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라이안?’
황녀의 중얼거림은 충분히 작았지만, 촛불 아래서 그녀의 표정과 함께 있는 아렌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큼의 성량이었다.
‘황녀는 라이안을 의심하고 있나? 아니, 그보다-’
자신의 점괘가 ‘언령’인지 아닌지 확인될 때까지는, 당분간 점괘를 보는 것을 지양하려던 아렌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녀에게 점괘를 내린 꼴이 되어버렸다.
‘내 점괘가 언령이라면, 범인은 제1 황자 라이안이라는 건가?’
원래부터 라이안이었거나, 혹은 따로 범인이 있었지만 아렌의 말에 의해 범인이 되었거나.
의도하지 않은 사이, 아렌은 또다시 ‘언령’에 대한 검증용 씨앗을 뿌려둔 꼴이 되었다.
세리엔 황녀의 의심대로, 라이안이 범인일 이유는 차고 넘친다.
황제가 갑작스레 붕어할 경우, 차기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라이안이니까.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만큼, 오히려 그런 조급함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렌의 추측은 타당했다.
실제로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의 나이가 서른을 넘을 때까지 황제는 건강의 문제 없이 정정했으며 라이안 역시 부동의 황태자로서 그 옆을 지켰다.
비록 첫 번째 삶과 달리 레온나토스가 급부상하긴 했지만, 그건 이제와서 조급함을 보이는 이유로는 부적절하다.
“흠…”
촛불 아래서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세리엔 황녀.
아렌은 우선 그녀부터 돌려보내기로 했다.
“답은 드렸습니다. 만족하셨다면, 이제 돌아가실 때로군요.”
아렌이 문을 가리키자 황녀은 볼을 부풀렸다.
“자, 잠깐만. 그렇게 문전 박대할 일이야?”
“이미 지금 시간에 여기 계신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자, 얼른얼른.”
“미, 밀지마, 아렌!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떼쓰셔도 소용없습니다.”
“치사해! 철면피! 냉혈한!”
다소 우악스레 그녀를 방 밖으로 내보낸 후.
아렌은 아직 방에 남아있는 몰디나를 돌아봤다.
“아, 걱정 마요. 나도 나갈 테니까. 황녀 전하는 제가 모시고 갈게요.”
“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지금도 황녀는 문밖에서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국에서의 일은 들었어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아렌.”
“저야 그냥 휘말렸을 뿐이죠.”
“이제, 낙일관을 다시 맡으실 거죠? 지금까지는 제가 어찌어찌 유지해왔지만, 아렌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그야 그렇겠지.’
낙일관이라는 이름부터가 아렌을 가리키는 작명이었다.
해가 사라지는 것을 예견한, 고작 열 살이 넘은 점술가.
낙일관에 몰려든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 이름값에 홀린 것이다.
하지만.
“죄송해요. 당분간은 낙일관을 계속 맡아주시겠어요?”
“…저야 상관없지만. 하지만 아렌이 여기 돌아온 이상 모두 아렌을 찾을 거에요.”
“네. 알고 있어요. 기약을 정해둘 순 없지만, 당분간이면 돼요.”
자신의 점괘가 언령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터였다.
그런 확신이 아렌에게 있었다.
*****
그 후 4일이 흘렀다.
황궁 안은 여전히 불길한 적막 속에 있었고, 꼭꼭 닫친 황궁 내원에선 어떤 소식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황궁 안의 불온한 공기를 확산시켰다.
‘일단 아라흐네에게 한 점괘는 적중한 셈인가?’
그녀에게 준 점괘는, 4일 동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별일 없는 상태가 지속될 거라고 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점괘를 말한 것이다.
점괘 하나가 들어맞았다고 호들갑 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렌은 도국연합에서 온 서신 두 장을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었다.
각각 카르도나의 듀란 우피치, 헬데움의 세밀 메렌치가 보낸 서신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금방이라고?”
아렌은 조금은 긴장해 끈적이는 손으로 서신의 밀봉을 뜯었다.
가장 처음은 듀란의 서신. 그다음 세밀의 서신을 읽어나가는 동안, 아렌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갔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렌?”
아렌의 집무실 뒤쪽 벽에서 대기중이던 멜로익이 물었다.
황궁 안에서 아렌이 꽤 많은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 중 하나였다.
“…도국을 떠나기 직전, 세밀과 듀란에게 각각 점괘를 줬거든. 그 결과를 보내왔어.”
“그래서, 점괘가 다 빗나간 거야? 하지만 어차피 타국의 사람이니 그리 타격도-”
“아니, 다 맞았어.”
“…?”
멜로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딱히 문제될 게 있어? 점괘가 맞았다니, 좋은 것 아냐?”
‘그게, 그렇지만도 않으니 문제지.’
듀란 우피치에게 한 점괘는, 카르도나 국제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던 카르도나 실록이 온전하리라는 내용이었다.
완전히 불에 타고 무너진 도서관의 책이 무사할 리 없다고 듀란이 단정지었지만.
