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사방이 암석으로 된 방 안은 온통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방 한중간에 꽂힌 나무 기둥에 꽁꽁 결박된 남자는, 하루 전 황금 가면을 쓴 채 황제의 몸에 칼을 꽂았던 시해범.
팔과 다리는 뒤로 묶이고, 입은 재갈을 물려뒀다.
틈만 나면 스스로 혀를 물려고 하니, 자해할 수 없게끔 한 조치였다.
“생각보다, 고문의 흔적은 없군요?”
“괜히 몸에 손을 댔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고문을 한다고 해도 입을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고문을 해서 뭣하겠어.”
시해범이 구금된 방은, 황궁의 정식 감옥이 아닌 황궁 내원의 용도가 불분명한 지하실, 그중 한 곳이었다.
황제를 직접 공격한 자는 단순한 꼭두각시일 뿐이다. 실제 진범은 그 위에서 지시를 내린 누군가.
그가 누군지 밝혀내기 위해선, 시해범의 자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렌은 시해범의 얼굴을 살폈다. 열두 정원 중 한 곳의 정원사라고 들었지만, 본적이 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만약 금면병이 가면 따위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적어도 어제와 같은 방식의 암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면을 쓴 것이 도리어 해가 되기도 하는군요.”
아렌은 뒤를 돌아봤다.
동행한 내원 시종장, 그리고 호위 격으로 동행한 은면병 두 명 모두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둔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 얼굴을 드러낸 건 말뚝에 묶인 시해범과 아렌뿐.
은면병은 원래부터 은도금 가면을 쓰고 있지만, 지금은 내원 시종장 역시 은면병의 가면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아렌의 부탁 때문이었다.
*****
“내원 시종장 각하. 괜찮으시다면 얼굴을 가려주시겠습니까?”
“내 얼굴을?”
“네.”
“그럴 이유가 있나? 얼굴을 가려도 내 복식을 보면 금방 정체가 탄로 날 텐데-”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건, 표정입니다.”
“표정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의외로 사람은 자신의 표정에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이곤 하니까요.”
“그건 알겠는데, 왜 우리 얼굴을-”
“그야, 범인에게 여러분의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럼 자네도 얼굴을 가리는 게 좋지 않나?”
내원 시종장의 물음에 아렌은 답했다.
정작 그러는 아렌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그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게, 더 나으니까요.”
*****
왜 황궁 근위병의 얼굴을 가리는가.
아렌은 줄곧 그게 불만이었다.
물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는 이유는 알고 있다.
정예병의 상징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면서, 가면을 벗었을 때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궁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내원의 정예병이다 보니, 당연히 그 창끝이 권력자를 향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원한을 사 혹시나 있을 보복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근위병들의 얼굴을 가리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 결과가, 금면병 사이 숨어든 시해범이었지만.’
내면 시종장과 동행한 은면병의 정체도 내심 불안한 아렌이었지만, 이미 내원 시종장을 의식한 듯 은면병의 정체는 파악해둔 이후였다.
아렌은 말뚝에 팔다리가 결속된 시해범을 바라봤다.
‘…황금가면을 쓰기 위해 평생을 준비해온 자.’
하지만 그가 생애 처음 가면을 쓰게 된 건, 원래 지켰어야 할 황제를 시해하기 위해서였다.
“…꽤나 과묵하군요.”
“…….”
“하긴 모든 정원사가 과묵하니,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죠.”
말할 것도 없이 시해범의 입은 재갈로 꽉 물려 있다.
말은커녕, 작은 신음소리 하나 내는 것조차 버거울 터.
아렌의 말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일단 수고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금면병 하나를 살해하고, 그를 대신해 황제 폐하의 호위로 잠입함 건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습니다.”
“…….”
“그리고 그 계획도 거의 성공할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당신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굳이 찾아온 겁니다.”
“…….”
“폐하께선 쾌차하셨습니다.”
“…!”
아렌의 말에 거의 반응하지 않던 시해범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떠졌다.
시해범이 놀란 건 당연하지만, 놀란 건 내원 시종장과 은면병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은 얼굴을 가렸기에 시해범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시다시피 전, 반 년동안 도국에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죠. 검은 돌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상처가 씻은 듯히 낫는 신의(神醫)에 대해서요. 마침 제국에 들르고 싶다기에, 제가 탄 마차에 동행해 황도에 데려다줬죠.”
허황된 이야기였다.
저런 동화같은 이야기를 무작정 믿을 리 만무하거니와, 설령 그런 자가 존재한다 해도 이토록 운 좋게 이야기가 진행될 리 없다.
‘하지만,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시해범이 아렌의 말을 듣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특수한 검은 돌에 신비한 힘이 깃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만약 알고 있다면 그 배후가 라이안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지.’
“의식을 차리신 폐하의 명입니다. 살려둬봤자 당신은 입을 열지 않을 거고, 하늘을 뒤집어보려 했던 자를 손쉽게 죽여서야 본이 서지 않죠. 거짓을 말하긴 싫군요. 당신은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
어차피 죽음은 각오한 바일 것이다.
죽을 것이 뻔한 임무를 기꺼이 한 자고, 또 계속 자결 시도를 한 만큼 ‘죽인다’라는 말은 원래라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이라면?’
