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듀란은 아렌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학생이 아니라 비서관의 신분이라. 그건 곧, 지금 학생으로서가 아닌 제국 비서관으로서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당신에게 제국을 대표할만한 대표성이 있다고는 생각 못 하겠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을 대표하다니, 무엄한 것도 정도가 있죠.”
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그 말은 당신이 한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인데요.”
“제가 대표하는 것은 제국보다는 작은 것이니까요.”
“더, 작은 것?”
“지금 제 행동은, 제국의 제 12황자이신 레온나토스 브륀할트 전하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흐음.”
듀란은 아렌의 말을 평가하듯 뜸을 들이며 천천히 말했다.
“제국을 대표하는 것보다는 한 급수 낮아지긴 했네요. 하지만, 여전히 당신에게 그만한 역할이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는걸요?”
“이거면 대답이 될까요?”
아렌은 듀란에게 손바닥 반개만 한 크기의 인장을 들어 보였다.
“…이건.”
“네. 레온나토스 전하의 인장입니다. 이곳에 올 때 전하께 직접 받았죠. 이 인장이 있는 한 제가 보내는 서신은 곧 레온나토스 전하가 서신과 같습니다. 이만하면 증거가 될까요?”
“흐음…”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렌은 여기서 한술 더 뜨기로 했다.
“그리고, 설령 제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만큼 제 행동에 책임을 물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일개 비서관이, 황자의 권위를 사칭했다고 말이죠.”
아렌의 단독 행동을 빌미로 제국의 황자에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실제로 카르도나로선 손해볼 것이 없었다.
듀란은 반문했다.
“하지만… 지금 이 행동이 황자의 지시일 리는 없어요. 제국을 향해 가는 전서구도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한들 살인 사건 이후 제국과 카르도나 사이를 왕복할 시간은 도저히 나오지 않으니까요. 결국은, 이미 올 때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뜻인가요?”
“방금 말씀드린 것 이상의 말은 못 드리겠군요. 어차피 제 말의 진위는 이제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아렌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도 카르도나가 얻는 게 있는 이상, 더 파고드는 것은 무의미했다.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듀란은 결국 받아들였다.
“레데 방면으로의 경계를 더 강화해달라고 시장님께 전하죠. 그대신, 당신도 하나 작성해주시죠?”
“작성?”
“지금 한 말을 기록하고, 증명한다는 표시로 레온나토스 전하의 인장을 찍어주세요. 작성된 글이 아닌 구두로만 한 말은,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신념은 확실하군.’
오직 문서로 작성된 정보만 정보로서 인정하는 우피치 가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어차피 구두로만 오갈 거래는 아니었기에, 아렌에게도 내용증명을 적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아렌이 적은 것은 크게 두 가지.
1. 아렌은 레데가 가진 전쟁 의도를 모종의 수단으로 미리 간파하여, 이를 카르도나 측에 미리 알렸다.
2. 이런 아렌의 행동은 곧 제국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의도이며, 행동의 책임 또한 레온나토스가 진다.
이제 발뺌할 수 없도록 말미에 레온나토스의 인장까지 박아넣은 아렌을 보고, 듀란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요.”
“아직도? 여기서 뭘 더 증명해야 하죠?”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황자에게 전권을 받았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제국에 연락이 갈 시간도 없었고, 오면서부터 모든 전권을 받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듀란이 아렌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렌이 허세가 밝혀지면 그것을 빌미로 제국을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허술하게 적을 것 같았던 아렌의 내용 증명은 빠져나갈 구석 없이 완벽했다.
이것이 허세임이 들키면 카르도나에서야 그냥 추방당하겠지만, 제국 안에선 참수 당하더라도 할 말 없는 중죄.
“설마, 정말 당신에게 전권을 준 건가요? 당신의 황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죠?”
“…좋은 분이죠.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인망이 좋은. 섬길만한 분이에요.”
아렌의 대답은 제국의 황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아니면, 대단한 건 당신인가?”
“네에?”
“실은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어요. 외국의 문서라 우리도 많은 것을 갖고 있진 않지만, 황궁 한복판에서 해가 사라지는 것을 예견한 후로도 참 많은 곳에 파견 갔었더군요.”
옛 아티스 왕국과 북부 선페일 영지, 그리고 서부해안의 도국 연합에까지.
황자의 비서관 신분으로선 저 중 하나만으로도 과분했다.
“당신, 사실은 거물 아니에요? 그만한 거물이 우리나라에 오다니, 실은 배움 말고 다른 것이 목적이었다거나?”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은, 이게 원래 목적이었다거나?”
“…….”
멋대로 상상을 부풀려가는 듀란 우피치.
아렌은 굳이 그의 잘못된 가정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됐고, 만약 제 경고가 도움이 됬다면 꼭 기억해주세요. 레온나토스 황자는 도국 연합의 평화와 서로간의 우호를 기원했다는 걸.”
“그야 물론이죠.”
점괘 따위의 정보로는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카르도나를 겨우 움직이게 했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경고는 다 했다.
아렌이 돌아가려는 찰나, 듀란이 불러세웠다.
“아 참. 그쪽에 감사하다는 말을 못했네요.”
“감사라니, 뭐가요?”
“레데가 아니라, 이쪽을 선택해준 것.”
“…….”
“그 정보가 만약 진짜라면, 제국 입장에선 카르도나가 아닌 레데를 선택할 수도 있었겠죠. 혹은 내버려 둔 채 전란에 휩싸인 서부해안을 노리거나.”
