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카르도나 시내의 중심부에 있는, 흰색 대리석 돔이 올라간 고풍스러운 건물, 카르도나 시청의 한 방에서 연신 고성이 오고 갔다.
“무슨 소리! 안될 일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력조차 헌납할 셈인가!”
“너무 사태를 쉽게 보는 것 아닌가, 듀란 양? 애초에 아무 대비도 없이 그런 곳에 거리낌 없이 들어갈 놈들이 아닐세.”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감독생, 듀란 우피치는 각 관료들을 돌아봤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일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듀란. 나 역시 그들의 말이 더 맞는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이미 열세인 상황에서, 너무 승산이 낮은 도박이야.”
“하지만 어머니. 확률이 낮은 도박일수록 불리한 시기에 시도해야 합니다.”
“…흐음.”
듀란의 말에 카르도나 시장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딸의 능력은 잘 알고 있고, 허튼 말에 현혹될 아이가 아님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제국 황실의 점술가 아렌이 한 점괘는 전부 다 적중했습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요.”
“방금 듣기로 아렌이 한 제안은, 점괘를 통해 얻어낸 게 아니라던데. 순전히 그의 고찰 아닌가?”
“…….”
“거기에, 외부인이 대충 주워섬긴 말에 레데의 핵심 전력을 내어주라는 말이냐?”
“물론, 사안의 중대함은 알고 있습니다. 전함은 단순한 전력이 아니라, 카르도나의 군인과 시민들이니까요.”
군함의 갑판에 탄 군인들 뿐 아니라, 갑판 아래서 노를 잡은 일꾼들 모두 카르도나의 시민들이었다.
배 한 척을 잃을수록 그들의 인적 손실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듀란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현상태를 유지한다고 카르도나에 탄 군인과 시민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인명 손실을 줄이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면 헬데움의 항구가 잿더미가 된 날 바로 항복했어야죠.”
“…그 말도 맞지.”
“어차피 레데가 카르도나를 함락시킨다면, 어떤 식으로든 해군은 해체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겠죠.”
“흐음. 그래서?”
“아까 말은 개괄이었고, 세부적인 계획도 있어요. 전부 들어보시고 판단하시면 될 일입니다.”
듀란은, 아렌과 국제학교 도서관 옥상에서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번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서도 자신은 없는지, 듀란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듀란의 말을 모두 들은 시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전부 이뤄진다면 쓸만하겠지. 하지만 어떤 작전도 그런 식으로 모두 맞춰지진 않는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확실히 ‘작전’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조악하죠. 하지만, 발안자는 제법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어요. 어쩐지 레데쪽에서 조급해하는 것 같다면서요.”
“레데 측이 조급해 해? 그 근거는?”
“그 근거는 없어요. 본인은 단순한 감이라고만 했으니까요.”
관료 몇몇의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장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제국 황자의 비서관, 아렌이라고 했지?”
5년 전 해가 사라지는 것을 예언한 이후, 자신의 주군을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 중 한 명으로 올린 유명한 인물이었다.
레온나토스가 차기 황제가 된다면 아렌 역시 국정 전반에 관여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
그저 흘려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네 이야기는 잘 알겠다. 듀란. 나머지는 조금 뒤에 하도록 하자꾸나.”
“…네.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듀란은 고개를 숙이고 시장실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시장은 별로 달라질 것 없음에도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 레데의 사자가 도착할 시간이었으니까.
*****
레데의 전단은 여전히 카르도나 앞바다를 포위한 채 늘어서 있었다.
그중 작은 배 한척이 카르도나 시청 앞까지 도착했다.
레데의 전단에서 보낸, 카르도나와의 회담을 위한 사자가 탄 배였다.
먼젓번의 전투에서 힘의 차이만 역력히 깨달은 카르도나로서도 레데의 사자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직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레데 측이 내건 협상의 조건은 가혹했다.
“…카르도나 전함의 절반을 양도하고, 레데에 무조건적인 협력을 맹세하라고?”
“그렇습니다, 시장님.”
“사실상 복종의 맹세를 명령하는 건가?”
“그렇게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사자는 혼자 있었지만, 조금도 기죽은 기색은 없었다.
“지금까지 레데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도국 연합의 방파제 역을 자처했습니다. 그 희생에 힘입어 도국 연합은 서부 해안에서 번영해올 수 있었죠. 하지만, 레데의 호의와 희생을 다른 도국들은 외면해오기만 했습니다.”
레데가 그동안 해안선 곳곳에 자리잡은 해적들을 소탕해온 것도 엄연한 사실.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제국의 대대적인 원정에서도, 바다로부터의 침공만큼은 레데의 해군력만으로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바다를 인접하지 않은 제국의 해군력은 애초에 그리 가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레데가 도국 연합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다른 도국, 특히 카르도나와 헬데움은 자신의 부만을 신경 쓰며 격차를 벌려 갔습니다. 지금의 번영에는 궂은일을 도맡아 한 레데의 희생이 밑바탕에 있는데 말입니다.”
카르도나 시장은 실소했다.
“그래서, 그대 말은 지금껏 우리를 지켜주던 칼로, 이제는 목을 베겠다? 정녕 그렇게 말한 게 맞나?”
