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레데의 사절이 카르도나 시청에 방문한 다음날.
레데의 무적함대는 천천히, 카르도나의 항구에 접근했다.
200여 척의 갤리선 중 특별히 조금 더 큰 기함의 함장은, 아직 젊은 청년이었다.
레데의 무적함대를 지휘하는 건 랜돌프 가문의 장남, 카슬 랜돌프였다.
“보이는 군선은 없나?”
카슬이 물었다. 망원경을 든 갑판원은 항구 앞바다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 확인된 군선은 없습니다.”
“…기묘할 정도로 한산하군. 정말 모든 배를 정박시킨 건가,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린 건가.”
“그만큼 본때를 보여줬는데, 설마 또 싸우려 들겠습니까?”
“카르도나는 도국 연합의 맹주 급이야. 썩어도 준치다. 경쟁상대라 인정한 헬데움이 쉬게 당한 만큼, 카르도나는 더욱 악착같이 방어하겠지.”
갑판원의 말대로 레데는 초전에 필요한 만큼 보여줬다.
항복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수순.
하지만 저들이 결사 항전까지 각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쪽도 가능한 상황이기에, 함대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며 천천히 항구로 접근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드디어 망원경을 든 갑판원의 시야가 항구 부둣가에 닿았다.
“…군선이, 없습니다!”
“항구가 완전히 비었습니다!”
항구 앞 바다는 레데의 선단으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는데, 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갑판원들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카슬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지. 카르도나는 운하의 도시니, 늦은 밤 야음을 틈타 침수된 시가지를 통해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건 곧 레데 측의 투항 조건을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뜻이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둔하군. 카르도나의 전함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다.”
카슬의 명령으로 작고 날랜 배들이 흩어져 카르도나 주변 바다를 꼼꼼히 살폈다.
정보는 금방 들어왔다.
카르도나의 군선은, 시 외곽에 있는 카르도나 국제학교 앞바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국제학교가 있는 섬 주변에는 구 시가지를 두르고 있던 성벽이 바다 위로 솟아있다.
섬의 부두로 향하는 곳만 성벽이 뚫려있어, 위에서 보면 마치 통발과도 같은 지형.
물론, 그 지형이 공격자에 유리할지, 방어자에 더 유리할지는 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카슬의 부관이 황당한 듯 말했다.
“…카르도나 국제 학교라고요? 항구를 지켜도 모자를 전함이 어째서 거기에?”
“글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지금 카르도나는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
방해할 상대 전함도 없으니, 투사함에 탑재된 바다 용암을 퍼부으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200척이나 되는 군함을 이끄는 제독으로서 꽤나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지만, 카슬은 고개를 저었다.
“…도시를 불태워봤자 소용없겠지. 앞바다를 지킬 군함을 빼돌렸다는 건, 이미 시민들과 자산도 이미 밖으로 빼돌렸을 테니. 시가지를 초토화시킨다 해도 카르도나의 진짜 자산은 인맥과 장부에 있어.”
설령 벽돌 하나 남기지 않고 도시를 파괴하더라도, 그 자산이 여전하다면 도시는 몇 년 만에 다시 재건될 것이다.
그리고, 카슬에겐 다른 걱정도 있었다.
“카르도나의 전함을 모두 파괴한다면, 도시를 한 손에 쥐고 주무를 수 있다. 도시의 처분을 걱정하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카슬의 명령으로 레데의 무적함대는 시 외곽의 외딴 섬, 카르도나 국제 학교로 향했다.
잠시후 보이는 바다 위 솟아오른 성벽.
수몰된 구 시가지의 성벽이 섬을 감싸고 있는, 카르도나 국제학교였다.
‘…오랜만이군.’
카슬은 잠깐 감회에 젖었다.
다른 유력가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제독 카슬 랜돌프 역시 국제학교 출신이었고, 그 구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다 위 솟아오른 성벽이 섬을 완전히 감싸고 있고, 바다로 이어진 곳은 부두 앞의 작은 부분뿐.
