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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31화 (131/227)

#131화

아렌의 사지는 완전히 결박되어 있었다.

옴짝달싹도 못하는 가운데, 목만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오직 사람의 목을 자르는 용도로만 설계된 두텁고 긴 참형도가 높이 들어 올려졌고, 아렌의 목은 잘리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구속된 서른 살의 아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는, 반투명한 열여섯의 아렌이 있었다.

‘-아. 전생이다.’

누군가로 인해 누명을 쓴 채, 제대로 된 변명조차 못하고 목이 잘린 첫 번째 삶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두 번째 삶을 오래 살아갈수록, 아렌이 가지고 있던 첫 번째 삶의 기억은 마치 꿈속 상황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참형도는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가, 걸쭉한 죽을 국자로 휘젓는 듯한 속도로 내리쳐졌다.

칼이 목에 닿기 전, 서른 살의 아렌은 무언가를 생각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복수? 아니면 억울함?

이때의 기억으로 아렌은 황궁의 흑막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돌이켜보니 이때 아렌이 한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아, 지금 생각한다.’

아렌은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서른 살의 자신이 하는 마지막 생각을 엿들었다.

[…이게 전부-]

*****

“아렌? 아렌!”

누군가 아렌을 강한 어조로 깨웠다.

누군가 아교로 붙여놓은 듯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아렌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나지막이 불렀다.

“…전하?”

“아렌!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백색의 침상에, 침상 주변은 모두 흰색 천으로 칸막이처럼 둘러놓았다.

“황궁 외원의 의실이다. 미친 듯 코피를 쏟은 뒤, 넌 정신을 잃었어.”

“…으음.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는데, 황송합니다.”

의실은 항시 의원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하는 중증 환자가 신세 지는 곳이다. 고작 현기증이 나 잠시 쓰러진 아렌이 들를만한 곳은 아니었다.

“…역시, 모르나?”

하지만 아렌의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렌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은 아주 오랜만에 움직이는 것처럼 무겁고 느릿느릿했다.

“…전하. 제가 쓰러지고 난 뒤, 얼마나 지났죠?”

“오늘로 꼬박 일주일이 지났네. 그동안 넌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어.”

“일주일!”

아렌에겐 예상 밖의 시간이었다.

“어째서, 고작 조금 코피를 흘린 것뿐이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니, 아래에 웅덩이가 생길 만큼의 양이었다고.”

“궁의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글쎄. 다른 곳에 문제는 없다고는 하던데, 피가 부족할 정도로 코피를 흘린 이유까지는 그도 모르는 것 같더군.”

“…….”

영문 모를 일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역시, 언령이었나?’

황제가 의식을 차렸다는 말을 들은 직후, 심각한 양의 육혈을 흘리며 쓰러진 아렌.

언령의 가능성을 계속 의식해온 아렌이기에, 지금 벌어진 일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넘기기는 어려웠다.

‘이게 만약 언령의 반동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군.’

힘을 행사하면 어떠한 경우로든 반동이 뒤따른다.

말한 대로 이뤄지는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대가는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 그것도 황제의 목숨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는 언령.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도 다행인지도 모른다.

“난 자세한 내막을 모르네, 아렌. 그때 대회견장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라이안 형님과 가웨인 형님, 그리고 자네가 기획한 일인가?”

“가웨인 전하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정황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나서신 것 같더군요.”

다른 황자들은 설령 눈치챘더라도 가웨인처럼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

예기치 않게 상황이 격화되어 검을 뽑게 된다면, 다른 변명도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가웨인처럼, 설령 어떤 경우가 생겨도 한 몸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사실은 전하도 눈치채셨죠?”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 라이안 형님이 범인이고 황위의 당위를 주장한다면, 황자들을 한데 모아 반발하기 쉬운 상황을 만들진 않았겠지. 가장 적합한 건 한 명씩 직접 찾아가 포섭하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아마 이 내용은 제3 황자 루카스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와 레온나토스 둘 다, 제1 황자 라이안이 실제 범인일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라이안 형님이 사실 ‘범인인 척하지만, 진짜 범인이었다’라는 경우도 가능은 하니까.”

“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결코 제1 황자를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지?”

아렌은 주변의 인기척을 살핀 후, 조심스레 말했다.

“그건… 제2 황자, 엔지 전하입니다.”

“…….”

그 말을 들은 레온나토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재빨리 아렌이 부연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시각일 뿐, 확실하다고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시종장 각하와 라이안 형님은 네 판단을 알아보기 위해 그런 연극까지 꾸몄어. 당장 존재하는 유일한 단서고.”

“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쓸데없는 정보겠죠.”

아렌이 그 자리에서 지목한 이후,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엔지를 일시에 검문했다면 어떤 증거든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의 연극은 이미 들통났고, 아렌은 쓰러져 그대로 시간이 흘러버렸다.

“일주일이나 지났다니, 쓸만한 증거는 모두 인멸당했겠죠.”

아렌을 따라 씁쓸한 표정을 짓던 레온나토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네가 흘린 코피는 대체 무슨 영문이지?”