“그렇게 말 하셔도 하는 수 없습니다. 이건 단지, 레데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함일 뿐이니까요.”
“…레데가 종전 이후 원하는 대가를 물어도 되겠나?”
“전 도국의 레데에 대한 존중, 그리고 서해의 치안을 보장하는 것에 대한 상응의 대가입니다.”
“상응의 대가라니, 그건 보호세를 뜻하는 건가? 마치 건달이나 마찬가지군.”
시장의 비아냥에도 사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협상의 칼자루를 쥔 것이 레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표정이었다.
“불필요한 말이 길군요. 카르도나 측에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기는 한 겁니까?”
“…그건.”
“이전의 전투로 인해 카르도나의 구 시가지가 불가피한 피해를 입었죠. 사실, 불길은 훨씬 안쪽인 중심지까지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건, 순전히 레데의 호의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사절은 시장의 대답을 한동안 기다렸다.
“그 대답을 지금 당장 드릴 순 없겠군요. 저도 시민들의 뜻을 들어야 하니까요.”
“그러시겠죠. 내일, 같은 시간에 레데의 함대가 카르도나의 항구로 들어올 겁니다. 그때 모든 군선이 정박해있다면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때, 단 한 척이라도 배가 밖으로 나와 있다면, 그때는 카르도나 시 전역이 불길에 휩싸이는 때일 겁니다.”
사절의 마지막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무서운 점은, 그 협박이 허언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사절이 시장실을 나간 후, 다른 관료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절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반추해보는 건 시장뿐이었다.
“…확실히, 조급함이 느껴져.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말이야.”
그리고, 조급함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조차도 유발하기도 한다.
“내일 새벽까지, 듀란이 말한 내용을 철저히 검토해보자고.”
한편, 레데의 사자는 카르도나 시청을 빠져나왔다.
주변 호위는 없었지만,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해군의 사자를 겁박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산해진 시내 한복판을 지나, 물길에 정박시켜 둔 배로 향하던 그때.
“…이봐, 나를 아나?”
누군가 레데의 사자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본 사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미켈 도련님 아니십니까!”
“역시. 낯이 익군. 어디서 봤었던 것 같더니.”
“제가 매년 생일마다-, 아니 그보다 왜 아직 여기 계신 겁니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곳은 위험합니다! 빨리-”
“위험은 각오한 바다. 그보다 네게 알려줄 것이 있다.”
“…알려 줄 것이라니요?”
미켈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핀 후 목소리를 낮췄다.
“…내일, 카르도나 해군은 레데의 함대를 카르도나 국제학교 안으로 유인하려 할 것이다.”
“네?”
“그때, 학원 안으로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 그건 함정이야.”
미켈의 말에 사절의 눈이 커졌다.
*****
세 명의 감독생과 아렌은 카르도나 시내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시청에 대표로 들르기로 한 듀란 외의 나머지는 한산해진 카르도나 시내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오늘 레데의 사절이 와 최후통첩을 한 만큼 내일까지는 전투가 없을 테지만, 그 사실을 일반 시민이 알 방법은 없다.
몸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피했고, 카르도나를 떠날 수 없는 자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카르도나 시내는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운하를 가득 메우던 곤돌라도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세밀과 아렌은 영업하지 않는 커피숍의 자리에 앉아 듀란과 미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죽을 거라 생각해본 적은 있어?”
“음, 몇 번이나 있었는데요?”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말이야? 제국 황실은 다 그런 건가?”
“아뇨. 아마 제가 특이한 경우긴 할 거에요. 어째 가는 곳마다 사건에 휘말리거든요.”
“역시, 네가 문제였다거나?!”
잡담으로 시간을 죽이던 때, 듀란이 도착했다.
세밀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라? 미켈은?”
“미켈이요?”
“만나지 않았어? 걱정된다고 시청으로 향했는데?”
“…못 만났는데요?”
세밀과 듀란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역시, 미켈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거 맞아? 아무리 조국에 환멸했다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그렇게 간단히 배신한다고?”
미켈을 변호하는 역할은 자연스레 아렌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번 전쟁과 완전히 무관한 건 사실이에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미켈은 집사를 통해야만 하는 서신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거야 사실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말만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카르도나 측에 남아 몰래 밀정 역할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세밀의 반대는 완강했다.
그리고, 세밀 만큼은 아니지만 듀란도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세밀 메렌치 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어느 정도는 동감해요. 그의 역할이 크지 않고, 불안함이 남아 있는 이상 경계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봐요.”
둘의 말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둘의 말은 알겠지만, 걱정할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단언하지?”
“왜냐하면, 그게 내 특기니까.”
미켈이 도서관 옥상에 모습을 보인 후, 아렌은 몇 번이나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에서, 망설임이나 배신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한 건 말 못 하지만, 제가 보증하죠.”
“…일단은 넘어가겠어. 하지만 정말 미켈 그 자식이 배신했다면?”
조금 생각해 본 아렌은 그럴리 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는, 제 특기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거겠죠.”
아렌의 말을 세밀과 듀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 미안. 듀란과 길이 엇갈린 모양이야.”
그리고, 골목 너머에서 미켈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셋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