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바다 위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불길은 뱀의 혀처럼 바다 위에서 날름거렸고, 그 혀에 닿은 배들은 다시는 그 불을 꺼트리지 못했다.
“전함! 전속 전진! 불길에 휘말리지 마라!”
레데군 자신들이 운용하는 병기이니만큼, 그 위험성을 모를 리 없다.
일제히 노를 저어 빠르게 지역을 벗어나는 전함들.
그러는 와중에도 카슬은 곧바로 성벽 위를 노려봤다.
“성벽 위에 궁수가 있다! 모두 쏴 죽여버려!”
갑판 위에서 성벽을 향해 화살을 쏘는 레데의 병사들.
하지만 배들은 지금도 불길을 피해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터라 화살 역시 중구난방으로 퍼져나갈 뿐이었다.
입구 근처에서 폭발에 휘말린 전함은 10여 척.
하지만 지금도 불길에 휘말린 투사함이 몇 척 더 있어, 바다 용암의 피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었다.
아렌은 성벽 아래 상황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도망치면 돼요!”
바다 위 굳건히 서 있는 성벽.
관리되지 않은 지 100여 년은 족히 넘었지만,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달리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직도 건재한 성가퀴와 수풀은 궁수들의 저격으로부터 지켜줬고, 이제 남은 건 바다 위로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길을 달려가는 것.
악에 받친 카슬은 배를 보내 기어이 아렌들을 잡으려 했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수십 개의 노가 젓는 배의 속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따라잡히는 것도 시간 문제.
하지만.
-펑!
두 번째 유폭은 먼젓번의 폭발보다 조금 더 컸다.
화염이 옮겨붙은 또 다른 투사함도 결국 진화하지 못했고, 바다 용암을 잔뜩 머금은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물을 끼얹으면 더 번져나가고, 모래를 뿌리면 유리로 만들어버리는 비전의 불꽃이 레데 자신들의 갑판 위에 떨어졌다.
지금껏 자신들만이 기르고 관리해온 흉폭한 맹수가, 주인들에게 이빨을 드리웠다.
“…입구가.”
섬을 원형으로 둘러싼 성벽의 입구는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되었다. 당분간은 저 앞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성벽 안쪽에 들어온 배의 입구는 곧 출구였다.
불길이 옮겨붙은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산 채로 구워지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 물이 끓는 소리가 주변 바다를 가득 메웠다.
그 참상을 멀리서 바라보던 병사가 외쳤다.
“침몰한다!”
선원이 미처 탈출할 새도 없이 불길에 휩싸인 배는, 기어이 불을 꺼트리지 못한 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 배가 몇 척이나 있었다.
성벽에 감싸인 주변 바다는, 과거 카르도나의 시가지였다 수몰된 곳.
안쪽의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았다. 거기에 전함까지 침몰하자. 입구 주변 앞바다는 순식간에 침몰선으로 이뤄진 암초 지대가 되었다.
설령 바다 용암이 완전히 가신 뒤에도 저 앞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레데의 군함들은, 성벽 안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그제야 함대의 제독 카슬 랜돌프는 후회했다.
“…입구를 스스로 막은 것도, 이쪽을 부추기기 위해서였나? 유서 깊은 학교도, 해군 전 병력조차도 단지 미끼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거기서 자신의 동생이 보냈던 전언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르도나 국제학교 앞바다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
“…미켈 놈의 경고가, 사실이었나?”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전장을 바라보며, 카슬은 그저 황망히 서 있을 뿐이었다.
******
화염에 갇힌 레데의 함대가 엉망이 되는 모습을 지켜본 카르도나의 궁수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만, 원래 자신의 고향 전함이 휘말리는 모습을 본 미켈은 꽤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아렌이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해요?”
“…아니.”
미켈은 부정했지만, 그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건 여전했다.
“레데의 행동은 모든 서해민들의 평화를 침탈하는 짓이었다. 내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아. 다만, 나와 같은 고향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배신했다는 건 입 맛이 쓰군.”
굳이 아렌에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로 성벽 안으로 들어온 군함 중에는 미켈의 기억에 있는 기함도 있었다.
