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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20화 (120/227)

#120화

레데의 무적함대 제독 카슬 랜돌프는, 기함의 갑판 위에 서서 섬을 바다에서 빙 둘러싼 성벽을 노려봤다.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 사람들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카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안으로 돌격한다.”

“제독님!”

카슬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성벽 안쪽은 시야가 닿지 않아, 상황을 확실히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 저 안에 들어가는 건 경솔한 행동입니다!”

“…경솔한 행동이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럼 묻겠다. 지금 상황에서 경솔하지 않은 행동은 뭐지?”

카슬은 반문했다.

“성벽 밖에서 저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도시에서 원군을 보냈다면, 앉은 채 저들에게 합공당할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수의 전함으로 입구를 막은 채 본대가 다른 곳을 치는 것도 안된다. 괜히 병력을 나눠 협공당할 뿐이야.”

한 국가가 나머지 열여덟 국가를 상대로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그 근거는 그들 모두와 동시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있었다.

새로이 재편될 도국연합을 의식해 미온적인 대응의 도국도 있었고, 어느 도국도 굳이 무적함대와 먼저 싸워 무지막지한 손실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최대 걸림돌이 되는 헬데움과 카르도나, 그리고 몇몇 도국만 손보면 레데의 계획도 성공리에 끝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항상 시간.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럼, 카르도나의 전함 50척 이상을 처리하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중요한 건 각 도시의 병력이 한 곳에 합류하기 전에, 최대한 숫자를 줄여두는 것이니까. 저 함대를 처리하지 않고선 카르도나를 떠날 수 없어.”

“하지만! 저놈들이 멍청해서 자신해서 묫자리를 찾은 건 아닐 것 아닙니까! 저 성벽 안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짐작은 가능해.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수몰된 구 시가지의 면적이니 200척 전함이 모두 들어가도 될 만큼 충분히 넓지만, 자연히 배들 간의 간격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 불화살 투사에도 훨씬 취약해질 거고.”

불화살을 통한 바다 용암의 유폭은 카르도나의 전함이 줄곧 시도하는 것이었고, 레데 측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데의 투사함은 항상 화살이 닿지 않는 후방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벽 안으로, 투사함을 보내지 않겠다. 성벽 안에 들어가는 건 100척의 전투함. 나머지는 밖에서 입구를 봉쇄한다.”

“…결국, 병력을 나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다른 도시의 함대가 도착해있을 시간이 아니야. 성벽 안의 함대는 50대 정도겠지. 레데의 100척이면 별다른 변수 없이 승리할 수 있어.”

그리고, 투사함 없이 전투함만 동원되면 난전이 되어라도 불화살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바다 용암이 유폭되지 않는 이상, 정석적인 해전만으로도 카르도나 해군을 충분히 압살할 수 있을 테니.

“…네. 지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줄곧 반대하던 부관도 결국 카슬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르도나의 전함을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것과 전투함으로만 이뤄진 100척이라면, 오히려 유폭의 위험이 있는 200척보다 변수 없이 승리할 수 있을 터였다.

기함에서 보내진 수기신호가 각 함선에게 퍼져나갔고, 곧 100여 척의 배가 차례대로 성벽 안쪽으로 통과하기 시작했다.

만약 카르도나의 군함이 좁은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면 레데 군은 큰 피해를 보았겠지만, 카르도나 군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물러나 있었다.

마치, 적을 안쪽으로 유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레데의 전함이 성벽을 거의 지났을 때쯤, 카르도나의 전함도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접근한다!”

레데 군이 절반 정도 통과했을 때 접근했다면 꽤나 당황스러울 뻔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병력이 건넌 후라 대응하는 데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경우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카르도나 군은 왜, 레데 군이 모두 넘을 때까지 기다린 것인가.

레데 군의 100여 척의 전함이 일제히 늘어섰다.

