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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16화 (116/227)

#116화

브륀할트력 549년, 혹은 도국 연합이 사용하는 태양력 903년 9월 4일, 도시 국가 레데의 함대가 헬데움의 항구를 공격했다.

항구 앞 바다는 삽시간에 불타올랐고, 정박되어있던 배는 대부분 괴멸적인 손실을 입었다.

“휘발하는 지식의 도시, 헬데움 아니었어요? 어떻게 바로 앞까지 온 함대를 모를 수 있죠?”

“…….”

아렌의 질문에는 세밀도 할 말이 없었다.

“…헬데움도 얼마 전 몰아친 태풍의 영향권 안이었어. 적지 않은 배가 움직일 수 없었고. 바다 밖의 소식에 평소보다 둔감해진 건 사실이었어.”

그럼에도, 세상 모든 정보를 다스린다는 헬데움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갑작스러운 레데의 기습 소식은, 학교 안 학생들을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초조해진 학생들은 저마다 짐을 싸거나 본국으로 연락을 보내는 등 자기 할 일에 바빴고, 드디어 다른 이들의 관심을 벗어던지게 된 아렌은 한결 가벼운 태도로 기숙사 복도를 지나갔다.

그 뒤를 감독생 세밀 메렌치가 따랐다.

“그런데, 어떻게 항구 앞 바다를 불태울 수 있죠? 보통 기름에 불을 붙여도 금방 꺼질 텐데.”

“레데에선 바다 용암이라 불러. 레데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병기의 이름이지.”

도국 레데가 자리한 레데 섬의 내륙에선 곳곳에서 역청 샘이 샘솟았다.

검고 찐득한 역청은 불에 잘 탔지만 짙고 유독한 연기를 동반했고, 땅에 스며들면 농사조차 힘들어 레데를 더욱 척박하게 했다.

하지만 레데의 역청에 오래 타는 여러 물질을 특정한 배합으로 섞으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불, 바다 용암의 완성이었다.

“바다 용암? 왜 그런 이름이 붙었죠?”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하지만, 바다에 떠 있는 검은 기름 위에 작고 은은한 불이 천천히 번져나가는 모습이 용암처럼 보였다나 봐.”

가죽이나 천 등 특별한 재료를 제외하면, 모든 배는 나무로 만든다.

불이 붙은 기름띠가 나무로 만든 배의 선체에 엉겨 붙는다면, 불을 끌 시도조차 못 한 채 타오르고 말겠지.

물을 끼얹어도 불은 물 위에 탄 채 주변으로 더욱 번져갈 뿐이다.

한 도시 국가의 해군이 단번에 괴멸된 위력에, 아렌은 기이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지금 레데의 전단은 어디에 있죠?”

“그건, 아무도 몰라.”

“어째서죠?”

“헬데움 앞바다는 지금도 불타고 있을 거야! 부두나 항만시설도 전부 못쓰게 됐고, 띄울 배도 없다고! 제아무리 헬데움의 밀정이라도 선단을 감시하기 위해 불바다를 헤엄칠 순 없단 말야!”

정보에 관해선 자신만만했던 세밀 메렌치였던 만큼 지금의 추태는 견디기 힘든 듯했다.

아렌과 세밀은 기숙사를 나와, 그대로 국제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정숙해야 하는 곳이지만, 소란은 이곳에도 여전했다.

아렌은 그대로 경사로를 올라 옥상으로 향했다.

“…여긴-”

“같은 감독생이니까, 여기도 몇 번 와봤죠?”

도서관의 옥상. 정원은 여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내부는 깨진 유리 조각만 조금 치운 것 말고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유리 천장과 벽이 깨진 방 안에, 듀란 우피치는 앉아 있었다.

“…듀란 우피치?”

“세밀 메렌치, 인가요?”

둘은, 심지어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인 듯했다. 그 정도로 앙숙일 줄은, 아렌도 몰랐다.

“세밀,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당장이라도 본국에 돌아가야 할 텐데요.”

“어차피, 지금 헬데움으로 돌아가봤자 할 수 있는 건 없거든?”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있고요?”