카르도나 실록은 도서관의 지하1층, 중앙에 있는 작은 방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원래라면 도서관 건물이 무너지면서 지하실 역시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하지만, 그 방만이 무너지지 않고 온전히 남아서 안에 남겨진 실록 역시 무사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보관된 다른 책들은 모두 무너진 벽돌에 찢기고 불에 타 책으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
카르도나로서는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지만, 그것 하나만으론 아렌의 점괘 때문이라 말하기 어렵다.
거기서 아렌이 펼쳐본 두 번째 서신.
최소한 재건하는데 반년은 걸릴 거라던 헬데움의 항구와 선박.
그것이, 잘 풀리면 한 달 안에 완공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지원을 약속한 곳은 카르도나.
도국 연합의 패권을 두고 오래도록 경쟁하던 사이지만, 두 도시가 휘청하는 사이 다른 도국이 신흥 강자로 부상하기 위해 헬데움과 카르도나를 견제하는 양상이었다.
카르도나로서는 헬데움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홀로 우뚝 서서 모두의 견제를 받는 것보다, 대등한 상대를 만들어 견제 역시 반으로 줄이겠다는 건가.’
이른바, 적대적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
레데로부터 나포한 전함도 헬데움이 잃은 만큼 공여받기로 했다는 소식.
항구와 함께 선박만 불탔을 뿐 병력의 피해는 없었기에, 전함만 갖춰진다면 헬데움의 군사력은 일순 부활하게 된다.
조선소의 목수를 모두 항구 재건에 쓸 수 있는 건 덤이다.
‘카르도나와 헬데움은 변화를 거부하고 패권을 유지하기로 정했군. 다른 도시들의 압박은 더욱 심해질테고.’
그녀들이 아렌에게 보낸 서신에는, 그런의미도 있을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나름의 친분을 쌓고, 한 전장에서 하나의 적을 목표로 같이 싸운 사이.
제국이 도국 연합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다른 곳보다 헬데움, 카르도나와 손잡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물론, 지금의 제국에 그런 역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아렌이 대충 던진 두 점괘가 모두 들어맞았다.
아렌으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어.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한데.’
시험해보기 위해선,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낙일관보다는 안면이 있는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
찾아갈만한 상대는 많았다. 제9 황자 테오드릭은 뒤로 손잡은 동맹이었고, 제4 황자 가웨인도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정말 황제가 음모에 휘말렸다면 황자들 중 하나가 범인이라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섣부른 접촉은 사지 않아도 될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오로지 황제를 위해 존재하는 황궁 내원은, 외원에서까지 느껴질 만큼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안쪽 분위기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원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하지만-’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평상시의 내원 또한 용건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초대를 해야만 잠깐이라도 들르는 것이 허용된 황제의 정원.
그것이 황궁 내원이었다.
그때.
문밖을 지키는 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렌 공. 내원 시종장의 궁인이 찾아왔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초청장’이 올 줄은 몰랐다.
희미하게 웃으며, 아렌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 방문하겠다고 전해줘.”
*****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내원 시종장 각하.”
“좀 더 일찍 불렀어야 하는데, 미안하군. 보다시피 황궁 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네.”
“괘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렌의 앞에는 단상에 있는 내원 시종장 뿐, 위병은 꽤 먼 곳의 벽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위병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했던 인물이 중태인 것에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자네가 돌아온 지 4일째가 되어서야, 자네를 불러들인 이유를 알겠나?”
“제게 있는 재주가 많지 않으니, 당연히 그 중 하나 때문이겠지요.”
“물론 자네의 점괘 때문이지만, 점을 봐달라는 건 아냐.”
“…네?”
“자네는 점을 봐주는 척하며, 실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그러모으고 있지 않나?”
‘…역시 방심할 수 없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전, 황궁에 도착한 지 아직 며칠 되지 않아 정보를 모을 새도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네.”
대화의 흐름을, 아직 아렌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자네는 반년간 황궁을 떠나 있었지. 다시 말해-”
“…그 사이 황궁에서 일어난 음모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없다. 이겁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군. 평상시였다면 경계했을 만큼.”
즉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원 시종장 각하. 황궁 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내원 안의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일에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네를 쓸 때는 확실히 사전 설명을 하겠네. 하지만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
내원 시종장은 지엄한 태도로 물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황제 폐하와 관련된 음모에 자네의 주군인 제12 황자가 연루되었다면, 자네는 어느 쪽을 지지할 생각인가?”
‘…레온나토스가?’
물론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
최후의 순간 황자와 황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냐는.
대부분의 궁인이라면 황제를 선택하겠지만, 황자의 가신으로 들어간 궁인이라면 또 사정이 다르다.
아렌의 대답에 따라 내원 시종장이 아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겠지.
‘하지만, 내원 시종장도 꽤 구석에 몰린 모양이군.’
원래 이런 식으로 직접 몰아세우는 자가 아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가정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지만. 역시 레온나토스 전하를 저버릴 순 없겠지요.”
“역시, 그런가?”
내원 시종장의 태도에서, 열기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렌은 부연했다.
“네. 황자 전하가 옳지 않은 선택을 했다면, 전 가신으로서 응당 그 행위를 막아야 하니까요. 설령 손찌검을 해서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