마치 들어온 물고기가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덫, 통발과도 같은 지형이었다.
‘어쩌자고 저 안에 들어간 거지? 입구를 막기만 하면, 저 안은 꼼짝 못하고 아사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물론, 카슬은 그 방법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슬은 조금 놀랐다.
‘…설마,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제독, 위험합니다.”
카슬이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장교 하나가 다가와 간언했다.
어제 카르도나 시장에게 통보했던 바로 그 사절이었다.
카슬은 사절을 돌아봤다.
“위험하다는 건, 어제 미켈 녀석이 말한 것 때문이냐?”
“네. 미켈 님께서 말씀하기로는, 학교 안으로 유인하는 건 분명 함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카슬이 갑자기 사절을 노려봤다.
사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게 직접 경고까지 해준 미켈은, 지금 어딨지?”
“네?”
“어째서 우리 배에 오는 대신, 언제 초토화될지 모르는 카르도나에 남았느냐는 말이다.”
카슬은, 자신의 동생 미켈을 믿지 않았다.
“녀석이 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쟁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적었는데도 본 척도 않고 말이다.”
집사 프리드먼이 관련 내용을 누락시켜 미켈에게 보여줬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카슬은 모른다.
“그 녀석은 어쩌면, 꽤나 예전부터 카르도나와 내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헬데움을 먼저 친 것도 그걸 걱정해서야. 카르도나가 이미 이쪽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았거든.”
결과적으로 카슬의 걱정은 기우였다.
카르도나도 나름대로 전쟁의 대비를 한 듯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정범위 내였고, 특히나 얼마 전 몰아친 태풍으로 도국들의 군함이 제 역량을 못낸 것 역시 주효했다.
해안선에 있는 도국들의 태풍 대비가 빈약한 것과 달리, 항상 강한 태풍이 일상인 레데는 태풍 방비가 어느 도국보다도 철저했으니까.
지난 태풍 역시 가장 거셀 때 레데 섬을 먼저 강타했지만, 가장 피해가 적었던 것 역시 레데 섬이었다.
“그런데, 카르도나 시내에서 미켈 놈이 갑자기 말을 걸더니 국제 학교 안에 들어가지 마라? 그건 함정이니 조심하라고? 오히려 수상하지 않나?”
“…하지만, 각하의 동생 분이십니다.”
“모르지. 어차피 레데의 차기 시장은 내가 될 거고, 미켈 녀석에게 순서가 돌아가는 건 한참 후에나 일일 테니 거기에 앙심을 품었는지도.”
카르도나의 군함 전대가 국제학교의 성벽 안으로 들어간 사실은 확인됐다.
하지만, 레데의 전단 입장에선 그들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시간이라도 끌고 싶은 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원군이라도 오는 건 아니겠지?”
시간이 없는 건 레데 측이었다.
200척이나 되는 대선단. 벌써 레데 본섬에서 출항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 뒤부터, 중간 기항 없이 줄곧 바다 위에서 지냈다. 당연히 보급도 없었다.
헬데움 앞바다를 불태운 후 곧바로 카르도나로 나섰으니, 200척의 배에 타고 있는 갑판원과 노잡이들의 식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보급선에 남아있는 식량은 3일 분량. 그 전에 어느 한 곳을 온전히 정복한 후 보급하지 않으면 전단의 사기는 곤두박질 친다.
그렇기에, 레데로서는 단시일 내에 도국 연합의 두 구심점을 동시에 없애야만 했다. 아무리 레데가 바다의 패자라 해도, 나머지 열여덟 도국과 상대하기엔 버겁다.
“하지만 제독님. 바다 위 성벽 대문에 안쪽의 사정을 파악하기 힘듭니다. 차라리 성벽 밖에서 안쪽으로 바다 용암을 퍼붓는 것이 안전하지 않습니까?”
