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아렌이 뒤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온갖 장기가 지나가는 가슴 한복판을 관통당하고도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니까.
풀썩, 미켈은 성가퀴 아래에 쓰러졌다.
궁수들 몇몇이 미켈을 부축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틀렸어.’
아직은 미켈에게도 의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젠장. 마지막의 마지막에 당하다니.”
쿨럭거리며 말을 내뱉는 미켈.
한번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거품이 올라왔다.
병사들은 모두 대강의 응급처치 요령을 익히고 있지만, 그들도 미켈의 상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갔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내 최후는 분명 바다 위, 흔들리는 배 위에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대강 비슷하긴 한가?”
스스로도 자신이 마지막임을 예견하고 있어서일까. 미켈의 말에는 어딘가 자조적이었다.
“미켈.”
“아니면, 이것도 나고 자란 고향을 배신 한 벌인가?”
“…….”
“…아쉬워.”
“아쉽다니, 뭐가요?”
“네가 제국에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떤 식으로 위로 올라갈지. 내심 기대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미켈의 기력은 점점 더 사라진다.
하지만, 화살이 폐와 복막을 관통한 이상 어차피 죽음은 정해진 결과일 뿐이다.
아렌은 슬프지 않았다.
미켈과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고, 그리 깊은 친밀감을 쌓았다고도 볼 수 없다.
지금도 바다 위에선 아렌의 작전으로 수많은 레데 군인들이 불에 타죽고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켈 역시 하나의 생명일 뿐이었다.
그를 특별취급할 필요는 없다.
‘…원래라면, 그래야 하지만.’
“…그러고보니.”
미켈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네, 예언, 정말 들어맞았군.”
“…….”
“역시, 대단-”
-툭.
미켈의 고개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미켈이 죽은 것이다. 언젠가, 아렌이 했던 예언대로.
궁수들은 말없이 아직 온기가 남은 미켈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산발적으로 화살이 날아오고 있어, 계속 멈춰있는 건 위험했다.
아렌은 생각했다.
‘내 예언 때문이라고? -아니야.’
아렌의 점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이미 한번 살아본 삶에서 겪어본 적 있거나, 사전 조사로 조사해본 것을 말하는 점괘였다.
이 경우 들어맞는 것이 당연하고, 아렌의 명성을 올려준 점괘는 대부분 이 경우였다.
두 번째는 아렌이 알 리 없었던 내용이지만, 기이한 예감이나 환각 등으로 알게 된 점괘였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로, 아렌조차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점괘는 그럴듯한 말로 속이고 있을 뿐, 사실은 전혀 용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 세 번째가 아렌이 하는 점괘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미켈에게 말한 내용 역시 그저 상대의 반응을 보고 싶어 던졌을 뿐인 아무 말에 불과했다.
원래라면 들어맞을 리 없는 예언.
‘…그러니, 이게 들어맞은 건 단지 우연일 뿐이야. 내 점괘와는 상관 없어.’
곧 죽는다는 예언을 세밀 메렌치나 듀란 우피치에게 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게 평소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어쩐지, 지금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아렌이었다.
‘미래에 대한 환각도 최근에야 보이기 시작했지. 운명석은 계약한 사람에게 특별한 힘을 줘. 내 경우는, 과거로 되돌아왔지. 하지만 그게 내가 얻은 기연의 전부인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다 안 상황처럼, 아렌의 머릿속도 더 복잡해졌다.
*****
레데의 군함이 성벽 안쪽 바다에 성공적으로 갇힌 이후.
바다 용암에 휘말린 전함의 숫자는 40여 척이었다.
바다 용암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치고는 크지 않은 피해였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침몰한 배로 인해 성벽 너머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침몰한 선박 사이사이, 실낱같은 생로(生路)가 몇 군데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돌파를 시도하던 전함이 침몰하면서 다시 사로(死路)로 변했다.
카르도나의 병사들은 성벽 바깥에서 벽을 타고 올라가 안쪽 상황을 수시로 감시했다.