헬데움의 해군 전력은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을뿐더러, 사방에서 모여드는 정보의 허브 지위도 당분간은 구가하기 어려울 듯했다.

듀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렌이 황자의 이름으로 전달한 진언,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던 모양인데 알아내는 건 순식간이었거든?”

“미리 알아냈는데 항구가 불에 탔네요?”

“그건, 너희가 제대로 감시를 하지 않아서기도 하잖아!”

“아뇨. 우리는 레데 방면의 바다만 조사했을 뿐이에요. 레데의 전단은 카르도나로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발견할 수 없었죠. 도국 연합 전체에 경고할만한 사안도 아니었고요. 그건, 헬데움 측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세밀 메렌치는 할 말을 잃었다.

중간에서 미리 정보를 가로챈 세밀이었지만, 그 정보 출처가 아렌의 ‘점괘’였기에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빠르고 즉흥적인 정보를 취급하는 만큼, 정보의 출처만큼은 따졌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한 것이다.

“…미안해요. 말이 심했군요. 레데의 함대 행방이 묘연한 지금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조롱할 때가 아니니까요.”

“…나야말로, 괜한 화풀이를 했어. 헬데움이 불탄 게 카르도나의 잘못은 아닌데.”

“하지만… 레데는 카르도나의 항구와 배만 불태웠을 뿐 상륙해 점령하려 들지는 않았어요. 그대로 배를 돌려 떠났죠.”

“레데로서도 상륙은 어려웠을 거야. 상륙 과정에서 병력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열여덟 도국과 전부 싸워야 하는 입장이니까.”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둘은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단숨에 아렌을 돌아봤다.

그 기세에 아렌조차도 한발 물러서야 했다.

“뭐, 뭐죠?”

“그래서, 지금 어디지?”

“뭐가요?!”

“레데의 전함이 지금 있는 위치 말이에요. 점괘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못하겠어? 어깨라도 주물러줄까? 얼른 카드를 꺼내!”

둘이 동시에 아렌을 재촉해왔지만, 그런다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전에는 내 점괘를 등한시하더니, 이제와서 달려든다고요?”

“전에는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네 점괘는 실제로 적중했어. 신통력이 있는건지, 다른 정보통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야.”

“한번 성과를 낸 방법에 다시 기대하는 건 그리 잘못되지 않았다고, 책에도 적혀 있어요.”

두 명의 기대는 선명하게 아렌을 압박했지만, 아렌은 둘의 기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 지금 레데 전단의 위치를 점칠 수 없어요.”

“어째서?!”

“왜냐하면, 이미 전에 비슷한 점괘를 본 적 있기 때문이에요. 카르도나가 다음에 어디를 칠지에 대해서요.”

“아-”

듀란 우피치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아렌은 카르도나가 공격당할 거라고 했죠. 이 도서관도 무너질 거라고요.”

“하지만, 공격당한 건 헬데움이었잖아!”

“점괘는 밀정의 보고서가 아니에요. 부족한 부분도, 모호한 부분도 있죠. 당시에는 전혀 해석 못 하다가 나중에야 드러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카르도나는 공격받을 거에요. 그게 다음번일지 다다음일지는 모르지만.”

물론 한번 봤던 점괘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규칙은, 아렌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사실은 신통력 따위 없었던 아렌이 저런 규칙을 만들어둔 이유는, 같은 사안에 점괘를 반복할 경우 두 점괘가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변명은, 지금처럼 단서가 전혀 없기에 점괘를 내리고 싶지 않을 때도 주효했다.

“금기가 있는 이유는, 그걸 지켜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점을 볼 수 있는 아렌이 이렇게 말하는데, 세밀과 듀란이 뭐라 말할 처지는 안됐다.

“그럼, 우선은 이웃국에도 연락해 카르도나를 우선으로 방어해야 하는 거야? 레데가 언제 어디를 먼저 칠 지도 모르는데?”

레데의 무적 함대는 바다 용암을 제외하고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궤를 달리했다.

아무리 카르도나가 도시국가의 맹주 중 하나라 해도 단독군사력만으로는 대적할 수는 없다.

