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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27화 (127/227)

#127화

“자신의 주군이라도, 정도를 벗어난다면 패서라도 생각을 돌리겠다고? 말로만 호기로운 자들이 항상 있긴 하지.”

내원 시종장이 아렌의 말을 받아쳤지만,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럼 그 정도를 벗어난 윗사람이, 설령 황제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나?”

아렌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갑자기 제 목이 달아나지 않는다는다면, 언제든지요.”

아렌의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실제로 목이 잘린 적 있는 아렌이기에 꽤나 진심인 발언이었다.

아렌은 내원 시종장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그렇게도 위중하신 겁니까?”

“외원의 사람인 네게 함부로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너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방법이 있지 않나?”

‘…실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아렌은 외부에 용한 점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를 사용할 뿐이다.

최근 예감이나 환각이 보이긴 했지만, 스스로 능력을 다룰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내원 시종장은 분명, 범인이 레온나토스라 할지라도, 라 말했지.’

레온나토스의 부하인 아렌에게 하는 말이기에 든 예시겠지만, 그 말을 하는 내원 시종장의 표정을 아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레온나토스가 범인일 가능성조차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 없는 기색이었지.’

즉, 내원 시종장조차도 누가 범인인지, 그 방향성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렌도 마찬가지. 아렌이 가지고 있는 단서라 해봤자, 세리엔 황녀가 중얼거린 근거 없는 추측뿐이었다.

‘문제는, 세리엔의 추측이 곧바로 내 점괘나 다름없어졌다는 건데.’

아렌의 점괘가 정말 ‘언령’이라면, 범인은 곧 라이안이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에 자넬 부른 이유는, 자네가 황궁 제일의 점술가이기 때문이지. 뭔가 짚이는 구석은 없는가?”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아렌은 당장 질문을 회피하려 했지만, 내원 시종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흠, 그런가? 자네라면 금방 점괘를 봤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제멋대로 점을 보기엔 너무도 중대한 사안이고, 또 도국에서의 여독도 덜 풀린 상태라 버거웠습니다.”

내원 시종장은 눈을 흘겼다.

“그럼, 어제밤 세리엔 황녀께선 왜 자네 방에 들른 건가.”

“…!”

“황제 폐하가 걱정되어 부득이 자네의 힘을 빌리려 하신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황녀께서 굳이 자네 방을 찾을 이유가 없지.”

‘이 중늙은이, 그것까지 알고 있어?!’

그 사실을 지금 아렌에게 흘리는 목적이야 뻔하다.

어제 황제에 대한 점괘를 본 것이 맞다면, 당장 이야기해달라.

점괘를 본 것이 아니라면 세리엔이 왜 널 찾아갔느냐. 알려지기 싫다면 순순히 황제에 대한 점을 쳐라.

어느 쪽이든 아렌을 꼼짝없이 묶어두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 실제야 어쨌든 황녀께서 깊은 밤 남자의 방에 들어가다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일이지.”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 난 다만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조언한 것 뿐이라네. 소문이 퍼지려 한다면 황실의 권위를 생각해 당연히 막을 거라네. 하지만.”

내원 시종장이 이어 말했다.

“자네의 대답에 따라, 소문이 퍼지는 걸 조금 늦게 막을 수는 있겠지.”

‘…결국 같은 말이잖아.’

세리엔은 아렌이 황실 깊숙한 곳의 정보를 얻어내는 귀중한 창구였다. 그녀와의 만남을 문제 삼으면 아렌으로선 좋은 말단 하나를 잃는 것과 다름없다.

“…죄송하지만, 점괘를 보기 적합한 사안과 그렇지 않은 사안이 있습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착각, 말씀입니까?”

“난 자네더러 전하를 해하려든 범인을 찾아내라는 것이 아닐세.”

‘-설마?’

내원 시종장은, 묘하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사실 무탈하시다네.”

*****

‘-함정이다.’

아렌을 겨냥한 함정은 아니다. 노리는 것은, 황제를 노렸던 시해범.

암살 시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황제는 여전히 무사하다.

하지만 내원을 둘러싼 벽은 두텁고 높다.

황제는 오히려 자신이 암살시도에 걸려든 것처럼 소문을 낸 뒤, 진범의 움직임을 역으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일은 어디에도 새어나가면 안 돼.”

“…그 사실을, 왜 저에게?”

“아까도 말했듯 자네는 지금 이 황궁에서 가장 황제시해와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자네의 주군인 레온나토스 전하께 알려도 되네만, 그러지는 말아줬으면 하는군.”

“중압감으로 어깨가 짓눌릴 것 같은데요. 제가 뭘 하면 좋을까요?”

“점괘를 내려주게.”

“…점괘를요?”

“그래. 전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고, 빠른 시일 내에 목숨을 잃을 거라는 가짜 점괘를 말이야.”

“그건…”

역시, 아렌을 위한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원 시종장은 전혀 의도치 않은 모양이지만, 그가 지금 요구하는 것은 아렌이 꼭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황제가 죽는다는 ‘거짓’ 점괘를 내리는 것만으로, 그 내용이 거짓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나. 뭔가 마뜩잖은 표정인데. 하긴. 거짓으로 내놓는 점괘라니, 정말 실력 있는 점술가일수록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겠지. 하지만, 제국을 위한 일이야. 자네의 명예는 반드시 되찾아주겠네.”

그의 제안에 혀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괜찮은 제안이십니다.”