“…아니. 레데에서 싣고 온 바다 용암은, 그 절반을 헬데움 앞바다에서 소진했다. 이번 카르도나 앞바다에서 다시 그 절반을 썼고. 바용암은 다른 해군과 레데의 해군을 질적으로 나누는 가장 큰 요소다. 되도록이면 모두 써버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부관은 답답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카르도나의 전함은 무력화해야 한다.
하지만 괜히 시간을 끌어 원군이 올 가능성을 주고 싶지는 않다.
밖에서 바다 용암을 투사하는 것도 힘들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성벽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안쪽까지 함대를 들이미는 것밖에 없다.
‘설마, 그딴 짓을 명령하지는 않겠죠’
부관은 초조하게 카슬 랜돌프의 명령을 기다렸다.
*****
아렌은 바다 위에 있었다.
앞과 뒤, 보이는 곳 전부 바다인 곳, 바다 너머에 아렌이 지내던 카르도나 국제학교 본섬이 자그맣게 보였다.
바다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흔들리는 배가 아니라 단단한 바닥 위에 있다는 건 제법 독특하고 새로운 기분이었다.
아렌은 국제학교 앞바다를 감시하는 병사와 연락하고 있는 미켈 랜돌프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은 어떻죠?”
“…지금 당장은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 망설이는 것 같은데.”
미켈은 자신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내가 한 말 때문이야. 괜한 짓을 시킨 것 아냐?”
미켈이 레데 측에 흘린 말은, 아렌이 요구한 것이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미켈이 흘린 말이 없었다면, 레데의 함대는 오히려 더 의심했을 테니까.”
한차례 전력을 잃은 함대가, 출구가 하나인 지형에 제 발로 들어간다.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평소라면 더욱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미켈이 먼저 언급한 것으로, 지금의 이상한 상황을 한 단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완전히 낯선 상황’에서 ‘미켈이 경고했던 상황’으로.
거기에 미켈에 대한 의심까지 겹치면, 레데의 함대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다시금 자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없고, 바다 용암은 아껴야 하며 카르도나의 함선은 되도록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륙 출신인 아렌이 적 함대의 사정을 대강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르도나의 갤리에 대략 300명이 타고 있다니, 레데의 함선도 비슷하겠지. 레데를 떠난 후 어딘가에 정박했다는 소식은 없었고. 싣고 다니는 보급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되도록이면 빠르고 온전하게 카르도나를 점령하고 싶을 거야.’
설령 카르도나를 점령하더라도 곡식창고가 전부 불타버린다면 레데의 함대는 바다 위에서 고사할 테니까.
“…하지만 아렌. 레데의 함대가 학교 안으로 바다 용암을 투사했을 땐 어쩔 생각이었지?”
“성벽 안쪽의 바다가 충분히 넓으니, 모든 구역이 불에 휩싸이진 않을 거예요. 게다가, 정말 비장의 무기라면 아껴두고 싶을 테고.”
아렌의 가정은 거칠었지만, 정말 레데의 함대가 바다 용암을 쓰지 않는 이상 억측이라 말할 수도 없다.
“…….”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미켈은 아렌을 그리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제국에서 온, 조금 재밌어 보이는 녀석이었을 뿐.
하지만 이제는 아렌이 어떤 사람인지, 근본적인 호기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검성 후보 가웨인이나 그에 준하는 기사 더글라스가 아니라, 아렌 때문에라도 제국으로 망명하고 싶을 정도로.
그때.
앞쪽에서부터 수기가 일제히 움직였다.
“…들어온 모양이네요.”
“정말로?!”
“조금 앞쪽에서 일어날 모양이에요. 보러 가보죠.”
아렌은 단단한 길 위를 달렸다.
마찬가지로 따라 달리며 미켈이 물었다.
“그런데 알네, 네가 여기 있어도 돼?”
“제가 왜요?”
“어차피 전투 지시를 할 것도 아니고, 싸움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잖아? 안전한 곳에서 보고나 받는 게…”
“확실히, 그게 더 안전하겠죠. 하지만.”
아렌은 카르도나 국제학교 주변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위를 달리면서 말했다.
“전 제 계획이 맞았는지 아닌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