그때.

“아니, 아마 다음은 이곳일 거다.”

아렌과 세밀, 듀란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레데의 유력가문 랜돌프 가의 차남, 미켈 랜돌프였다.

“미켈! 아직도 여기 있었어?!”

“물러서세요. 당장 위병을 부르겠습니다.”

붉은 머리칼을 사방으로 날리며 분노하는 세밀과, 깨어진 유리방에 앉은 채 조용히 노려보는 듀란.

두 명의 시선을 받은 미켈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만. 난 도망가지도, 너흴 해하지도 않을 거야.”

“지금 레데의 시장은, 네 부친 아닌가? 그런데도 이 일을 전혀 몰랐다고? 지금 그 말을 믿으란 말이야?!”

“정말 몰랐다고! 본국과 주고받은 서신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단 말이야!”

“아직도 그런 변명을-”

세밀은 좀처럼 믿어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렌이 본 미켈의 표정은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아렌이 물었다.

“당신이 본국과 나눈 서신은, 중간에 누가 확인하나요?”

“확인? 그야, 항상 영감이 먼저-”

아렌의 암살을 사주하고, 전서구 사육장에서 떨어져죽은 미켈의 집사, 프리드먼.

“그럼, 그가 먼저 서신의 일부를 빼돌려도 당신이 확인할 방법은 없겠네요?”

“영감이, 날 속였다고?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없잖아!”

“이유는, 있어요.”

“그게 뭔데!”

“프리드먼은, 당신이 죽는 것을 막고 싶었던 거예요.”

“…….”

지금 아렌이 하려는 말은 원래 거래 재료였다.

하지만 때로는 파는 물건이라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더 이로울 때가 있다.

“…전에 당신은 내가 프리드먼에게 해준 점괘를 알려달라고 했죠. 네. 그때 전 프리드먼에게 몇 가지 점괘를 남겼어요. 불타는 바다와 전쟁에 관한 내용이었죠.”

아렌의 말을 들은 세밀과 듀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비슷한 말을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에게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그래서, 영감이 널 죽이려 한 거군. 고국의 전쟁이 너로 인해 사전에 탄로 나면 안 되니.”

“그것 말고, 다른 점괘도 있었어요. 미켈 당신과 관련 있는 거였죠.”

“나와?”

사실, 이건 실제로 아렌이 본 점괘가 아니었다.

적당히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둘러댄 말. 하지만 프리드먼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네. 미켈 당신이, 그리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했죠.”

*****

자신의 면전에서, 기이할 정도로 점괘가 잘 맞는 점술가에게 죽음을 선고받은 것 치고는 미켈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군. 영감이 항상 본국과의 연락을 먼저 확인한 것도, 그래서였나? 내가 레데로 돌아가 군함에 타면 죽으리라고 생각해서?”

“단순한 고용주 이상으로, 당신이 어지간히 소중했던 거겠죠.”

‘난 죽이려고 했지만.’

정황상 이번 전쟁에 미켈은 관여하지도, 이리 알고 있지도 못했다는 쪽으로 기울자 듀란과 세밀의 태도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네가 관련이 없는 건 알겠어. 하지만 네 본국은 이미 헬데움의 항구를 공격했고, 사상자도 보고됐어. 피를 본 이상 이젠 물러설 수 없다고. 전쟁을 멋대로 시작한 건 레데지만, 전쟁을 멋대로 끝낼 수도 있는 건 아니야.”

“물론 알고 있고, 나도 비겁자는 아니야. 조국이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이상, 난 최선을 다해 너희를 돕겠어.”

‘…그 각오는 가상하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미켈?”

아렌이 물었다.

“사정이 어찌 됐건,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에요. 레데로 돌아갈 수는 없겠죠. 카르도나나 다른 도국에 머물렀다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용당할지 모르고. 물론, 그것도 이번 전쟁 중 죽음을 피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이미 각오한 바야.”

“그게 사실이라면, 저도 하나 제안을 드리죠.”

“제안?”

미켈 그에게는 가장 좋을 수 있는 선택이었다.

“제국으로 오세요, 미켈 랜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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