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언제나와 같이 사람없이 한산한 황궁 서고.
그 옆에 작게 마련된 별실에, 눈을 안대로 가린 청년이 앉아있었다.
전맹사서, 레밍이었다.
황궁 서고에는 따로 도서관장이 있지만, 레밍이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된 이후 이곳의 실세는 자연스레 레밍이 되었다.
비록 시각을 잃었지만, 레밍은 장서목록을 보지 않아도 어디에 무슨 책이 꽂혀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 초인적인 기억력에 다른 사서들도 의지하면서, 이제는 레밍 없이는 황궁 사서의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아렌입니까. 도국 연합에서의 일은 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렌이 따로 기별하지 않았는데도 레밍은 발소리를 듣고 아렌임을 바로 알아챘다.
예전의 말단 사서일 때는 아직 시각이 남아있었지만, 대신 불필요한 잡무나 은근한 괴롭힘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모든 빛을 잃었지만,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 일할 수 있는 레밍은 과거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실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렌이 절 찾아왔다니, 물론 그 이유 때문이겠죠. 뭐죠?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요.”
레밍은 아렌이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별실의 사람들을 물린 뒤였다. 엿듣고자 한다면 들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도 사람이 없는 도서관이다. 누군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금방 눈에 띄고 만다.
“실은, 도국에 가 있는 동안 어떤 문헌을 봤어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나와 있더군요. 그 중엔 비를 내리게 하는 사람에 관한 내용도 있었죠.”
“아아. 수확제 도중 라이안 전하께 죽임을 당한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의 이야기인가보군요.”
“네. 그리고 그 외에, 말하는 대로 모든게 이뤄지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요? 그게 사실이면 전지전능이나 다를 바 없잖아요.”
“혹시 서가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적 없어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릴 정도로 레밍의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비록 머릿속에 세상 모든 책을 다 집어넣지는 못했지만, 필요한 책이라면 반드시 들어가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독서가 단순히 취미였던 과거에는 레밍이 좋아하는 책만 머릿속 서가에 넣어뒀지만, 레온나토스의 가신이 된 지금은 업무적으로, 레온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을 우선으로 집어넣었다.
“흠… 그런 내용이라. 설화나 전설 쪽을 찾아봐야겠군요. 제가 자주 찾던 책들은 아니에요.”
‘역시 틀렸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 온 것이다.
역시 틀린 것인지, 아렌이 단념하려 할 때쯤.
“더 자세한 걸 들어봐야겠지만, 지금 설명만 들었을 때는 마치 언령술 같네요.”
“…언령술?”
아렌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네. 실제로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 없지만, 상고(上古) 시대에 존재했다 일컬어지는 비술 같은 거죠. 유랑민족의 설화 중에서 간혹 등장해요.”
아렌이 다른 사람에게 내뱉은 점괘는 실제로 일어난다는 ‘가설’은 아직 가설로만 남아있지만, 아렌은 거기에 ‘언령’이라는 이름을 붙여두기로 했다.
“언령이라. 거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데요?”
“저도 그 이상은 몰라요. 제게 관심이 덜 가는 분야인지라. 몇 가지 책을 추천 드리죠.”
레밍은 방 밖의 시동을 불러 몇 가지 책을 가져오게 했고, 그 사이 아렌은 도국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레밍에게 전달했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각각 한 나라의 수도만 한 대도시들.
각 도시를 바삐 누비는 갤리선과 군함.
온 대륙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유서깊은 학교와, 그곳에 있는 수만권의 장서에 대해서도.
‘-아차.’
거기까지 말하자, 아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렌이 발의한 작전 때문에, 수만 권의 장서가 모두 불타 버렸다고요?”
레밍의 목소리는 결코 높아지지 않았지만, 그 말속에 진흙처럼 깔린 감정은 분명 은은한 분노였다.
“…모두는 아닐지도요?”
“도서관이 무너졌다고 했잖아요. 그럼 마찬가지죠.”
“저기, 화났어요?”