그녀가 말한 것도 제국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렌이 레데를 편들지 않은 이유는, 단지 레온나토스 혼자의 힘으로는 혼란스러워진 서부해안에 군대 파견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차기 황권 주자라고 하지만, 국가와의 전쟁을 위한 거병은 어불성설이었다.
레온나토스가 이미 황태자이거나, 제국의 황제였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렌이 적은 각서를 품에 갈무리하며, 듀란이 물었다.
“이 정보는 메렌치 가문의 딸도 알고 있나요?”
“세밀? 점괘 자체는 알려줬죠. 레온나토스 전하의 권위로 한 말은 아니지만요.”
“그렇군요. 그 말뜻은, 메렌치와 우피치 중에선 우피치를 선택했다는 의미로 봐도 될까요?”
“…네, 뭐.”
아렌은 눈길을 돌렸다.
사실은 학교 어딘가에 있을 세밀을 찾기 어려워서 여기 먼저 들른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럼 곧바로 시장님께 서신을 보내죠. 되도록이면, 당신의 말이 틀렸으면 좋겠지만요.”
듀란의 뼈 있는 말 이후.
카르도나는 레데로 향하는 항로의 감시를 일주일간 유지했다.
항로는, 어떤 전란의 징조도 없이 평안했다.
*****
“아, 나가기 싫다.”
기숙사의 침대에 누운 채, 아렌은 듣는 이 없는 투정을 했다.
“대체, 언제까지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지?”
이제는, 학교라면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살인사건 이후 아렌은 학교 안에서 거의 유령 취급이었다. 그건 교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알게 모르게 아렌을 꺼림칙해 하는 태도가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카르도나 당국에 경고한 지 1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전쟁이 꼭 단시일 내에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시기가 한 달 뒤일지, 1년 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이제는, 아렌은 자신이 봤던 환각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봤던 환각이 미래를 예지한 것이 아니었나?’
그럭저럭 이곳에서 유학한 지 반년이 흘렀고, 아렌은 이쯤에서 이 지긋지긋한 유학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어디서 어떻게 검열될지도 모르니 제국의 소식을 우편으로 받는 것도 힘들다.
“…전쟁이고 학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돌아갈까?”
아무 실적 없이 황궁에 돌아가면 입지야 좀 약해지겠지만, 어차피 아렌은 한자리 단단히 꿰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아렌이 원하는 건 황제의 흑막. 황제가 된 레온나토스 뒤에서 점괘로 조종하면 그만이니 직함 따위는 없는 것이 더 나았다.
아렌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봐. 난 나간다?”
“…….”
몰트와는 같은 기숙사 숙소를 쓰고 있지만, 하녀의 죽음 이후 몰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기숙사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당연히 수업도 나가는 둥 마는 둥.
당장 이번 학기를 마치고 제적당해도 할 말 없는 태도였다.
‘…내가 신경 써줄 필요는 없겠지.’
아렌은 방을 나왔다.
복도에 학생들은 많았지만, 모두 아렌을 곁눈으로 바라보고 지나치기만 할 뿐이었다.
노골적인 외면이었다.
‘무관심도 이쯤 되면 아프군. 정말 카르도나를 떠나야 할 때인가?’
아렌이 생각한 찰나.
‘…어라?’
기숙사 복도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있었다.
‘…세밀 메렌치? 왜 저러지?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아렌이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멱살을 붙잡고 쿵, 벽에 밀어붙였다.
아직 나이가 어려 완전히 체격이 자라지 못한 아렌이라, 세밀과 아렌의 체격은 엇비슷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훈련을 해온 아렌이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밀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아렌은 그녀의 기세에 눌려 순순히 벽에 밀쳐졌다.
-조용.
감독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숙사의 로비는 정적에 휩싸였다.
정적을 의식한 듯, 세밀의 입이 아렌의 귓가에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사나운 눈을 한 채 아렌에게 소곤거렸다.
“…네가 우피치 가문의 딸에게 했던 말은 이미 알고 있어. 자신의 행동에 황자의 권위를 씌워? 참 대단해.”
하지만, 고작 그걸로 아렌을 벽에 밀칠 리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 거지?”
아렌은 이곳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꽤나 지금 흥미를 느낀 듯했지만, 이 대화가 그들의 귀에 닿을 일은 없을 듯했다.
아렌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내가 만나고자 할 때 만날 수 없었고, 당신은 내 점괘를 믿어주지 않았으니까.”
“…네 점괘를 믿지 않은 건 우피치의 여식도 마찬가지 아닌가?! 고작 그 정도로-”
“대신, 각서는 남으니까요. 듀란 우피치는 내 점괘는 믿지 않았지만, 레온나토스 전하의 권위를 빌린다는 각서는 믿었어요.”
그리고, 카르도나 수뇌부에게 전달한 정보는 어차피 이런 식으로 메렌치 가문에 알려지게 될 테니까.
어차피 둘 모두에게 다 알려질 테니, 정보를 얻는 속도가 다소 느린 우피치 가문을 우선했을 뿐이다.
“…고작 그 정도 이유로.”
“왜 그러죠?”
세밀 메렌치는 여전히 아렌을 밀친 채, 낮게 피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새벽, 헬데움의 항구 앞 바다가 불탔다. 정박해있던 함선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어.”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환각이, 사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