“저야말로 모르겠군요.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고, 전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아렌이 태연한 얼굴로 지껄인 말에, 레온나토스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밝히는 건 아렌의 특기다.

그런 만큼, 안면몰수하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도 능숙했다.

“그만한 출혈이라니, 역시 심상치 않아.”

“궁의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요?”

아렌은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고, 레온나토스가 말렸다.

“그만둬, 아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지 모르니 며칠은 더 누워있는 게-”

“이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일주일이나 시간을 허비했으니, 더 바삐 움직여야죠. 공사다망한 전하께서 한낱 가신에게 너무 몰두하시면 본이 서지 않습니다.”

아렌은 비틀거리면서도 침상 옆에 섰고, 이제는 아렌 직속이 된 멜로익이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비록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라이안과 내원 시종장에게 못다 한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며 의실을 떠나려던 아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내원 시종장과 라이안 전하에게, 엔지 전하의 일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레온나토스는 자신에게 말도 없이 일을 진행해놓고, 일주일만에 병상에서 깨어난 부하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것 참, 빨리도 물어본다.”

*****

“…그래. 범인은 엔지였나?”

아렌에게 설명을 들은 라이안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시 반응만 보고 내린 추측입니다. 실제 증거는 조사관의 수사로 밝혀내야 하죠.”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엔지는 이미 모든 증거를 없애버렸을 것이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그토록 갑자기 고꾸라지는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니. 이젠 좀 괜찮나?”

“네.”

아렌은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라이안의 별궁으로 오는 길조차 멜로익의 어깨를 빌려야만 했다.

“무슨 독이라도 먹은 건가? 그만한 출혈이라니, 정상적이지 않은데.”

“지금은 한결 괜찮습니다. 궁의도 별말 없었고요. 그보다,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아직은 자리를 보전하고 계시지. 그러나 궁의 말로는 점차 나아지실 거라더군. 폐하께서 무언가의 가호를 받는 게 틀림없다고, 궁의가 난리였어.”

‘무언가의 가호라. 틀린 말은 아니지.’

“흠, 그런데 엔지라. 권력 욕심이 지나치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놈이 미처 버리지 못한 증거는 없을까?”

라이안은, 오직 아렌의 말만으로 이미 엔지를 범인 취급하고 있었다.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아렌은 대답했다.

“…글쎄요. 설령 엔지 전하가 범인이었다 해도 지금으로선 증거가 없으니, 불필요한 억측일 뿐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증거만 나온다면 억측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군.”

“그건-”

아렌은 지금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어떤 식으로든 ‘증거’를 준비하겠다는 식으로 들렸기 때문에.

아렌은 정색하고 말했다.

“엔지 전하에게서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모를까, 거짓 증거를 놓고 몰아가는 것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라나? 단지, 설령 네 말대로라 해도 이게 너에게 더 유리할 텐데?”

“유리, 하다고요?”

제1 황자 라이안은 뻐근한 듯 어깨를 쭉 폈다.

“만약 네 말대로 엔지의 주변을 압수 수색한다 치자.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나나 내원 시종장 또한 난처해지겠지. 하지만, 황자를 역모자로 잘못 지목한 너만큼은 아닐 거다.”

“…글쎄요. 전 어디까지나 참고용 의견을 제시한 것뿐인데요.”

“물론이지. 나와 시종장,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엔지 녀석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

“…….”

“네가 지목한 자에게 증거가 발견되어야 한다. 이건 필연이야.”

황제를 죽이려 한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건, 황궁의 위신이 걸린 문제다.

역모자는 무조건 색출된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으면, 어둠 속에 숨은 또 다른 역모자를 양산하게 될 테니까.

‘여전히 속 모를 자야.’

라이안의 표정은 아렌으로서도 묘하게 읽기 힘들었다.

마치, 전생에 아렌이 결혼했던, 면사포를 쓴 아라흐네 처럼 라이안과 아렌 사이에는 보이지 않지만 두텁고 질긴 천 한 장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친동생을 죽이려는 거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설마하니 아렌의 말을 그토록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필요하기에’ 지금 가장 그럴듯한 사람 하나를 찾아 제거해야 할 뿐.

물론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말이다.

“뜻대로 하시지요. 하지만, 저나 레오나토스 전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렌이 돌아가려 할 때.

“그러고 보니. 내원의 지하에서 꽤나 재미있는 말을 하더구나.”

‘…설마, 듣고 있었나?’

내원 시종장과 둘이서만 이야기하던 지하의 복도에서, 라이안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났다.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

“시해자에게 한 이야기 중에, 검은 돌을 대니 곧바로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던데. 그건 실제로 있는 이야기인가?”

“…그건.”

그동안 진짜 속내를 짐작조차 어려웠던 라이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렌은 처음으로 라이안의 날것의 반응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라이안과 검은 돌. 대체 어떤 관계지?’

아렌을 향해 언뜻 보인 그 감정은, 분명 뚜렷한 혐오감과 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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