“세상에, 모든 책의 사본이 마련돼있다고 해도, 원본은 원본이기에 그 가치가 있단 말입니다. 사본이 확실한지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본과 대조하는 것이니까요. 이제 사본만 남은 책들은 영원히 그 진위에 논란이 남겠죠.”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제 본의가 아녔어요.”
“…물론 당신이라고 그 많은 장서를 전부 태우고 싶지는 않았겠죠. 그땐 그 방법이 최선이었겠죠?”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긴 해요.”
“그럼, 그게 맞겠죠.”
아쉽지만,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
레밍은 더는 바꿀 수 없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학교의 도서관을 보면서 레밍이 그곳에 있었다면 훨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어요. 학교 도서관은 불에 탔지만, 그보다 더 큰 도서관은 남아있거든요.”
“흥미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곘죠. 하지만, 전맹인 제가 그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책 읽어주는 시동이 없다면 전 한 글자도 읽지 못하니까.”
눈으로 보는 것과 소리로 듣는 것은, 속도에서부터 그 차이가 심하다.
레밍이 카르도나에 얼마간 체류한대도 그가 읽을 수 있는 도서의 양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죠?”
“…마치 가고 싶다고 하기만 하면 곧바로 보내줄 태세로군요.”
“그 정도 힘은 있거든요. 카르도나 안에 아는 사람도 생겼고.”
“…그렇게 말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아, 하지만.”
은은한 미소를 띄던 레밍의 얼굴이 흐려졌다.
“지금 황궁 분위기로는 당분간 무리지 않을까요?”
‘아, 그랬지.’
황제가 위중하다는 문제가 아직 남아있었다.
“역시, 함부로 유학도 가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가요?”
“…자랑은 아니지만, 주변의 소곤거리는 작은 소리도 잘 들리는 것과 별개로 전 황궁 안의 소문에 별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그런 제가 알 정도라는 건-”
지금 상황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
그때, 시동이 다섯 권의 책을 한아름 안아서 가져왔다.
“…전하께서 왜 아렌을 급하게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죠? 폐하의 상태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던 거겠죠.”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아렌은 어떤 식으로든 빠른 시일 내에 점괘를 봐서, 레온나토스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이름 난 점술가가 정작 가장 필요할 때 점을 못치는 건 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아렌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그보다도 첫 번째 삶까지 포함해 오랜 인연이었던 레온나토스를 돕고 싶다는 것 역시 솔직한 심정이었다.
‘빨리, 진위를 밝혀야 해. 내 말이 언령인지 아닌지.’
*****
늦은 밤, 아렌의 방 안은 다섯 개나 밝힌 촛대로 인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아렌은 빌려온 책을 읽고 있었다.
모두 오랜 과거, 지금 제국의 영토에 변변한 나라조차 없던 상고시대의 설화집들이었다.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얼어붙은 산맥 건너에서 남하한 털복숭이 인간, 설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선진화된 공학과 율법, 지식을 전파했으며, 어떤 자는 땅을 접은 채 걷고 어떤 자는 몸과 영혼을 분리할 수 있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다.
‘역시, 책 안의 내용을 모두 믿진 못하겠어.’
그리고, 레밍이 말했던 ‘언령’에 관한 내용도 적혀 있었다.
“…설인이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치 세상이 그의 말에 맞춰 변화하는 것 같았다, 라.”
얼핏 아렌의 가설과 비슷해도 보였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아렌은 책상 위 놓인 촛대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이 촛불은 안 꺼진다. 안 꺼진다.”
중얼거린 후.
-훅.
입김을 불자, 촛불은 너무도 손쉽게 초 위에서 사라졌다.
“…이래서야, 뭐가 ‘언령’이라는 거야.”
이미 아렌은 자신의 ‘언령’이 실존한다면, 점괘의 형태를 빌려서만 통용된다는 가설을 내렸다.
방금의 촛불이 꺼진 것 정도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나마 문헌 중에서 아렌의 가설과 가장 흡사한 이론이 바로 언령이었다. 그런 언령과도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는 만큼, 자신의 의혹이 괜한 걱정이었나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갑자기 불은 왜 끄는 거야?”
“헉!”
아렌은 방문을 되돌아봤다.
거기 있는 건, 야심한 밤 등잔을 들고 찾아온 황녀 세리엔과 몰디나였다.
