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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24화 (124/227)

#124화

“황제 폐하가, 위독하시다고요?”

아렌은 절로 커지려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주변에 달리 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함부로 입에 담을 만한 말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폐하께서는 한 달쯤 전부터 완전히 칩거 상태에 들어가셨지. 최대한 함구하고는 있지만, 황자 전하쯤 되는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신 눈치야. 레온 전하의 가신들 중에서도 알고 있는 건 나 하나 정도고.”

하지만,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일 터였다.

황자 급에서나 알 만한 내용이라 해도, 황궁 안의 비밀은 제대로 된 비밀이라 할 수 없으니까.

“전하께서 위독하신 이유를 모른다고요?”

“그래. 병인지 음독인지, 암살시도인지조차도 몰라. 확실한 건 황궁 내원 안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는 정도?”

상황은 급박하지만 별다른 단서는 없다.

그런 만큼 레온나토슨느 아렌의 점괘에 기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렌은 당분간 점괘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황궁에 가서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점괘 정도 뿐이잖아요?”

“네 점괘를 ‘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건 너 정도 뿐이야.”

“아뇨. 정말이에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뿐이죠.”

아렌의 말은, 평소의 아렌을 잘 알고 있는 더글라스에게도 퍽 생소한 모양새였다.

“…대체 뭐야? 갑자기 겸손해져선. 도국에서도 네 점괘 덕을 톡톡히 본 것 아냐?”

“거기서 배운 거라곤, 제대로 다룰 수 없는 힘이라면 함부로 휘둘러선 안된다는 것 뿐이에요.”

“아아, 레데 말이냐? 하긴, 무모했지만.”

더글라스는 멋대로 착각했다.

아렌이 한 말은, 자신의 점술 능력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추측대로 아렌이 정말 미래를 볼 수 있고, 심지어 말하는 대로 미래가 바뀌기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행보는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미켈 랜돌프를 죽인 건 다름 아닌 아렌 본인이었으므로.

“…대체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너도 도국에서 거하게 데인 모양이구나. 어쨌건, 고민이 있으면 전하를 만나봐. 내가 받은 임무는, 너를 한시바삐 황궁에 데려다 놓는 것 뿐이니까.”

“네. 서두르죠.”

아렌의 조급한 마음을 반영이라도 한 듯 마차는 속도를 높였다.

벌써 도국 연합의 강역을 넘어, 제국의 국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렌은 뒤에 남겨두고 온 도국 사람들을 생각했다.

‘언제든 곤란해지면 연락하라 했지만… 정작 제국이 도와줄 처지일지 모르겠군.’

황제의 위독함이 더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다면.

카르도나와 헬데움의 흔들림을 반기는 세력이 있는 것처럼.

세상엔 제국의 위기를 반기는 자들 따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

아렌을 태운 마차가 황도에 도착했다.

금의환향 정도를 바란 건 아니지만, 아렌의 도착은 무안할 정도로 황궁 안에 어떠한 반향도 불러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황궁 안에서 이름 있는 점술가의 유학이었고, 도국 간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실 역시 알려졌을 터.

하지만, 그만큼 지금 황궁에 아렌의 도착 따위에 신경써줄만한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소문을 전혀 모르는 궁인이라도 위화감을 느끼겠군.’

기억과는 사뭇 다른 황궁의 모습을 뒤로하고, 아렌은 곧바로 레온나토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다른 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였다.

“왔구나, 아렌. 그동안 만나지 못한 지 6달째인가?”

“…전하. 모습이-”

아렌은 그간의 안녕을 묻지 못했다.

며칠이나 밤을 지샜는지, 레온나토스의 안색은 거무죽죽했고 뺨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지쳤을 테지만, 괜찮다면 곧바로 점부터 봐주지 않겠나?”

아렌의 생각보다도 더 여유가 없는지, 레온나토스는 곧바로 점괘를 봐달라고 주문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몰디나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점술실력도 저 못지않습니다.”

실은, 아렌 이상이었다.

