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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23화 (123/227)

#123화

이제 아렌은 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미켈의 형 카슬 랜돌프가 한 말은 결국 마지막까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렌이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입을 꾹 다물었기에.

‘이쪽이 먼저 시작해? 이쪽이라니, 그건 도국을 말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봐! 고향으로 가니까 좋아? 뭘 그렇게 생각해?”

“필요한 수속은 모두 마쳤지만… 역시 아깝네요.”

굳이 거창하게 학교와 시청에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렌이 떠난다는 사실을 아는 건 감독생인 듀란 우피치와 세밀 메렌치 뿐.

카르도나 국제학교 밖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거물이, 고작 중퇴자를 마중나온 건 꽤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게 말이야. 네가 학교에 남았다면 앞으로 더 할 게 많았을 텐데.”

“학교에요? 학교는 제가 제안한 작전 때문에 잿더미가 되었잖아요?”

아렌의 물음에 대답한 건 듀란 우피치였다.

“배움이야 천막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도심이 수몰되기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장서들이 모두 불에 탄 건 아쉽지만, 사본이 남아있으니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듣기론 차기 감독생으로도 거론되는 것 같던데.”

“감독생? 제가요?”

“왜 그렇게 놀라? 레데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먼저 예견한 것도, 기책으로 레데의 전단을 모두 사로잡은 것도 모두 너였어. 그 정도 공로라면 감독생 자리는 오히려 부족할 정도 아냐?”

“됐어요. 어차피 전 도국에 뼈를 묻을 사람도 아니거든요? 감독생 지위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카르도나 시의 성문 앞에는, 이미 갈 준비를 끝낸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렌은 그쪽을 한번 힐끗 본 뒤 둘에게 말했다.

“그보다, 정 대가를 주고 싶다면 전에 말했던 것, 알죠?”

“서신 말야? 알았어. 메렌치 가문의 인장으로 단단히 밀봉하면 되지?”

비록 이곳에 온 원래 목적, 학위는 못 가져가지만 대신 메렌치 가와 우피치 가가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제반 정보들을 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엔 정보는 없다고 잡아뗐지만, 그녀들도 이제는 더이상 모르쇠로 일관할 순 없었다.

아렌의 점괘가 진짜라면 정보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렌과 척지지 않는 것이 자국에 유리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렌 뒤에 있는 레온나토스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아렌 자신의 역량만으로.

‘그러면, 이제 이곳에서의 볼일은 모두 끝난 건가?’

아렌은 속으로 반문했다. 사실은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아직 한 가지 남았어.’

줄곧 아렌의 마음에 걸린 사실이 있었다.

다른 점술가보다 조금 더 눈치를 잘 보는 것에 불과했던 첫번째 삶과 달리, 지금의 아렌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알고 있다.

원래라면 아렌의 점괘는, 마치 답안지를 놓고 푸는 문제처럼 쉬워야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렌이 그간 여러 사건에 직접 개입해왔고, 아렌이 원래 알던 역사와 지금은 꽤나 많이 달라진 것이다.

당장 도국에서의 전쟁만 해도, 아렌이 직접 개입할 일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도국 사이의 전쟁 따위 일어나지 않았어.’

하지만 전쟁은 일어났다.

앞으로의 역사는 아렌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이젠, 과거의 경험에 반추해 예언을 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리고 미리 알았던 미래가 바뀐 것을 벌충하기라도 하듯 아렌에겐 미래를 예지하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게 끝이 아닐지도.’

아렌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점괘는 그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 기억에 남는 것은, 수확제 동안 물에 관한 소동이 있을 거라는 점괘와, 미켈이 죽는다는 점괘.

둘 다 별 의미를 담지 않았고, 틀려도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변명일 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점괘를 통해 빗나갔다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두 점괘 다 절묘하게 이뤄졌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만…’

한 번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두 번 일어나는 일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세 번, 네 번이라면?’

아렌은 시험해보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여기 와서 허둥대기만 한 것 같네요.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것보다 딴짓한 기억이 더 많은 걸 보면.”

“…그 딴짓으로 도국 연합을 구했어. 알기나 해?”

“겸손이 지나치네요.”

아렌의 말에 세밀과 듀란이 어이없어했다.

아렌이 물었다.

“하지만 세밀, 결국 헬데움의 항구는 괴멸한 거죠? 다 고치는 데 오래 걸리나요?”

“물론 피해는 크지. 항구 시설과 정박한 선박까지 모두 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반년이면 복구될 거야. 바쁜 건 이제부터겠지.”

‘…반년이라.’

“혹시, 항구가 한 달 안에 복구된다면 그건 너무 무리일까요?”

“…한 달?!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도국에겐 헬데움을 추월할 절호의 기회이니 원조도 기대할 수 없어. 다른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4달이 한계야. 그것도 파괴된 선박 복구를 뒤로 미룬다면 말이지만.”

세밀은 아렌의 한 달을 부정했다.

정상적인 작업속도, 그리고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른 말이니 신빙성은 상당할 것이다.

“…제가 보기에, 그보다 훨씬 빠를 거에요. 어쩌면 한 달 안에 원래대로 복구될걸요?”

“…설마, 지금 그것도 점괘인 거야?”

“글쎄요.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두죠?”

아렌은 이번엔 듀란에게 말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도서관이 모두 타버린 것, 미안하게 생각해요. 책도 전부 타 버렸을 거고, 아끼던 장소였잖아요?”

“설마 제가 원망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물론 마음이 아프지만, 레데의 모든 전함과 맞바꾼 것이니 불평할 수는 없죠.”