‘…저 둘이 함께?’
“물어봤잖아. 방금 촛불은 왜 불어끈거지?”
“…질문은 제가 해야겠는데요. 이런 야심한 밤에 외간 남자 방에 들어오다니 너무 당돌하신 것 아닙니까?”
“다, 당돌?!”
“표현이 좀 그랬나요? 아니면 맹랑하다고 할까요?”
“…허, 그래서 이렇게 몰디나와 동행했잖아!”
“쉿. 밖에 들립니다.”
“…….”
이미 황궁의 대부분이 잠든 야심한 밤.
황녀가 동년배 남자의 방에 몰래 찾아오는 건 괜한 소문이 돌기 딱 좋았다.
일단 둘을 방 안에 들인 아렌.
방 안은 열여섯짜리 궁인이 쓰기엔 지나치게 넓었지만, 제국의 황녀를 들일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누추한 의자 위를 얼른 정리하며 아렌이 물었다.
“그런데, 왜 두 분이 함께 온 거죠?”
질문에 답한 건 레온나토스가 새로이 고용한 점술가, 몰디나였다.
“아렌 공의 말대로 낙일관을 맡고 있었는데, 세리엔 전하께서 매주 들르시더군요. 기회가 닿아 다시 화해할 수 있었답니다.”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어. 완벽한 점괘란 없다는 걸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반성하고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모두 그때 제 실력이 부족했던 탓인 걸요.”
원래 세리엔의 시녀였던 몰디나.
하지만 사냥대회가 무사히 끝날 거라는 점괘와 달리 13황자가 죽자 세리엔은 몰디나를 내쳤다.
‘…그러고 보니.’
몰디나는 아렌이 본 누구보다도 잘 들어맞는 점술가였다. 대부분의 점술가는 아렌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말과 연출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을 뿐.
진짜 미래를 예견하는 건, 아렌이 본 바 몰디나 뿐이었다.
‘몰디나에겐 운이 없었어.’
다만, 몰디나가 예견하는 미래는 원래 응당 일어났어야 할 일.
미래의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되돌아온 아렌으로 인해 촉발된 일이나, 운명석과 계약된 사람의 미래는 보지 못했다.
그건, 예전에도 아렌이 내렸던 결론.
‘운명석의 존재는 멜로익 같은 진짜에겐 악몽과도 같겠어.’
“그래서, 이렇게 야심한 밤에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한밤 중의 방문은 세리엔으로서도 큰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
그녀는 지체없이 본론을 꺼냈다.
“만약 아버지, 폐하를 해한 것이 형제들 중 있다면 그게 누굴 것 같아?”
“…….”
황녀의 질문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시는 질문입니까? 지금 황자전하들 중 시해범이 누구냐 물으셨습니다.”
“그 뜻으로 물어본 거야. 궁인으로서가 아니라, 점술가롯의 아렌에게.”
“하지만, 그런 질문에 대답은-”
“못하는 거야?”
‘언령’에 대한 고민이 없던 과거의 아렌조차도 대답하기 극도로 민감한 질문.
하지만 세리엔의 도발은 평생을 점술가로 살아온 아렌의 부아를 치밀게 했다.
“-좋습니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죠. 가깝지도 멀지도 않고, 좋지도 싫지도 안은 사람을요.”
시선을 조금 위로 한 다음 잠깐 생각에 잠긴 세리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네. 바로 그 사람입니다.”
“…….”
평법 중의 편법이었지만, 이렇게 하면 설령 점괘가 빗나가도 세리엔이 아렌 탓을 학 확률은 적다.
진범이 밝혀지더라도 그건 지금이 아니라 꽤 시간이 지난 후일 테고, 그녀가 떠올린 사람과 달라도 그때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고 자책하기 딱 좋다.
세리엔이 누구를 떠올렸는지, 아렌은 모른다.
‘사실 알 필요도 없지. 그랬다간 내가 뒤집어쓸 테니까.’
“…설마.”
하지만, 세리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설마, 라이안 오빠라니.”
‘…라이안?!’
라이안. 황자들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제국의 제1 황자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