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프리드먼, 프리드먼!”
아렌이 경비병과 미켈을 불러왔을 때, 추락한 프리드먼의 체온은 이미 차디찬 빗방울에 모두 빼앗긴 뒤였다.
프리드먼의 주위로 흐른 피는 빗물에 희석되어 주위로 넓게 퍼졌다. 완전히 꺾인 목은, 그가 떨어질 때부터 이미 즉사였음을 나타냈다.
미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렌. 네가 발견한 거냐?”
“아, 미리 말해두겠는데, 아렌 저 녀석은 무죄거든?”
“…세밀 메렌치.”
같이 있었던 세밀 메렌치가 아렌을 변호했다.
“아렌과 같이 사육탑에 왔을 때, 이미 프리드먼은 탑 위에 있었어. 프리드먼은 멋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린 거야.”
“실족도, 아니었다고?”
“미켈 너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던데?”
“그 말은, 역시 프리드먼이 범인이었나?”
미켈은 괴로운 듯 이마를 쓸어내렸다.
노년에 접어든 프리드먼이 직접 손을 쓴 것은 아닐 테지만, 아렌을 공격한 암살자를 직접 불러와 사주한 것이 프리드먼일 것이다.
외부에서 학원으로 통하는 부두는 하나뿐.
사람 한 명을 배에 몰래 숨겨 들여오려면 그만큼 가문의 역량과 힘이 큰 편이 좋기 때문이다.
세밀이 물었다.
“미켈. 프리드먼은 죽기 직전 전서구를 날렸어. 랜돌프 카문의 전서구가 향하는 곳은 어디지?”
“레데 본국의 우편국인데… 전서구?”
프리드먼이 보낸 전서가 무슨 내용인지, 미켈은 짐작도 가지 않는 듯했다.
프리드먼이 죽음을 택하기 직전에 날려보낸 전서구다. 다른 의미가 없을 리 없다.
‘서신 한 장으로, 또 뭐가 바뀌는 거지?’
원래 역사에서 아렌은 이 학교에 오지 않는다.
당연히 아렌을 노린 살인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프리드먼이 날린 전서도 없던 것이다.
프리드먼이 날려 보낸 전서 한장으로, 또다시 역사가 변한다.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설마, 방금의 연락으로 내가 봤던 환각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니겠지?’
꼬박 이틀 동안 카르도나를 유린했던 태풍은, 오후에 접어들어서야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아렌은 비와 바람에서, 미묘한 전쟁의 냄새를 맡은 기분이었다.
*****
다음날. 태풍이 완전히 멎자 하늘은 말끔해졌다.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건물은 없었지만, 곳곳의 나무가 부러지고 벽에 발린 회반죽이 떨어져 나갔다.
예전과 사뭇 달라진 학원의 모습.
‘그리고, 학교 안 분위기도 마찬가지겠지.’
정황상 프리드먼이 범인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어진 이상, 아렌은 겨우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어쩌면, 프리드먼이 스스로 몸을 숨기보다 그저 일상을 연기하기만 했어도 아렌이 혐의를 벗는 것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설령 범인이라 의심받아도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법정 다툼이라도 벌여 볼 만한 상황이었지만.
프리드먼은 자신의 안위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영원히 숨기는 것을 택했다.
‘프리드먼이 숨기고자 했던 건, 역시 ‘그’ 점괘인가?’
태풍이 끝나고 수업은 다시 재개되었다.
아렌이 교실 안에 발을 들였을 때.
“…….”
“…….”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리깔렸다.
대충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아렌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아렌이 교실의 중앙 부분에 다다랐을 때쯤.
“…살인자.”
아렌의 등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렌이 돌아봤을 때, 눈을 마주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 안의 분위기는 이미 태풍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래서야, 얌전히 학점 따고 졸업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묵묵히 자기 공부만 해도 학위가 나오는 과목이 있고, 과정 중 학생들과의 협동이 필수인 과목도 있다.
‘그리고, 그 녀석도 안 오는군.’
아렌과 같이 입학한 동기, 몰트 치가렌.
그의 하녀 역시 아렌을 기다리던 도중 암살자에 의해 죽었다.
