인지 아닌지, 아렌이 알 방법은 없다.
흔들리는 황권을 다잡기 위해선 결국 진범이 필요하다. 이번 역할에 가장 적합한 자가 엔지 황자였을 뿐.
‘…고작, 내 지목 하나로 말이지.’
아렌은, 기시감이 들었다.
첫번째 삶에서의 아렌의 죽음과 지금 엔지의 지목은 거의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가 암살당한 후, 아렌이 잡혀 와 사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진범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 필요하니 만드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참, 더러운 곳이야.’
온갖 부와 권력이 모여들고, 세상 어느 곳보다 반짝이는 곳이 황궁이지만, 정작 그 안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굳이 아렌이 거짓 점괘를 내리지 않더라도, 황궁 안은 흉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런 곳의 정점이라니. 필시 제정신으로 있지는 못하겠지.’
*****
한때는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황제였지만, 상처가 안정화된 지금은 하루가 달리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나이와 입었던 상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국의 황제가 내부의 역모에 당했다는 건, 결코 명예롭지 않은 소식이다.
하지만 황궁 안에도 각국의 밀정은 있으니 모든 소식을 막을 수는 없다.
또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는 이상, 황제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다.
황제의 습격 소식을 접한 타국에서 속속 위문 행렬이 도착했다.
도국 연합에서 온 것은 중심 도시인 카르도나와 헬데움의 시장, 그리고 그 수행원들이었다.
아렌은 사절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다.
“-이봐!”
“오랜만, 은 아닌가요.”
시장의 수행원에 들어가 있던 건 헬데움의 세밀 메렌치와, 카르도나의 듀란 우피치였다.
“여기가 천년궁인가? 과연, 어마어마하게 크긴 하네.”
“아렌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역시 세상 모든 음모는 천년궁 안에서 벌어진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요.”
“이런 곳에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거야? 너도 참 강심장이네.”
“…….”
아렌은 불시에 피를 쏟고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좋은 일로 방문한 건 아니지만, 원한다면 황궁 한을 소개해주죠.”
“그거 고맙네. 하지만, 그 전에 이거.”
둘은 아렌을 사람의 눈이 덜 미치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듀란 우피치는 품에서 실로 단단히 묶인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서신으로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전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건 서신이라기보다, 거의 책에 더 가까웠다.
“설마, ‘그거’에요?”
“그래. 네가 찾고 있던 내용이야. 운명-”
“여기선 말하지 말아요.”
아렌은 세밀의 말을 막았다.
제1 황자 라이안에게 운명석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 게 바로 얼마 전이었다.
이런 보고서까지 받는다는 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카르도나와 헬데움의 합동 보고서라면, 그 주제에 대한 세상 모든 지식이라 봐도 무방했다.
아렌은 그 보고서를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모처럼 왔으니 황궁 안을 구경해보고 싶긴 한데, 그럴 여유가 있을진 몰라?”
“괜찮을 거예요. 이번 위문을 허락한 건, 황제 폐하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함이기도 하니까. 구경할 여유쯤은 주어지겠죠. 그만큼 황궁 안 경비도 삼엄해지겠지만.”
“하지만, 사절단은 도국에서만 온 것이 아니잖아요?”
듀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 아렌, 여기 있었어?”
“…….”
‘-낭패다.’
들려온 목소리에, 아렌은 치를 떨었다.
“-아르테.”
목소리의 주인은, 아트마 교국의 젊은 주교이자 운명석 계약자, 아르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