이전까지 사기꾼이나 다름없던 아렌에 비해, 몰디나는 정말 신기있는 진짜 점술가였으니까.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디나는 내가 궁금한 걸 점치지 못했어. 다른 것은 곧잘 점치면서, 꼭 궁금한 부분만 검게 안개가 낀 것 같다고 하더군.”

‘…검은 안개가 낀 것 같다고?’

몰디나가 아렌의 미래를 엿볼 때마다 앞을 가렸다던, 검은 안개.

아렌의 가설대로라면, 아렌을 점칠 때 보인다는 검은 안개는 운명석 계약자에 대해 점을 칠 때만 나타난다.

그 이유는 모른다. 단지, 운명석 계약을 통해 원래의 운명에서 벗어나서 그런 건가, 막연히 생각할 뿐.

‘몰디나는 아르테에 대해서도 점을 보지 못했어. 그럴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그런 몰디나가 황제에 대해 점쳤을 때 똑같은 검은 안개를 봤다는 사실은.

‘황제도 운명석의 계약자였나?’

하지만 몰디나는 원래부터 황궁 시녀 출신이었다. 그동안 황제에 대해 점쳐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전까지 괜찮았지만,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였다.

‘황제가 최근에야 운명석과 계약했거나.’

혹은.

‘…운명석과 계약한 자가, 황제를 해하려 했거나.’

“이해했나, 아렌? 지금 믿을 건 아렌 네 점괘밖에 없다는 걸.”

“하, 하지만.”

아렌은 조심스러웠다.

지금 아렌은 내뱉은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축제에 갑자기 내린 폭우와 미켈 랜돌프의 죽음. 둘 다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내뱉은 말이 전부 실제로 이뤄지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면 아렌이 과거로 되돌아온 것 역시 비현실적이다.

이미 상식이 어그러진 상황 속에서, 다른 상식을 운운할 수는 없다.

‘…아직 가설이 맞는지 아닌지 검토조차 못한 게 뼈아파.’

만약 아렌이 나쁜 점괘를 말했을 때, 그게 실제로 이뤄진다면 아렌의 입맛은 쓸 수밖에 없다.

이미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점괘로 미켈이 죽은 후였으니, 최대한 같은 실수는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좋은 점괘를 말한다면?’

당초 아렌의 추측대로 점괘가 그대로 이뤄진다면, 아렌에겐 더할 나위 없는 결과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렌의 착각일 뿐이었다면?

좋은 점괘가 정 반대의 결과로 다가왔을 때 점술가는 가장 큰 비난을 받는다.

첫 번째 삶의 아렌 역시 이 경우로 인해 죽었으니까.

점술가가 길조를 말했을 때의 만성적인 딜레마였다.

아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전하. 아렌은 지금 막 먼 길에서 도착한 참입니다. 도국에서도 실로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지금은 여독을 푸는 것이 먼저인 듯합니다.”

“오오, 그랬지. 그 일은 보고받았네. 제국의 이름으로 실로 큰 결단을 내렸어.”

평소였다면 레온나토스는 가장 먼저 아렌에게 수고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간단한 치하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점에서 레온나토스의 절박함이 드러났다.

“전하께는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차후 말을 맞춰달라는 청이 정도를 넘는 행위였음은 자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신경쓸 것 없네. 그것이 정녕 제국에 도움 될만한 일이라면. 아렌 네가 보기에, 레데보다는 기존의 도국 질서가 더 유리하다 판단한 거겠지?”

“네. 레데의 무력은 다른 도국에 비해 너무나 압도적이었고, 오랫동안 공들여 전쟁을 준비했다는 기색도 없었어요.”

무력으로 패권을 쥔 자는, 자신의 힘이 곧 권위이기에 힘자랑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설령 레데가 도국 전체의 패권을 쥐었다 해도, 설마하니 제국에 곧바로 병력을 들이박는 바보는 아닐 것이다.

“설령 레데가 덜컥 모든 도국을 휘하에 두었더라도, 그 이후까지 고려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다른 두 구심점, 헬데움과 카르도나와 달리 지속적으로 제국과 마찰했을 테고요. 제국이 전쟁을 원했다면, 그 빌미를 제공해 줄 레데가 득세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에게 그런 욕심은 없었다.

