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미켈 랜돌프는 아렌의 말을 짐작조차 못한 듯 눈을 끔뻑였다.
“…제국으로의 망명? 내가?”
“네. 레온나토스 전하라면 당신을 얼마든지 환영할 겁니다. 도국의 사정에 밝은 우수한 인재이니, 마다할 리 없죠.”
“하지만, 그건-”
“잠깐만. 영업이라면 다음에 하지?”
미켈의 대답을 세밀이 막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왜 레데의 다음 목표가 카르도나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것부터 설명해.”
세밀과 듀란은 처음엔 미켈의 말을 막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미켈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각 도시의 세 유력가문이 한 자리에 모였군.’
더군다나 셋 모두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감독생이라는 신분은, 학교 밖에서조차도 그 영향력이 작지 않다.
셋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면 카르도나의 시장까지는 무리라도, 부시장에 준하는 권위 정도는 넉넉하게 나왔으니까.
미켈이 말했다.
“레데가 카르도나를 노리는 이유? 그거야, 헬데움과 카르도나만 쓰러뜨리면 도국 연합은 와해될 테니까.”
미켈은 단언했다.
“그건, 너무 과신하는 것 아냐?”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
“알고 있겠지만 도시국가 레데가 가진 건 역청이 흐르는 척박한 땅과 막강한 무적함대, 그리고 극비리에 전수되는 바다 용암의 제조법뿐이야.”
카르도나와 헬데움, 레데는 열아홉의 도시국가 연합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었다.
하지만 서부 해안의 온갖 부가 모여드는 카르도나와 헬데움과 달리, 레데는 땅이 비옥하지도, 상업이 발달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높고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서해 한복판에서, 압도적인 해군력을 갖춘 채 서부해안을 노려보고 있을 뿐.
그렇기에 레데는 언제나 도국 연합의 다른 두 맹주를 의식하고 있었다.
유사시 도국 연합의 유일한 맹주가 되려면,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순리인지를 말이다.
“…그래서? 병력 우위를 갖춘 채 두 맹주를 먼저 타격하면, 다른 도국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너무 사태를 만만하게 보는 것 아냐?”
“아니. 내 말은 정 반대야.”
“…뭐?”
미켈은 설명했다.
“헬데움과 카르도나가 당하면, 다른 도국들도 움직일 거야. 하지만 그건 헬데움, 카르도나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겠지. 서부해안엔 헬데움과 카르도나에 밀려, 맹주가 되지 못한 도시가 몇 개나 있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도시에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겠지.”
“…헬데움과 카르도나가 무너진 틈을 노린다고? 전후 새로 개편되는 패권을 위해서?”
“그리고, 분열되어 이제야 막 모여든 함대론 레데의 무적함대를 막아낼 수 없어. 충분히 모이지 않은 숫자로 두 번만 싸워도, 레데의 전단은 서부 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가져오게 되지.”
지금껏 미켈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듀란이 문득 말했다.
“그 말, 믿어보겠어요.”
“…듀란.”
“제가 전해 받은 보고서의 내용과 그리 다른 것 같지도 않고요.”
“하긴, 그래.”
세밀 메렌치도 가세했다.
“말의 출처가 다름 아닌 랜돌프 가문의 둘째 아들이니, 이보다 더 믿을만할 순 없지.”
듀란은 카르도나 시장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하고, 세밀은 각 도시에 퍼진 밀정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전서국으로 향했다.
아렌과 미켈은, 도서관의 외벽을 따라 늘어선 원형 계단을 한참 말없이 내려왔다.
둘이 중간쯤 내려왔을 무렵, 미켈이 물었다.
“아렌. 나더러 제국에 오라는 말, 진심이냐?”
“뭐야,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제안이라 좀 신기하긴 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면, 지금부터 해보면 되겠네요. 물론 도국 어딘가에 있어도 괜찮은 곳이 있다면 그곳을 택해도 되겠지만.”
미켈 랜돌프가 정말 레온나토스 진영에 합류한다면, 그건 황자로서도 꽤나 큰 전력이 된다.
대륙 굴지의 학교에서 감독생으로 뽑힐 정도면 우수한 것은 기본이고, 도국 연합의 속사정에 해박한 고위급 인물이니만큼 선전하기도 써먹기도 좋다.
멋대로 한 제안이지만 레오나토스가 거절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아, 그렇지. 가웨인 전하와도 대련해볼 수 있겠네요. 전에 그런 말을 했었죠? 그 실력이 가짜일 거라던 말, 시험해볼 수 있겠네요.”
“…아니, 그때는 그냥 센 척을-, 잠깐만. 가웨인이라면 네가 섬기는 황자는 아니지 않나?”
