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황제가 그의 호위인 금면병의 칼에 찔렸다.
잔혹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대회견장 안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제를 찌른 금면병은 황급히 뒤에 있던 다른 금면병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졌다.
대응이 늦었지만, 설마하니 자신의 동료가 그러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암살자를 제압한 금면병이 거칠게 쓰러진 자의 황금색 가면을 벗겨냈다.
“-넌?!”
황금 가면 속 얼굴은, 금면병이 아는 동료의 얼굴이 아니었다.
황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범인에 대한 분노로, 금면병이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죽이면 안 돼요!”
단상 아래서, 엉겁결에 외친 아렌.
“그자는 말단일 뿐이에요! 죽이는 건 물론이고, 자해를 용납해서도 안돼요!”
비명과 소란이 가득한 대회견장 안이었지만, 아렌의 말은 겨우 금면병에게 닿았다.
“…폐하!”
“아버님!”
불시의 사태에 얼어붙어 있던 몇몇 황자가 뒤늦게 단상 위로 향하려 했다.
“멈춰!”
그 앞을 막아선 건,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
“모두 접근하지 마라! 내원의 궁인들 외에 섣불리 폐하께 접근하는 자는 모두 역모로 간주하겠다!”
사자의 포효처럼 서슬 시퍼런 라이안의 일갈에 황자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그의 판단 자체는 옳았다. 역모자로 황자들 중 하나가 유력한 가운데, 지금 황자들을 황제의 곁으로 보내는 것은 괜한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도 황제가 살았을 때 가치가 있지.’
장검이 복부를 관통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한 치명상으로, 그나마 위안이라면 관통 부위가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내부 장기를 다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미약하나마 있다는 것.
‘…그렇다고 살 수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내부 장기를 다치면 확실하게 죽을 뿐, 설령 장기가 모두 멀쩡하더라도 관통상은 절명에 이르기 충분한 상처다.
그 생각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대회견장 안의, 분위기는 벌써 황제의 죽음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곧 내원의 궁인들이 와 거대한 천으로 황제를 가렸고, 곧 궁의가 몇이나 붙어 황제의 용태를 살폈다.
어수선한 가운데.
아렌은 제1 황자 라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황망한 가운데, 아렌은 제1황자 라이안을 살폈다.
사람의 속내를 살피는 건 아렌의 주특기였고, 세리엔의 짐작대로 라이안이 범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남길 것이다.
아렌은 굳은 얼굴로 단상 위를 바라보는 라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전혀 모르겠어.’
라이안이 지금 어떤 생각인지, 아렌은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
대회견장의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급히 내원 안으로 이송된 황제는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을 밖에 보여주지 않는 한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곁에 있는 아렌은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아렌. 황제 시해범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있나?”
“암살자는, 원래 금면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황궁 외곽의 열두 정원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원래 호위를 맡을 금면병을 죽이고 그로 위장한 것이라 합니다.”
“…정원사?”
“네. 열두 정원사는, 키와 체격이 황제와 비슷한 자들로만 뽑힌 금면병 예비자들입니다. 실력은 말할 것 없고, 가면을 쓰면 누구든 못 알아보겠죠.”
정원사치고는 지나치게 강하고, 지나치게 과묵한 정원사가 사실은 금면병 예비후보라는 사실은 황궁의 비밀 중 하나였다.
아렌은 그간의 추리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교국 주교 아르테의 귀띔으로 알고 있었지만.
“황제 폐하는, 괜찮으신 건가?”
“…여전히 위중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직 생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적적으로 장기를 다치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그러니-”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다!”
“…전하.”
“아버님께서는 차후 괜찮아지시는 건가, 점술가로서의 네게 묻고 있단 말이다!”
“…….”
레온나토스의 절박한 물음에 아렌은 답하지 못했다.
“제발 대답해다오, 아렌.”
“그건-”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앞날에 대헤 점쳐보라니, 부담이 지나치다.
물론 레온나토스도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점괘가 아니라도 좋아. 단지 내게 폐하께서 괜찮아지실 거다,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그 말이면 된다고?’
말하는 아렌도, 듣는 레온나토스조차도 진짜 점괘가 아님을 알고 있는, 단지 위로일 뿐인 말.
그럼에도 그 말은, 점괘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아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사하실 테니까요.”
“그건 점술가로서 하는 말인가, 아렌?”
“네.”
짜고 치는 연극임을 알면서도 그제야 레온나토스는 조금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네, 아렌. 자네에게 이런 응석을 부려서.”
“아닙니다, 전하.”
황제가 무사했으면 하는 건 아렌 역시 마찬가지.
동시에, 아렌은 레온에게 당당하게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황제가 무사하다, 는 점괘는 이미 내려졌어. 그렇다면 과연, 황제는 살 수 있을까?’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테오드릭 전하.”
아렌은 낙일관 안에서, 레온나토스를 지원하기로 비밀리에 맹약한 제9 황자, 테오드릭을 만났다.
이미 황제가 되기 위한 욕심을 버렸기에, 가장 범인에서 거리가 먼 황자였다.
테오드릭의 얼굴 역시 그간의 일로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범인을 색출하겠다는 긴장과, 형제들 중 누군가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대뜸 물었다.