비록 절반의 숫자에 투사함도 오지 않았지만, 이미 그 숫자만으로도 제대로 대응했을 때 카르도나 군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정도의 격차였다.

레데의 전함은 일제히 거리를 줄이기 위해 돌격했다. 카르도나 군은 노를 저어 거리를 벌리는 한편 불화살로 배들을 견제했다.

“놓치지 마라!”

“평화에 찌는 놈들에게 진짜 전쟁을 가르쳐줘라!”

레데의 전함은 속도를 더 높였다.

상대도 50척 이상의 적지 않은 숫자. 가장 선두에 선 전투함은 만만찮은 피해를 입겠지만, 죽음의 두려움조차도 압도적인 우세에서 오는 고양감을 상회하지는 못했다.

배와 배끼리 맞붙은 백병전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카르도나 군은 알고 있었다.

카르도나 군은 어디까지나 화살과 충각전만으로 레데군을 상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르도나의 불화살만으로 레데의 진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미 돛은 접어뒀고, 선체 역시 소금을 머금은 바닷물에 잔뜩 절여진 상태. 불화살의 열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어쩌다 갑판의 나무가 조금 그슬리더라도, 갑판원이 곧바로 물을 뿌렸다.

레데의 선원들이 외쳤다.

“물러서기만 하는 거냐! 평생 장사나 하던 겁쟁이 녀석들아!”

“…….”

물론, 카르도나의 전함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레데 군이 카르도나 군을 쫓아 섬의 외곽을 돌고 있을 때쯤, 섬 한편에 숨어있던 배 세 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르도나 해군 양식의 전함 세 척은, 상대적으로 한산한 바다를 통해 뚫려있는 성벽 부분으로 향했다.

그 모습은 후미에 있던 레데의 전함도 목격했다.

“뒤쪽에 카르도나의 전함 세 척! 성벽의 입구 부분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보고는 그게 끝이었다.

“그래서 뭐! 고작 세 척이야! 도망이라도 갈 수 있겠어?”

어차피 바깥의 입구도 아군이 지키고 있었다. 고작 세 척으로 100여 척이나 되는 전함을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한테 당하나 바깥에서 당하나, 물고기 밥이나 되는 건 똑같지!”

“평생 도망이나 치라 그래!”

그 모습을 본 레데 함대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

배 세 척이 성벽의 열린 부분으로 접근하는 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레데의 기함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카르도나의 배… 이탈자인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바깥의 바다는 별일 없이 한산했고, 고작 세 척의 배에 유난 떨 이유도 없었다.

카슬은 태연하게 말했다.

“입구를 넘는 즉시 나포한다. 선원들을 붙잡으면, 저놈들의 꿍꿍이라도 알 수 있겠지.”

도망친 세 척의 배도 바깥에 도열한 백여 척의 적함을 보면 저항 의지를 상실할 것이다.

안쪽의 상황은 바깥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절박했으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올 생각을 했을까.

카슬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입구를 너머 성벽 밖 바다로 나오기 직전이었던 카르도나 군함 세 척은, 일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 뭐야!”

그리고, 노를 움직여 제 자리에서 빙글 돈 군함은, 길쭉한 선체를 옆으로 나란히 눕혔다.

뚫려있던 성벽은, 가로로 누운 배 두 척에 의해 경로 대부분이 틀어막혔다.

“-닻을 내렸습니다!”

한 선원이 외쳤고, 선체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노들은 이미 버려져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배를 조종했던 최소한의 인원들은 입구를 막지 않은 나머지 한 배에 모두 옮겨타고 있었다.

“배로 입구를 막았다! 자침시켰어!”

카슬이 탄식했다.

배 두 척으로 막힌 항로.

입구를 막은 건 자신들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입구를 물리적으로 틀어막은 건 카르도나 군이었다.

‘불길하다!’

그들의 꿍꿍이가 대체 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전쟁에서 순순히 적군의 의도대로 해줘서 좋을 게 없다는 점이다.