아렌으로선 내원 시종장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실제로 황제는 무사할 가능성이 크니까.

내원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로 보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

그 비밀을 듣고도 협조하지 않으면, 자칫 황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세력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선명한 흉조는 위험합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요. 특히 그것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금기일수록 더욱 위험합니다.”

적당한 이유를 들어 둘러댄 뒤 아렌이 반대로 제안했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아렌은 몰디나가 맡은 낙일관의 점판에 앉았다.

오전 동안만 직접 점괘를 보겠다는 말에, 몰디나는 흔쾌히 원래 주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반년 만에 낙일관의 원래 주인이 찾아왔다.

실제론 몰디나가 더 실력 있는 점술가라 해도, 모여든 궁인이 보기엔 단지 아렌이 없는 동안의 점술관 대타일 뿐.

아렌이 점판에 앉았다는 소식이 돌자마자 낙일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아렌 공, 오셨습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빨리 점을 좀 봐주게! 간 밤에 꾼 꿈이 여간 뒤숭숭한 게-”

“곧 이직을 할 생각인데 옳은 선택일까요? 그렇다면 시기는 언제로 할까요?”

아렌을 반김과 동시에 쏟아지는 질문들은, 오랜만임에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렌은 개개인에 맞게 최대한 신중히 답변을 하면서도, 한가지 중심 축을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운 시일 안에 황궁 안의 정세가 급변할 거예요. 그러니 대비를 하시는게-”

“…급변한다니, 뭐가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종전의 질서가 송두리째 바뀐다는 것밖에는…”

“종전의 질서? …서, 설마!”

점괘를 들은 궁인은 혹여나 흉험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까 봐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기존의 질서가 변한다, 황제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충분한 말이다.

남은 건, 아렌에게 점괘를 들었던 사람들이 황궁 곳곳에 퍼트려주기만 기다릴 뿐.

낙일관 안에서, 다음 손님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아렌은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극적인 연출, 뿐인가?’

곧 어전회의가 열릴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어전회의가 열릴지 회의적이었지만, 어전회의는 열린다.

거기서 황제는 자신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아렌의 점괘를 믿고 섣불리 움직인 놈들이 있다면 잡아들이기도 하면서.

‘이번을 계기로 황권이 더욱 올라가겠지. 그에게 조력을 준 나나 레온나토스의 위치도 조금 더 올라갈 테고.’

생각해보면 카르도나와 헬데움과 비슷했다. 레온나토스는 급진적인 변혁보다, 기존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인 성장이 더 잘 어울렸다.

‘그때, 많은 것이 바뀌겠지.’

며칠 뒤 있을 어전회의가 벌써 기다려지는 아렌이었다.

*****

일 년에 네 번 있는 어전회견장.

모든 신료들이 모여앉은 가운데, 단상 위 앉은 세 명이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가면을 쓴 황제와, 그 황제를 밀착해서 지키는 최정예병사, 금면병이었지만 그걸 보는 많은 신료들은 조금 다른 것을 생각했다.

‘저 중에, 정말 황제 폐하가 계실까?’

‘직접 가면이라도 벗지 않으시는 한 아무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

‘이것 봐. 결국 한마디도 안하시잖아? 역시, 지금도 위중한 상태인 게-’

그들의 생각대로 황제의 모습은, 나중에 얼마든지 붙여넣을 수 있다.

“…….”

내원 시종장이 안건하고 신료들이 의견개진을 하는 동안, 황제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점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의혹이 확신이 되는 순간.

어느덧 회견장 안의 분위기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어느 순간,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신료들이 모인 좌중에 조금 소란이 일었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지만, 황제로선 신료들을 굳이 불필요하게 속일 필요가 없었다.

황제는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가린 금도금 가면을 벗었다.

“…폐하시다.”

“폐하께선 무사하시다!”

황궁 안에서도 황제의 맨얼굴을 본 사람은 손에 꼽는다.

하지만 곳곳에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기에, 모순되게도 가장 잘 알려진 얼굴 또한 황제의 얼굴이었다.

“짐은 여기 있노라!”

“오오…”

누군가의 안도 섞인 중얼거림이 곳곳에서 퍼져나갔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정점, 모든 결정은 황제의 손끝을 한 번은 거쳐가야 했다.

황제가 지금 죽기라도 하면, 황태자가 책봉되기도 전의 황궁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최근 황궁 안에서 꽤나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더군. 무시하려 했으나 거기에 꽤나 미혹되는 자들도 있어서 말이다!”

황제의 말에 몇몇 궁인의 눈이 아렌을 향했다.

아렌 역시 그들을 향해 속으로 투덜댔다.

‘난, 틀린 말은 안 했다고.’

그 말대로, 곧 죽을 거라 여겼던 황제가 신료들 앞에서 똑똑히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상황이 급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자신을 해하려 했던 자에 대한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역시, 범인을 몰아가는데 더 효과적이라 그럴 터.

“하지만, 불미스러운 소문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과인을 해하려 한 무도한 자는 실존했으니까.”

아아, 다시 한숨 섞인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그자는 바로-”

황제가 입을 열려는 순간.

황제의 뒤에 서 있던 금면병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뭐지? 누가 화살로 노리고 있기라도-’

아렌이 의아해할 때.

금면병은 칼을 뽑아 들었다.

“폐하!”

아렌과 상황 판단이 빠른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또 다른 금면병이 급히 나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금면병의 칼이 황제의 복부를 관통했다.

대회견장 안을 비명이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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