“네. 제가 섬기는 분은 레온나토스로-”
“심지어 직접 섬기는 황자도 아닌데, 무엄하게 ‘부탁’을 한다고?”
그 반응에 아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부탁을 하지 다른 걸 하나요?”
“뭐?”
“네?”
둘은 서로의 반응을 이해 못 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렌에게 가웨인은 성가신 상대이긴 하지만, 결코 불편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황자임에도 거리낌 없이 말 걸고 제안할 수 있는 사이였다.
아렌은 쐐기를 박았다.
“가웨인 전하께서 응하지 않아도, 가웨인 전하와 호각으로 싸우는 기사와는 언제든 대련할 수 있어요. 저와 같은 레온나토스 전하의 가신이니까.”
“그런 사람이 있나?!”
아렌의 말에 흥분하던 미켈은, 순간 쓰게 웃었다.
“…네 제안은 고민해보지. 물론 이번 전쟁에서 내가 죽지 않았을 때의 말이지만.”
“점괘는 그게 일어났다고 끝이 아니에요. 점괘는 때로 빗나가기도 하니까. 특히, 이번 점괘는 어쩐지 빗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애초에 미켈이 죽는다는 점괘는, 신통력이나 정보 없이 말한 것이니 빗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산해진 도서관 내부.
1층에 도달한 미켈은, 아렌을 물그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아렌 네 말이, 사실이면 좋겠군.”
*****
레데의 침공 소식이 전해진 후, 카르도나 국제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갔고, 학교에 남은 건 대부분 별일 없으리라고 믿거나 갈 데 없는 몇몇 사람들 뿐.
며칠 새 유령 학원처럼 한산해진 학교의 도서관 옥상에서, 아렌은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정원수 꼭대기에 올라가 수평선을 살폈다.
나무 아래에서 세밀 메렌치가 물었다.
“어때, 보여?”
“…네, 보여요.”
수평선 너머. 바다를 가득 메우다시피 한 전함의 무리는,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리게 했다.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배를 세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어림잡아 족히 200척은 넘어 보이는 대군단이었다.
“카르도나의 전함 숫자가 얼마라고 했죠?”
아렌이 나무 아래에 물었고, 앉아있던 듀란이 나지막하게 답했다.
“…대략 50척 정도 돼요.”
그 말을 부연한 건 세밀 메렌치.
“저건 대외적으로 하는 말이고, 사실은 70척 정도 돼.”
“…….”
듀란은 눈을 흘겼지만, 세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쨌건, 정면으론 승산이 없다는 거네요. 다른 곳에 보낸 요청은 어떻게 됐죠?”
“…인접국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카르도나와 인접한 두 도국, 소데인과 에이프는 카르도나 앞바다로의 파병을 거부했다.
자신의 앞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이지만, 실상은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 뒤늦게 편을 정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어차피 세 도국이 연합해도 레데의 전단의 절반 수준이니 역부족이라 판단한 거겠죠.”
“어차피 지금 힘을 모아 승부하지 않으면, 그 뒤는 각개격파 당할 뿐인데. 멍청한…”
학교에서 가장 높은 건물, 거기에서도 높은 나무 위에 올라온 아렌은 아래로 풀쩍 뛰어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여기선 바다 용암을 쓰기엔 부담스러울 거예요.”
“…그건 어째서?”
“왜냐면, 카르도나의 시가지는 모두 침수되어있으니까. 이곳의 바다에서 바다 용암을 썼다간, 항구 앞 바다에 그치지 않고 불길이 시가지도 몽땅 태워버릴 거에요.”
“그 말은, 바다 용암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뜻 아냐?”
“그만큼 카르도나 시민의 적대감도 같이 사겠죠. 잠긴 건물들로 해류가 복잡해져, 자신들의 배에도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건 덤이고요.”
먼저 전쟁을 일으킨 건 레데 쪽이지만, 그게 미치광이 전쟁광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전후의 통치를 생각하면, 레데로서는 도국의 군사력만 정밀타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아렌. 넌 바다 위에 붙은 불을 봤다고 했잖아?”
세밀의 지적대로였다.
아렌은 생각했다.
‘그렇지. 상식대로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정말 카르도나의 앞바다가 불탄다면, 아렌의 환영이 미래를 예견한다는 ‘추측’은 한층 더 사실에 다가간다.
아렌은 말했다.
“…전장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죠.”
카르도나의 앞바다에 300석에 육박하는 배들이 정렬했다.
레데의 갤리선 200대와 카르도나의 갤리선 70대.
태풍의 영향으로 일부분 손상이 있었지만, 헬데움의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도나 안의 모든 장인이 총동원되어 겨우 복구한 선단이었다.
비록 카르도나의 전함이 레데의 전함보다 더 크고 날렵했지만 저만큼 압도적인 숫자를 줄일만한 차이는 아니었다.