갇혔다는 무력감과 굶주림에 지친 레데의 전함에서 백기가 올라온 것은, 그들이 안에 갇힌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소식을 들은 인근의 도국에서도 원군을 보냈다.
안쪽에 고립되었던 레데 군은 4일 전 카르도나 군이 그랬던 것처럼 사다리를 타고 와 밖으로 이송됐다.
숫자가 조금 줄었다지만, 원래 200척이 넘었던 인원.
그들을 안전하게 수용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인근의 도시와 시골에 분산된 레데의 패잔병들.
그 중 일부가 카르도나의 빈 창고에 수용되었다.
성벽 안에서 거의 굶다시피 한 군인들은, 카르도나가 제공한 가장 기본적인 빵에도 게걸스레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카르도나 시장의 딸 듀란은 경멸과 측은함이 반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전쟁을 직접 겪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저게 전쟁의 모습이라면 도대체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는걸?”
듀란의 물음에 답한 건 여전히 카르도나에 군식구처럼 눌러 앉아있던 아렌이었다.
“그야, 저게 모든 전쟁의 모습은 아닐 테니까요.”
“아렌?”
“레데 군도 저런 미래를 생각하진 않았을 거에요. 직접 전쟁을 일으키고, 가장 괜찮은 경우의 수만 고려한 거겠죠. 전쟁은 승자에겐 제법 괜찮은 장사니까.”
“…장사? 이긴 쪽도 진 쪽도 재미없는 걸, 우린 장사라고 부르진 않아.”
상업으로 부흥한 도국 연합이니만큼 듀란은 전쟁을 장사로 비유하는 게 퍽 못마땅한 듯했다.
“하지만, 도국도 둘 모두 만족하는 장사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때로는 속이기도 하고, 상대의 약점을 잡기도 하면서 이득을 극대화하려 하지 않나요?”
“…그렇지. 넌 제국 출신이었지. 대확장 전쟁이 지금의 제국을 만들었으니까.”
“부정할 수 없는 제국의 역사죠. 물론,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
“만약 온건한 제국을 원한다면, 괜찮은 황태자 후보감이 있다는 말이에요.”
“…호전적인 제국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네가 섬기는 황자를 지원해라?”
“강요나 부탁은 아니에요. 제안일 뿐이죠.”
“…….”
아렌은 듀란을 혼자 둔 채 호위도 없이 레데 병사들 사이를 걸었다.
예민한 병사 몇몇은 아렌을 주시했지만, 대부분은 결코 진수성찬이라 말한 수 없는 질박한 식사에도 눈물을 흘리며 몰두했다.
그건, 어깨에 지휘관 휘장을 한 젊은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레데 군의 제독이었던 카슬 랜돌프도 병사들과 한데 섞여 식사 중이었다.
감자를 으깬 스프 빈 그릇에 빵을 닦아 먹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고, 아렌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누구인지는, 피차 알고 있다.
‘카슬 랜돌프. 랜돌프 가문의 장남. 미켈 랜돌프의 형.’
“…네가 아렌, 맞지? 제국 황자의 비서관이자, 그날 성벽 위에 있었던.”
“네. 맞습니다.”
“제국 놈이 지혜를 빌려줬다니. 학교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 떠벌리고 다녔던 것도 너였지?”
“…제가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영감이 보낸 서신에 다 적혀 있었으니까.”
‘…영감이라면, 집사 프리드먼.’
아렌을 죽이려 했던, 미켈 랜돌프의 집사였다.
“이번엔 이런 꼴로 된통 당했다만 다음엔 안 봐준다.”
카슬은 남은 국물이 없는 그릇을 빵으로 싹싹 긁으며 말했다.
“성벽에 있는 놈들에게 마지막까지 화살을 날려준 것도 우리 배였지. 갑판이 하도 흔들리는 통에, 내가 날린 화살 하나만 겨우 맞은 모양이지만.”
“…그렇군요.”