몰트의 하녀는 말 그대로 아렌의 사정에 휘말린 것뿐이지만, 그 자리를 주선한 것이 몰트인 만큼 그 본인도 책임을 강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건 이후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었고, 의식적으로 피하는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미안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학과생활이 중요한 게 아니야.’
아렌에게 있었던 일련의 일들은, 한가지 사실을 상수로 두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도시국가 레데가, 같은 도국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미켈이 죽는다는 점괘를 내렸을 때,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집사의 모습.
특히 프리드먼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점괘에도 세밀 메렌치, 듀란 우피치와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정보의 취급에는 통달했다는 평가를 받는 두 가문조차 모르는 정보를, 군인 가문의 일개 집사가 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자신들이 직접, 전쟁에 관여해있지 않은 한.
그런 프리드먼이 죽기 직전 본국으로 서신을 보냈다.
‘당연히, 안부 인사 따위는 아니겠지.’
그가 보낸 서신으로 인해 무언가 격변할 거라는 확신이, 아렌에겐 있었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제국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지, 아렌이 선택해야 할 시점이었다.
곧 일어날 것이 명확한 전쟁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도국이 전화에 휩싸이도록 내버려 두는 것 또한 가능한 선택지다.
결국 도국 연합의 결속력은 약화될 거고, 그 공백을 제국이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혹은 레데, 혹은 다른 도국이 곤란한 시점에 도움을 줘 우호관계를 쌓는 것 또한 고려해볼 수 있었다.
철저히 무시하는 것과 도움을 주는 것.
제국으로선 어느 쪽이든 가능한 선택지였다.
곧 일어날 전쟁을 방치하고 그 사이 제국이 서부 해안에 진출하는 것.
그리고, 어느 도국 한곳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줘 강력한 혈맹으로 두는 것.
‘…….’
아렌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아렌은 멜로익을 불러들였다.
“…불렀어?”
멜로익은 아렌을 구해줬지만, 동시에 그녀가 저지른 살인을 아렌이 뒤집어 쓴 형국이 되었다.
멜로익이 아렌을 대하는 태도에는 약간의 거리낌이 묻어 있었다.
“이 서신을 제국까지 전달해야 해.”
“서신?”
“그래. 레온나토스 전하께 직접. 도중에 분실하거나 탈취당해선 절대 안 돼.”
“…그럼, 위병들에게 직접 들려 보내야 하나?”
제국에서부터 서부해안에 같이 동행했던 황궁 위병들은, 지금도 카르도나 시내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언제고 그들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지금 주효했다.
‘설마하니, 파발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렌은 멜로익에서 직접 작성한 서신을 건넸다.
서신의 봉투에는 레온나토스에게 직접 받은, 제국의 제 12황자를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멜로익, 넌 이 서신을 위병에게 전해 줘. 그대로 위병과 같이 제국에 돌아가도 좋고, 돌아오려면 돌아와도 상관없어. 단, 위병은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제국으로 가, 레온나토스 전하에게 이 서신을 전달할 것.”
“…좋아. 서신만 전하고 곧바로 다시 돌아올 거지만.”
평소라면 서신의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왔을지도 모르지만, 멜로익은 두말없이 아렌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다시 오려고? 안 와도 되는데.”
“…내가 네 목숨 살려준 거,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멜로익이 배를 타러 떠났다.
“…자, 그럼. 카르도나를 우선할까, 헬데움을 먼저 할까.”
이곳에는 카르도나의 유력가문과 헬데움의 유력가문이 다 있었다.
과거의 정확한 일을 알고 싶다면 카르도나, 모호하지만 누구보다도 기민한 현재의 일을 알고 싶다면 헬데움을 택해야 한다.
결국,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 간의 선택.
“…….”
아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
아렌이 먼저 듀란을 찾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먼저, 세밀보다는 듀란을 만나러 가는 것이 더 쉬웠다는 점.
학원 안에서의 사태로 꽤 바쁜 듯, 세밀은 한 시도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찾기 쉽지 않았다.
반면 세밀은 항상 있는 곳이 정해져 있으니, 만나고자 한다면 곧바로 만날 수 있다.
도서관의 건물 밖은 태풍으로 인해 어지러웠지만, 튼튼하게 지어진 내부는 말끔했다. 태풍의 여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하지만, 도서관의 옥상은 사정이 달랐다.