‘카르도나는. 방어에만 주력할 거야. 레데의 전함이 접근하는 걸 최대한 막아볼 셈이겠지.’
카르도나의 전함이 준비한 건, 배의 갑판에 빼곡히 도열한 궁수였다.
궁수는 레데의 전함이 접근할 때마다 불화살을 날려댔다.
비록 나무로 된 함선이라도, 불화살의 화력만으로는 선체에 불이 붙지 않는다.
레데의 무적함대가 보통의 함대였다면 불화살을 무릅쓰고 접근할만했다.
하지만, 레데의 함대는 불화살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는 걸 신경질적으로 꺼려하는 모양새였다.
“…아. 선체에 있는 바다 용암에 옮겨붙으면 안 되니까.”
접근을 막는 카르도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배를 넓게 펼치는 레데.
대치 상태는, 한동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일렬로 도열해있는 레데의 전함 사이에, 돛대 같은 커다란 투사기가 달린 전함이 선회했다.
실수로라도 불화살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난 투사함에 실린 건, 하얀색 칠이 된 나무통.
곧이어, 레데의 전단에서 수십 개씩이나 되는 나무통이 카르도나 전단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몇몇은 군함에 맞으며 검고 찐득한 액체를 사방으로 뿌렸고, 혹은 부서지지 않은 채 바다에 추락해 둥둥 떠 있기도 했다.
‘-설마!’
카르도나의 전단은 사태를 파악하고 뒤늦게 후퇴했다.
하지만 선회한 배의 속도보다 불화살의 속도가 수십 배는 더 빠르다.
이번에 불화살을 쏘아보낸 건 레데 측.
불화살은 바다 위 과녁처럼 둥 둥 떠 있는 나무통, 혹은 깨진 나무통에서 새어 나온 기름띠 위에 떨어졌다.
펑! 펑! 퍼펑!
붉은 섬광과 함께, 나무통은 삽시간에 터져나갔다. 비산한 검은 기름띠는 또 다른 나무통에 옮겨붙었고, 바다 위 불꽃은 점점 기세를 늘려갔다.
카르도나의 전함 대부분은 가까스로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전방에 있었던 전함 10여 척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불길 속에 갇힌 전함들은 마치 다리 한쪽이 뜯긴 소금쟁이처럼 노를 사방으로 움직여대며 물 위를 불규칙적으로 표류했다.
끈끈한 기름띠가 선체에 엉겨 붙어 완전히 불태우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
“…….”
정보로만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것은 세밀이나 듀란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정해진 카르도나의 패전에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침묵을 꺠듯 아렌이 억지로 말했다.
“…배 안에, 몇 명이 타고 있었죠?”
-화르륵!
또 하나의 배가 전소되는 것을 보면서, 듀란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배마다 다르지만, 노잡이까지 계산하면 300명이요.”
“…….”
또 하나의 배가 불에 완전히 휩싸였고, 엉겨 붙은 불은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렌의 예측대로 바다 위의 기름띠는 카르도나 시가지를 향해 번져갔다.
“아, 안돼…”
세밀의 탄식이 무색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카르도나의 건물들이 속속 불길에 휩싸였다.
‘…점괘대로 됐군.’
아렌이 본 환각대로, 카르도나 앞바다가 불타는 것을 보는 아렌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카르도나 시가지를 불태워봤자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아. 도시에 애착이 넘치는 카르도나인들은 절대 항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떠오르는 이유는 하나.
‘전쟁을, 조급해하나?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리고, 조급하면 평소 하지 않을 실수를 하기도 한다.
‘…잠깐만. 환영이 진짜 일어난다면 여기 도서관도 무너진다는 건데.’
카르도나 국제학교에 전략적 가치 따윈 없다.
하지만 본 환영은 진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아렌은 고민했다.
‘…레데의 전함을 불화살 사정거리 안으로 좁히기만 한다면?’
“…세밀, 듀란.”
아렌은 두 감독생에게 동시에 물었다.
“카르도나의 남은 전함으로, 레데의 전단을 유인할 수 있어요?”
“…가능은 할 거에요. 제안은 시장님을 거쳐, 다시 사령관에게 전달돼야 하겠지만.”
“그런데, 어디로 유인해야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숫자도 가지고 있는 무기도 상대가 안 되는데.”
세밀의 물음에, 아렌은 발밑을 툭툭 쳤다.
“…응? 발밑? 바닥?”
“여기예요.”
“응?”
‘잘 하면 통할지도 몰라!’
한 번도 시험해본 적 없고, 생각대로 굴러갈지도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승산 높은 방법은 맞았다.
아렌이 말했다.
“레데의 무적 전단을 유인할 곳은, 여기 카르도나 국제학교 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