수십 년을 제대로 된 직책 없이 훈련만 하며 살아온 자이다.
그것도 낮에는 정원사로 위장한 채, 밤에는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을 반복하는 삶.
그 삶의 끝이 임무를 실패한 끝에 찾아온 죽음이라면, 그 허망함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저희는 이미 당신의 위에 있는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예상하고 있어요.”
“…….”
“범인은, 라이안. 맞죠?”
“…….”
시해범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아렌은, 그의 침묵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비웃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라이안이, 아니었어? 세리엔 황녀의 추측이 틀렸던 건가?’
그때 아렌이 한 점괘는 세리엔이 짐작하는 사람이 범인이다, 라는 내용이었고 당시 세리엔이 중얼거린 이름은 분명 라이안이었다.
아렌의 점괘가 정말 언령이라면 지금 지목되는 범인 역시 제1 황자인 라이안이어야 했다.
아렌은 당장이라도 뒤이어 다른 이름을 떠보고 싶었지만, 상황은 쉽지 않다.
그도 바보가 아니기에, 아렌이 속내를 떠본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테니까.
“어라? 어쩐지 정말 모르시는 눈치군요. 당신이 믿고 섬기는 황자도 실은 제1 황자의 사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설마 정말 몰랐습니까?”
“…!”
아렌은 자신의 헛다리를 능숙하게 다시 돌려놓았다.
그리고, 시해범은 아렌이 말한 ‘황자’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적어도 다른 황자들 중 한 명이 범인인 것은 확정이다.
“당신도 황궁 사람이라면 제 실력은 알고 있겠죠. 당신의 앞날은 실로 끔찍할겁니다.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때론 저주이기도 해서,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내리기도 하니까요.”
‘…다른 황자들 중 하나가 범인. 그렇다면, 누구를 지목해야 하지?’
아렌이 잠시 고민할 때였다.
“…아렌. 잠시 나와보겠나.”
내원 시종장이 불러냈다.
아렌은 그와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시해자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어진 뒤, 내원 시종장은 말했다.
“방금 한 말이 사실인가? 라이안 황자가 범인이라는 말 말이다.”
“사실,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가장 유력하다고는 생각했지만요.”
“가장 유력하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황자의 이름을 역모자에-”
“이 모든 건 진범을 잡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내원 시종장은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굳이 그럴 것 없이, 자네의 점괘로 범인을 특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서 가냐는 말일세!”
‘그렇게 쉬운 수가 있었다면 진작에 했겠지!’
“제 점괘만으로 범인을 특정한다면, 시종장께서는 정말 그것을 믿으실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국정이 운영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지! 자네 말대로 지금 폐하께서 쾌차하셨다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운영을 하겠네! 하지만 아니지 않은가!”
물론 내원 시종장의 말도 옳다. 하지만 아렌은 자신의 점괘가 사실은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설령 자신의 점괘가 언령과 같다고 해도, 아렌은 어쩐지 그 점괘를 남용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도 최근 나한테 생긴 예견 같은 건가?’
처음엔 단순히 과거로만 되돌아온 줄 알았다.
한번 죽은 사람이 과거에서 부활하는 것부터 차고 넘치는 기연이지만, 어쩌면 기연이 그것이 다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최근 들기 시작했다.
‘역시, 점괘를 남발할 순 없어.’
아렌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 할 때쯤.
“괜찮지 않습니까, 그 계획.”
황궁 내원 지하,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아렌은 놀라면서도 그의 제안을 들었다.
“당신은-”
*****
다음날.
황궁 안 모든 신료들을 수용할 크기의 대회견장 안.
광대한 건물 안에 급히 불려온 황자들이 모두 모였다.
황제의 용태는 아직도 그대로였지만, 더 악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호재일지도 몰랐다.
“모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들을 불러모은 주최자인 내원 시종장은 모여든 황자들을 향해 간단히 예를 표했다.
“공사가 다망하신 황자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름 아니라-”
“그보다, 폐하의 용태는 어떻소.”
제4 황자 가웨인이 시종장의 말을 끊었다. 둘은 언제나처럼 미묘하게 사이가 나빴다.
“어제와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길이 없죠. 모든 면회도 금지시킨 채, 내원으로의 출입도 엄금하고 있으니.”
“시기가 엄중하니 더욱 경계하는 것입니다. 고작 전하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내원을 개방할 수는 없습니다.”
“궁금증? 고작?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지금 하고자 한다면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둘의 언쟁이 점점 심화되어갈 때쯤.
“자, 둘 다 그만하시죠. 가웨인, 시종장님.”
둘 사이를 중재한 건 제1 황자 가웨인이었다.
“…형님.”
제국의 제1 황자에, 차기 황태자로 가장 유력한 자다.
비록 황권을 두고 다툰다고 하지만, 명분도 없이 섣불리 대들 수는 없다.
“오늘 내원 시종장께서 부르신 건, 사실 내가 요청해서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서.”
“…….”
황자들은 가웨인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조차 못 했다.
황자들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황제 폐하, 아버지를 죽인 것은, 바로 나다.”
라이안의 말이 끝났음에도 황자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