랜돌프 가문의 기함이 왔다는 건, 배에 타고 있던 자들 중에는 형인 카슬이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직 기함은 건재하니 형도 무사하지만, 자신의 형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미켈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렌도 미켈의 생각을 대강 읽었다,
하지만 아렌이 언급해봤자 해결될 일도 아니니, 아렌은 언급을 피했다.
“…어쨌건, 작전은 생각보다도 더 잘 됐어요. 이제 안에 갇힌 배들은 성벽 너머로 나갈 수 없어요.”
성벽 안에 갇힌 배들은 레데의 전함 200여 척, 그리고 카르도나의 전병력 50여 척.
아군 전함을 제물 삼아 적 전함도 모두 성벽 안에 가둬놓은 상황이었다.
시기가 됐다고 판단한 아렌의 판단에 따라, 궁수들은 하늘을 향해 효시를 날려 보냈다.
피리처럼 높고 날카로운 효시 소리는,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도 카르도나의 전함에 똑똑히 들렸다.
여전히 100여 척의 레데 선발대와 지난한 추격전을 계속하고 있는 카르도나 전함에는 희소식이었다.
“성공했다!”
“입구를 막았어! 놈들은 이제 독에 갇힌 개구리 신세야!”
앞바다의 입구에 가라앉은 배를 전부 치우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몇 주는 족히 걸릴 것이다.
카르도나가 원군을 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설상가상 레데 군이 가진 보급이 없다.
남은 건, 통발에 갇힌 물고기를 보는 것처럼 각 도시의 원군을 불러들이는 것뿐.
비록 그 때문에 싸울 수 있는 전함 50여 척을 고스란히 레데에 제물로 주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전함이 아니라 전함에 타는 사람이다.
콰광!
우드득!
레데의 전함으로부터 도망가던 카르도나의 전함이, 일제히 한쪽 성벽에 달라붙었다. 뒤따르던 다른 함선들도 마찬가지. 50여 척의 전함은 서로 갑판이 맞닿을 정도로 뭉쳐서, 따로 가교 설치 없이도 뛰어서 배와 배 사이를 오갈 정도가 되었다.
그 정도로 밀착하면 배 자체의 무게로 인해 심한 손상을 입지만, 애초에 상관없었다.
전함에 탄 병사들은 애초부터 배를 버릴 생각이었으므로.
병사들은 갑판 사이를 뛰어넘어 성벽에 가장 근접한 전함을 향해 뛰어갔다.
성벽에 닿은 면을 기준으로 반원 형태로 뭉친 군함의 섬.
그리고, 배와 성벽이 닿은 지점에선 백 개가 넘는 사다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카르도 나의 모든 전력을 던져줄 각오를 한 작전이지만, 그것이 사람마저 모두 희생시킨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한 곳에 빽빽이 뭉친 카르도 나의 전함들.
이미 외곽에 붙은 배들은 텅텅 비어 있었고, 모든 군인들은 사다리에 붙어 성벽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줄사다리를 동원했음에도, 워낙 인원이 많아 모두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레데의 군함은 철수하는 카르도나 군을 막으려 했지만, 겹겹이 쌓인 배들이 문제였다.
이미 가장 외곽에 있는 배들은 텅 비어 있었고, 배와 배 사이를 연결해둔 밧줄도 끊어져서 배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배에 올라탄다고 해도 카르도나의 다른 군함에 옮겨탈 수도 없고, 오히려 레데의 전함이 접근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었다.
성벽에 오른 병사들은 곧바로 성벽의 반대편에 걸쳐진 사다리를 내려가 카르도나의 상선에 올라탔다.
사다리가 걸쳐진 구역으로 달려가는 아렌에게도 지금의 철수가 똑똑히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속도가 조금은 더뎠지만, 레데의 함선도 뚜렷한 접근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리한다면 한두 척 정도가 승선할 수도 있겠지만, 승선한 레데 군인들을 맞이할 건 군함 섬 위에 빼곡히 모인 50척 분량의 승무원들.