“…우리 형제들 중 꼭 누군가가 흉수일까? 아무리 권력을 탐한다 해도, 설마하니 나고 자란 아버지를-”
“모르죠.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권력을 탐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마력이 있을지도요.”
“레온나토스는, 어쩌고 있지?”
“통상 업무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새로이 선출된 선페일 지역의 영주를 만나고 계시죠. 그리고, 전하께는 황제 폐하께서 괜찮으리라는 거짓 점괘를 말씀드렸습니다.”
“거짓이라고?! 그런 건-”
“그게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였습니다.”
“…….”
테오드릭은 침묵했다.
테오드릭의 복장은, 평소의 궁중의를 입고 있으면서도 군데군데 검은 술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엄중하니, 자연히 복장도 그 분위기에 맞게 가는 것.
곧, 황제는 죽는다.
누구나 그리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차기 황제인 황태자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는 라이안이지만, 그가 곧바로 황태자, 혹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대부분의 황자들이 반발할 것이다.
어쩌면, 황궁에 씻을 수 없는 피가 흐를지도 모를 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쪽도 무슨 수를 써야 할지 모릅니다.”
“무슨 수? 병사들이라도 준비하라는 건가? 형님들에게 칼을 들이밀라고?”
“적어도 한 목숨 지킬 준비는 해놓아야죠.”
레온나토스와 테오드릭의 동맹 관계는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가신들 중 가장 고수가 많은 제4황자 가웨인과, 병사들의 양과 질 모두 우수한 제1 황자 라이안의 사병들.
여기에 군부 내 소신파들이 지지하는 테오드릭과 레온나토스가 힘을 합친다면 저 둘에 비견할 수 있다.
‘물론, 뒤로 얼마나 많은 황자들이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힘은, 과시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막는 억제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른 곳의 견제를 피하고자 동맹 관계를 숨기고 있지만, 어쩌면 드러내놓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어찌해야 하나.’
“아렌 공,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점술 중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화급한 용건이라.”
“무슨 일이시죠?”
“…내원 시종장 각하께서 아렌 공을 부르셨습니다.”
암실 속에 있는 아렌과 테오드릭의 눈이 마주쳤다.
“내원 시종장께서 저를요? 무슨 용건이십니까?”
“그건, 와보시면 안다고만 들었습니다.”
아무리 황궁 내원의 최고 실권자라 해도, 황자의 최측근 가신을 부르는 태도로는 꽤나 무례하다.
하지만 아렌은 내원 시종장의 호출이 무례를 의도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례인지 아닌지 가늠도 못 할 만큼 급한 용건이 있는 건가?’
지금의 내원 안에서 그럴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
*****
아렌이 다시 들른 내원은 마치 영묘 안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궁인들은 극도로 외부출입을 자제하고, 곳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에는 독기를 넘어 살기까지 보였다.
그건 자신의 집무실 안에 있던 내원 시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왔나, 아렌. 자네의 점괘는 정말 잘 맞는군.”
“…….”
내원 시종장과의 협의 하에 아렌이 퍼트린 점괘 내용이었다.
‘며칠 사이에, 황궁 안 정세는 급변할 것이다.’
“확실히 자네의 말대로 황궁 안 상황이 급변하기는 했으니 말일세.”
아직 자신의 점괘가 언령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 아렌으로선,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위중한 줄 알았던 황제가, 실은 건재하다는 진실이 알려지면 그건 그것대로 상황이 급변한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하려고 마련된 자리에서, 도리어 황제는 당하고 말았다.
내원 시종장은 말했다.
“실은 폐하께서 무사하셨다는 건, 내원 안에서도 몇몇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난 네게 그것을 알렸지.”
“…….”
‘설마, 내가 의심받는 상황인가?’
내원 시종장 주변에는 내원의 위병인 은면병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황궁의 위병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다.
그들이 한순간 창끝을 아렌에게 겨눈다면, 아렌으로선 도망칠 구석이 전혀 없겠지.
“…실제로, 자네를 의심하는 자들도 몇 있었네. 하지만 판단하건대 자네는 아니야. 적어도 전하를 노린 첫 번째 습격에선 완전히 결백하지.”
전란으로 외부와의 소통이 막힌 가운데, 레데의 전함을 상대하고 있던 아렌에게 황궁에서 벌어진 음모에 개입할 정황 따위는 없었다.
내원 시종장의 지적은 정확했다.
“하지만, 결국 범인은 그 당시 폐하가 건재하시다는 걸 알았던 자인 건 사실이야.”
그건 아렌도 동감이었다.
미리 금면병을 포섭한 정원사로 바꿔치기하고 준비하는 건 황제가 사실 무사하다는 사전정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그, 시해자는 어디 있습니까.”
“시해 기도범이다. 폐하께선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어.”
내원 시종장은 그 부분을 예민하게 짚었다.
“그 뒤 결박해두고 있네. 하지만 증언을 듣기는 커녕, 혀를 깨물게 하지 않는 게 고작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흠, 그렇군요.”
아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럼, 혹시 그 범인을 직접 만나볼 수 있을까요?”
“…자네가? 자네가 본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겠나?”
“아, 물론 큰 기대를 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아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표정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