“하지만 도서관 안에 가치 있는 책들도 많았을 텐데요?”

“…도시가 수몰되기 전부터 기록된 카르도나 실록 원본이 거기 있었어요. 워낙 방대한 양이라 미처 다 가지고 나오지 못했죠.”

“저런… 그래도 불에 타지 않고 무사할 가능성은 없나요?”

“무사하긴커녕 제대로 서 있는 벽조차 없, 기대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카르도나 본시에 사본은 남아있으니까.”

아렌은 듀란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걱정마세요. 아마 원본은 무사할 테니까.”

“…세밀에게 한 것과 같군요. 그것도 예언인가요?”

“글쎄, 어떨까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용하다 해도, 완전히 불에 타 무너진 도서관에서 실록만 무사하다는 건-”

듀란은 이미 실록 원본을 잃었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이 강인할수록, 지금 아렌이 시험하려는 것의 신빙성은 더 올라간다.

“만약 지금 제가 한 말이 정말이라면, 제국 황실로 서신이나 한 통 보내주시죠.”

아렌이 그들에게 한 말은, 그냥 나온 대로 주워섬긴 말.

정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그녀들조차도 절대 이뤄질 리 없다고 단언하는 일이 정말 이뤄진다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지.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니, 무슨 자각몽도 아니고.’

세밀과 듀란에게 한 말이 적중한대도, 아렌은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심증만 더 깊어질 뿐.

아렌은 타고 왔던 마차에 올라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요. 레온나토스 전하는 도국의 연락을 언제고 환영하실 테니까.”

“…카르도나가 약해진 틈을 타, 빚을 지워두겠다는 건가요?”

“레데와의 전쟁에선 이겼지만, 전쟁에 승리했다고 그 이후가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건 헬데움도 마찬가지죠. 세밀?”

“…….”

세밀은 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렌의 제안에 가장 손을 뻗고 싶은 건 헬데움 출신의 세밀일 것이다.

“조만간 다시 보겠죠. 그럼, 다음엔 좀 더 무탈할 때 만나죠.”

아렌을 실은 마차는 출발했다. 올 때와는 달리, 낮안개 기사단 다섯과 더글라스의 호위를 받으며.

얼마간 달렸을까.

공기에서 바다 특유의 짠 향조차 더이상 나지 않게 되었을 때쯤.

말을 몰고 마차 옆에 붙은 더글라스가 물었다.

“아까 그 두 아가씨들, 카르도나와 헬데움의 귀족이냐?”

“도국에 귀족은 없어요. 권세를 쥔 유력가문이라면 있지만.”

“…그 둘과 꽤나 친해진 것 같은데, 역시 마당발이란 말야?”

“마당발? 제가요?”

“가는 곳마다 엮이지 않는 사람이 없고,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한복판에 있지 않곤 못 배기잖아?”

‘…더글라스에겐 내가 저렇게 보였나?’

아렌의 초창기부터 알고 지냈고, 황궁 내 지위가 높아지고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더글라스가 하는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두 아가씨한테 한 말은 무슨 뜻이냐?”

“아아, 그거요?”

아렌은 담담하게 도국의 지금 상황을 말했다.

“도국 연합의 세 축이 있어요. 레데와 카르도나, 헬데움. 그 중 레데는 모든 전함을 잃었으니, 가졌던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죠.”

“그래.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이 승전한 도국 연합측, 특히 카르도나와 헬데움에 웃어주냐면 그건 아니에요.”

“승전했는데도?”

“헬데움은 항구와 선박까지 모두 잃었으니 당분간은 해군도, 무역도 복구할 수 없겠죠. 다른 도시보다 넉넉히 1년은 뒤처질 거에요. 그 상황은 다른 도시들에겐 꽤 반갑겠죠. 아예 헬데움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을 만큼.”

카르도나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반면, 카르도나 역시 자신들의 모든 전함을 버리는 작전을 썼죠. 하지만 그 후 레데 군이 항복하면서, 카르도나 연안엔 카르도나 군이 버린 함선과 투항한 레데의 함선이 대략 200여 척이나 남아있어요. 그 200척에 카르도나가 모두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레데의 뒤를 잇는 무시무시한 군사력이 탄생하게 되죠.”

“…주변국이 가만 놔두지 않겠군.”

“네. 도국 연합의 세 구심점 모두 제 역할을 못 하는 이상,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려는 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죠.”

카르도나와 헬데움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전까지 든든한 아군이었던 도국 연합들은, 이제는 자신들의 몰락만을 바라는 적일 뿐.

“그런 상황일수록, 헬데움과 카르도나에겐 외부의 강력한 후원자가 더욱 절실하겠죠.”

“…그러니, 레온 전하께 끈을 연결한 건가?”

“네. 레온나토스 전하는 도국 연합이 바라마지 않는, 전쟁을 원치 않는 온건한 황제가 되실 테니까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더글라스는 혀를 내둘렀다.

“…고작 일개 비서관 신분으로 여기까지 하는 사람은, 너 정도일 거다.”

“그보다, 이렇게 급히 부를 일이 뭐가 있죠? 카르도나 안에선 자세히 못 물어봤어요.”

“자세히 말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 안에서, 어디에 누가 무슨 말을 듣고 있을지 어떻게 알고.”

하지만 이곳은 카르도나 시의 외곽.

엿들을 사람은커녕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글라스는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황제폐하께서, 편찮으시다. 어쩌면 이대로 승하하실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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