카슬은 휘하의 전함에 외쳤다.

“우리도 안쪽 해역으로 진입한다! 달려들어 입구를 열어라! 어서!”

*****

성벽 위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던 미켈이 물었다.

“아렌. 이건,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릴 입구를 왜 굳이 막은 거지?”

바다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방치된 성벽은,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아직 군데군데 살아있는 성가퀴와 수풀에 가려 아렌과 미켈의 모습은 바다 위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미켈? 문어를 낚는 통발은 가능한 입구를 좁게 만든대요. 제아무리 문어라도 겨우 통과하게끔. 그 이유를 알겠어요?”

“…아니. 그 이유가 뭐지?”

“문어는 통발의 입구가 크면 들어오려 하지 않으니까요. 그 입구가 빠듯할수록 비로소 자신의 몸을 안으로 구겨 넣는다고 하더군요. 누구든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곳이면 오히려 꺼려지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만, 좁고 틀어막혀있어서 겨우 들어올 만한 곳이라면 자신이 직접 선택해 길을 개척한 것 같잖아요?”

“…방금 말, 도중부턴 문어 얘기가 아니었지?”

“아무튼 제 말은, 상대를 속이려면 우선 만족시켜주라는 거예요. 사실 그게 제 영업비결이죠.”

“영업비결이라면 점괘 이야기 맞냐?”

“네. 비밀이지만요. 비밀은 지켜주실 거죠?”

자침시켜 입구를 막은 두 함선.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레데의 전함.

후방에 남아있던 적 함대는, 입구를 막는 것이 카르도나 군의 작전이라 생각하고 자침시킨 배를 치워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이었다.

이미 안쪽에 들어온 카르도나와 레데의 전함은 섬을 중심으로 크게 돌며 거대한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좋아.’

아렌은 바다를 양분하듯 길게 뻗어있는 성벽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

배들은 입구를 막은 배를 치우는 데 열심이었다.

닻줄을 자르고, 밧줄을 다른 배에 연결해 직접 끌어내는 작업이 이어졌다.

겨우 입구에서 배를 치워낸 후, 카슬이 명령했다.

“안으로 진입해 한시라도 빨리 아군을 돕는다! 놈들은 입구를 막고 무언가를 하려 했다!”

한번 결론을 내린 뒤인지라, 카슬은 일체 다른 의견을 듣지 않았다.

곧이어 백여 척이나 되는 배들이 일렬로 천천히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입구 주변에는, 기습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섬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빙 둘러 가는 술래잡기 중인 레데와 카르도나의 전함이 보일 뿐.

성벽 안쪽으로 들어온 카슬이 말했다.

“우리는 섬을 왼쪽으로 돌아, 놈들을 포위한다! 일시에 포위해 단숨에 섬멸하는 거다!”

바다 한복판에 서 있는, 카르도나 국제학교에 대한 경계도 잊지 않았다.

“혹시나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니, 섬에는 접근하지 말도록!”

이미 선발대가 한번 지나간 길이라 진입은 아까보다 빨랐다.

최후방에 있었던, 바다 용암을 실은 투사함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최후의 투사함이 성벽을 마지막으로 지날 때쯤.

-쐐액!

일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불화살이 투사함 선체에 날아와 꽂혔다.

흔들리는 배 위가 아니라 성벽 위 단단한 발밑에서 쏘아진 화살은, 일제히 한 배를 조준해 날아갔다.

갑판 위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히는 투사함.

이미 갑판원이 불을 끄기도 역부족이었고, 그 갑판원조차 화살을 맞고 죽기 일쑤였다.

제아무리 불붙기 어려운 선체라 해도, 이만큼의 일제사격을 버틸 수는 없었다.

불은 서서히 거세어졌다.

“주변 함은 소화작업을 도와라! 최우선 사항이다!”

카슬이 뒤늦게 명령해봤지만, 주변 배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붉은 용암이 바다를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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