“그래, 그런데 미켈 그 자식은 어디 있지? 너희랑 같이 있는 거 맞아?”
“미켈은 죽었습니다.”
“…뭐라고?!”
“제가 말할 내용은 이게 다입니다. 그럼.”
“잠깐!”
물러가려는 아렌을, 카슬이 막아 세웠다.
“설마, 너희가 죽인 거냐? 미켈이 우리와 내통했다는 게 들통나서?!”
카슬은 미켈이 카르도나에 남은 채, 레데에 미리 위험을 알려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렌은 담담히 사실만을 말했다.
“아뇨. 미켈은 화살에 맞아 죽었어요.”
“…화살?”
“네. 미켈은 그날, 저와 같은 성벽 위에 있었죠.”
“…설마, 내가?”
카슬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렌 역시 더이상 카슬에게 해줄 말은 없었다.
처음부터 카슬에게 있는 용무는 이것 뿐이었으니까.
동생의 죽음을 형에게 알려준 이상, 그에게 볼일은 없었다.
돌아가려는 아렌을 미켈이 다시 붙잡았다.
“잠깐만. 미켈은, 어떤 녀석이었지?”
“당신이 형이잖아요? 안지 고작 며칠 되는 저보다는 당신이 더 잘 알텐데요.”
“그게, 모르겠어. 그 녀석에 대해선 정말이지 아무것도.”
카슬은 아렌에게 물었다.
“미켈은, 정말 레데를 배신했었나? 아니면 그것도 연기였나? 네가 본 그 녀석은 어떤 녀석이었지?”
“연기라, 미켈은 그런 걸 가장 못하는 사람 축에 속하죠.”
일평생 연기로만 살아온 아렌이기에 더욱 자신 있게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본 미켈은, 도국 연합과 레데, 둘 모두에 최선의 길을 선택했을 분이에요. 미켈은 설령 레데가 승리한다 해도, 그 끝에는 파국 뿐일거라 생각했죠. 레데가 패한다면 당분간은 암울하겠지만, 그게 차라리 도국 연합과 레데에게는 좋은 길이라 여겼어요.”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보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레데는 왜 모든 도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거죠? 이런 주먹구구식 작전이, 정말 성공할거라 생각한 거에요?”
“…….”
아렌의 말에 카슬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려도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렌이 그대로 돌아가려는 찰나.
“…웃기지 마라.”
“네?”
“시작은 네놈들이 먼저 한 것이지 않나.”
“…다른 도국이요?”
아렌이 재차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카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아렌. 제국에서 사람이 왔어.”
듀란이 데려온 사람은 황실의 근위기사 더글라스와, 낮안개 기사단 다섯 명이었다.
“…더글라스 경? 어째서 여기에?”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요 녀석아. 감히 전하께 그런 서신을 보내? 네가 아니었으면 큰 경을 쳤을 텐데.”
“서신이요? 거기 뭔가 실수라도 있었나요? 글자라도 틀렸나?”
“…내용은 이상 없었다. 충분히 예의 바른 어투였어. 문제는 그 내용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중에 말이나 잘 맞춰 달라’여서 그렇지.”
더글라스는 듀란이 듣는 데서도 말에 거침이 없었다.
“더글라스!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요!”
“뭘 새삼스럽게. 어차피 여기서도 내가 아는 것만큼 비슷하게 막 나갔겠지. 네가 막 나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더글라스는 아렌의 경호를 위해 급히 파견되었지만, 몸만 덜렁 온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황자 레온나토스가 친히 보내는 친서도 함께 있었다.
“황실의 사정이 급변했다. 이곳에서의 급한 일도 정리된 듯하니, 가능한 빨리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급한 일이요?”
아렌은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었지만, 더글라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니야.”
처음엔 가볍게 학위나 따려고 마음먹은 유학이었지만, 어쩌다보니 타국의 전쟁에까지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학위는 따지 못했고, 아직 운명석에 대한 정보도 구하지 못했지만. 여기까지인 듯했다.
‘이제, 돌아갈 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