가장 먼저 승선한 레데 병사가 피해 볼 것이 확실하니, 누구도 섣불리 승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군함 섬 가장 앞, 성벽 아래에서 부하들의 탈출을 인도하던 카르도나 군함의 함장은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배를 버리는 건 원통하지만, 카르도나의 경제력이라면 이만한 전함이라도 몇 년 새 금방 복구할 수 있겠지.’
50척이나 되는 전함을 모조리 잃는 건 도국 중에서도 1, 2위 경제력을 다투는 카르도나에게도 큰 타격이지만, 어차피 전멸이 예정된 상황에서 역전의 미끼로 사용되는 것은 오히려 싼값이었다.
‘…이 제안을, 제국의 16살짜리 비서관이 냈다고?’
이런 방식의 작전은 도국 출신, 특히 카르도나의 사람이라면 절대 내지 못할 작전이었다.
멀쩡한 함대 50대를 모두 미끼로 헌납하는 작전을, 어느 누가 제안할 수 있을까.
‘역시, 타지인이라서… 아니, 타지인이라고 이런 작전을 세울 수 있는 건가?’
한 나라의 해군 전 병력을 단번에 소진시키는 작전을, 자신이라면 절대 제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작전이 실패한다면 제안자 본인에게도 책임의 화살이 돌아갈 테고,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영영 제국으로 못 돌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저만한 인재가 고작 황자의 비서관에, 아무렇지도 않게 타국으로 공부하러 왔다고?’
공부하기 위해 입학한 시기에, 우연히 전쟁이 일어나고,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카르도나를 돕게 되는 경우의 수를.
함장은 우연이라 믿지 않았다.
함장은 지금도 성벽 위에서 달리고 있을 젊은 인재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태를 예견하고 미리 사람을 파견해둔 건가? 카르도나에 미리 도착해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을? 이게 제국의 역량인가?’
지금은 아군이지만 만약 적으로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에, 함장은 얼굴을 굳혔다.
*****
혁혁한 전과를 이룬 성벽 위 100명의 궁수는, 이제 거의 사다리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펑!
퍼펑!
이러는 사이에도 바다 용암을 실은 투사함의 유폭은 연이어 일어났다.
투사함의 배 위에는 돛대만큼이나 거대한 투척기가 있는 만큼, 무거워서 속도가 느렸다.
불을 피하지 못한 투사함이 터져나가고, 불이 붙은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중 일부는 섬 한복판, 카르도나 국제 학교에까지 미쳤다.
“…이런, 결국은.”
불은 옹기종기 붙어선 학교 건물에 삽시간에 옮겨붙었고, 곧 학교 전체를 태우는 거대한 불이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의 중앙에 있는 도서관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수만 권의 책이 불타는 검은 연기가 마치 봉화처럼 올라갔다.
도서관의 옥상에 조성되어있는 정원도, 분명 최후를 맞이하겠지.
탑에 옮겨붙은 불.
‘…탑이 무너진다는 예언, 결국 맞았네?’
학교에 상주하던 인원은 간밤에 모두 철수했다. 학교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작전이니만큼 섬이 입을 피해도 미리 각오해 둔바. 상정 내 피해였다.
유폭의 여파로 바다는 조타가 힘들 만큼 출렁거렸고, 더욱 날뛰는 불꽃으로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다에서 살았던 미켈조차도 처음 보는 광경.
달리는 와중에도 미켓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군. 네가 만약 카르도나의 지휘관이었다면, 정말 역사에 기록되었을 거야.”
“그래요? 하지만 어차피 타국의 참견꾼 신세니, 역사에 남을 일은 없겠죠.”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는 아렌.
“…아렌 넌, 날 더러 레온나토스 아래에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레온나토스인지 뭔지는 별로 안 궁금해.”
하지만, 미켈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네가 뭘 할지, 그건 좀 궁금하긴 해.”
“그건 긍정적인 대답이라 생각해도 되요?”
“그럼, 물론-”
미켈이 말하려던 말하는 순간.
-퍽!
날카로운 화살촉이, 미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