“과연. 수고 많았어. 오늘은 그만 푹 쉬도록 해.”

‘점괘 이야기는 다음에 하려는 건가? 나로선 잘된 일이지만…’

아렌은 조용히 레온나토스의 방을 나왔다.

‘…첫 번째 삶에선 분명, 황제는 이맘때쯤 아무 일 없었어.’

이토록 황궁 전체가 긴장하는 사건을 아렌이 기억 못할 리 없다.

한번 바뀌어버린 역사는, 갈라진 강줄기처럼 점점 하류로 내려갈수록 원래 줄기와 멀어질 뿐이었다.

‘우선은, 현상의 검증부터.’

아렌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미리 하녀들이 준비해놓은 듯,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방 안 탁자 위엔 신선한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 중 사과를 집은 아렌.

“난 이제 이 사과를 먹지 않는다. 먹을 수 없다.”

중얼거린 다음.

와삭!

껍질 째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신선한 과즙이 입 안 가득 맴돌았고, 아렌은 얼마간 계속 과육을 씹었다.

“…먹을 수 있어. 역시 말한다고 다 이뤄지지는 않는 건가?”

싱겁지만, 안도되는 결과.

하지만 아렌은 금방 자책했다.

“-난 바보인가? 원래 점술가는 자기 점을 볼 수 없는데.”

아렌이 자신에 대해 한 말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은, 확인부터.

일단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에게 한 말은, 결과가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점판을 열어서 무분별한 점괘를 눌어놓을 생각도 없었다.

점괘가 실제로 이뤄졌는지 제대로 가늠하려면, 입이 무거운 소수에게 하는 것이 제격이다.

아렌은 아라흐네를 불렀다.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의 아내였고, 끝내 배신해 죽게 했던 여자.

물론 첫 번째 삶과 많은 것이 달라진 지금, 현재의 아라흐네를 첫 번째 삶의 아내 아라흐네와 동일 인물이라 여기는 건 무리가 있었다.

“…오자마자 갑자기 부르다니,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불령노 아라흐네는 조금은 마뜩잖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별일 아냐. 그냥, 오랜만에 점을 봐주고 싶어서.”

“…오랜만에, 점이요? 절 일부로 찾아와서 점을 봐주고 싶다고요?”

“바로 그 말인데.”

순간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가는 아라흐네.

“그동안 별일 없었고?”

“…그런 질문이 용케 나오네요? 지금 황궁 분위기를 보고도?”

“…아, 그랬지 참.”

그녀는 시녀이면서 동시에 황제 직속의 정보원, 황제의 눈 출신이기도 했다.

비록 위의 자세한 사정까지 내려오진 않겠지만, 일변한 황궁 안 분위기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럼, 내가 봐줬으면 하는 것 있어?”

“…그럼, 최근 황궁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언제쯤 평온해질까요?”

‘자, 이제 어쩐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대답하는 건 간단하다.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적당히 우려도 담아 대답하면 알아서 해석해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렌이 한 점괘가 얼마나 잘 적중하는지 알아보는 시험이었다.

점괘는 바늘로 한 점을 찍듯 정확하면 할수록 좋다.

“지금 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뒤숭숭한 상태지만, 앞으로 4일 안에 곧바로 평온-”

“…아렌?”

아렌은 순간 말을 멈췄다.

‘…평온해진다는 말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해도 되나?’

점괘에서의 언어는 원래 모호한 것이다.

황궁 안의 모든 우환이 끝나서 평온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라흐네의 죽음 끝에도 평온은 찾아온다.

‘…과연. 그런 건가.’

설령 아렌이 하는 말이 그대로 이뤄지게 된다 해도, 이 능력은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4일 동안은, 지금과 별다른 일 없을 거야.”

“4일 안에요? 정말요?”

사실은 ‘상황이 급변한다’는 점괘를 뱉고 싶었지만, 황제의 죽음이 걸려있는 일이다. 아무리 아렌이라도 그런 불경한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래서야, 말도 한마디 편하게 못하겠잖아?’

이런 일이 궁금할 때, 가장 적임자가 있었다.

‘…레밍을 만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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