“…으, 이래선.”
도서관의 옥상에 있는 녹음 가득한 정원과 유리로 된 방은, 태풍의 여파를 그대로 맞은 모습이었다.
무성하게 자랐던 나무는 꺾이고 부러져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유리방은 천장과 한쪽 벽이 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방 안 책장은 무너져있고, 쌓여있던 책들은 빗물을 잔뜩 머금은 채 울어 있었다.
그리고, 엉망이 된 방 안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젖은 책을 넘겨보는 듀란 우피치가 보였다.
“어머. 또 왔군요.”
“…방안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기 있을 필요가 있나요?”
“학교 바깥에서 사람을 불렀어요. 인부가 와야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있겠죠. 그때까지는 이 상태에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곳이 엉망이면 다른 데서 책을 봐도 되는 것 아니에요? 아래층으로만 가도 훨씬 편하겠고만.”
“전 여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 이 모습도, 나름 운치가 있지 않나요?”
“…….”
“긴말 하지 않겠어요. 왜 온 거죠, 아렌?”
‘…책에 없는 정보는 취급하지 않는다라. 과연.’
아렌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듀란은 아렌을 둘러싼 살인사건조차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그건 허위 정보였으니까. 허위사실은 알 필요조차 없다는 우피치의 철학에 걸맞을지도.’
아렌은 이곳에 찾아온 본론을 꺼넀다.
“이건 만약의 이야기인데, 한 도국이 다른 도국에 전쟁을 건다면, 어느 나라가 먼저 공격당할까요?”
“그야 카르도나, 혹은 헬데움이겠죠.”
두말할 것 없이 듀란은 즉답했다.
“…꽤 단언하네요.”
“그야 카르도나와 헬데움은 열아홉 도국 연합의 구심점이니까.”
“그렇다면 레데는 왜 빠졌죠? 두 도시와 마찬가지로 레데도 도국 연합의 구심점 중 하나잖아요?”
아렌의 가정에서 ‘누가’ 전쟁을 거는 가는 상정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레데가 빠진 것은 이상했다.
“그야 간단하죠. 어느 도국이든 단독으로 레데를 공격하면, 그건 곧 필패를 의미하니까.”
거기까지 대답한 듀란의 시선이 아렌에게로 향했다.
“이 이야기, 전에 하던 점괘에서 이어지는 건가요?”
“그럼 레데가 한 도국을 치면 어떻죠? 전 도국 연합이 모두 레데를 협공하나요?”
“네. 그게 조약의 내용이니까요.”
“아무리 레데라 해도 나머지 열여덟 도국과 싸울만큼은 안 되나봐요?”
“물론이죠. 모든 도국의 전함 숫자를 합하면 레데의 세 배는 될 거랍니다?”
‘…너무 적어!’
레데 한 곳과 나머지 열여덟 도국 간의 무력 격차라기엔, 세 배의 차이는 너무 적다.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도국의 전함은 바람처럼 빠릅니다. 이번 태풍으로 제법 손상이 있었다지만, 그것도 금방 복구해낼 거예요.”
듀란은 공언했다. 하지만, 아렌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태풍, 전함, 어디론가 보내진 서신…’
“이번 태풍으로 전함이 피해를 입었나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사실이었다.
“태풍의 영향을, 레데의 전함도 받았을까요?”
“…그, 건 아닐 거에요. 레데는 서해 한복판에 있으니 평소에도 태풍 피해가 왕왕 있어 왔어요. 그만큼 배 정박에 심혈을 기울이고요. 어지간한 태풍으로는 레데에 정박된 배를 피해입힐 수 없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아렌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말했다.
“카르도나의 시장에게 곧장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레데의 공격이 임박했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또 그 소리인가요? 이번에도 점괘에요?”
“아뇨. 이번에는 점술가 자격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렌은 탁자 위 어지러이 흩뿌려져있는 유리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불규칙적으로 깨진 날카로운 파편은, 어디를 만져도 베일 듯 불안했다.
아렌은 그 조각을 해에 비춰보며 말했다.
“지금 한 말은, 제국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자격으로 하는 말입니다.”
“…조금은 흥미가 생기는군요.”
아렌의 말을 항상 흐리멍덩하게 듣던 듀란의 얼굴에 드디어 호기심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