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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13화 (113/227)

#113화

“이제 됐다. 나와라.”

아렌이 방에 갇힌 지 꼬박 하루가 다 되었을 무렵.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방문을 열고 말했다.

“…지금요?”

아렌은 무심코 창밖을 쳐다봤다.

비바람은 어젯밤에 가장 매서웠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학원 안은 폭풍의 영역 안이었다.

“벌써 제 혐의가 풀린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어디까지나 가석방일 뿐이야!”

복면인을 죽인 것은 사실 멜로익이지만, 사건에 멜로익까지 끼면 너무 복잡해진다.

아렌은 복면인을 죽인 것이 자신이고, 정당방위라 주장하고 있었다.

아렌이 살인 자체는 인정하는 이상 정말 정당방위였는지가 사건의 쟁점이었다.

그리고, 죽은 복면인이 여러모로 수상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렌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복면을 쓴 채 같은 모양의 단검을 여러 자루 가지고 있던 점, 학원 안에 허락받지 않고 몰래 들어온 사람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아직은 완전히 혐의가 풀린 건 아니니, 함부로 행동하지 마!”

아렌은 문밖으로 나왔고, 항상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한 경비병의 얼굴을 아렌은 처음으로 보게 됐다.

“…뭐야. 뭘 그렇게 쳐다봐?”

“그래도 그사이 정이 들었는데, 어떤 얼굴인지 궁금해서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나에 대한 혐의는 대부분 풀린 모양이야. 조사관은 한동안 학교에 올 수 없을 텐데. 수사는 누가 주도한 거지?’

아렌의 의문은 잠시 뒤 금방 풀렸다.

“어때? 하루 동안 푹 쉬었어?”

세밀 메렌치였다.

“…사건 현장 감식도 할 수 있었어요?”

“뭐야, 내가 한 걸 어떻게 알지?”

“그야 보면 알죠. 미결 사건의 진상은 꽤나 잘 팔리는 정보일 테니까.”

“그럼, 널 꺼내준 게 공짜가 아닌 것도 알겠네?”

그녀는 아렌을 잡아끌고 인적이 뜸한 복도로 안내했다.

“…길게 얘기할 시간 없어. 미켈 랜돌프의 집사가 이미 사라진 것, 알고 있지?”

“아직도 못 찾았어요?”

미켈이 찾아온 후 반나절이 지났다. 태풍이 치는 밤이었으니 수색에 차질이 있었음은 자명했지만, 반대로 건물 어디에도 없었던 프리드먼이 밤새 건물 밖에 있었다면, 프리드먼이 죽은 채 방치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올라간다.

“그럼 절 찾아온 것도, 프리드먼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서군요.”

“미신을 안 믿지 않았느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말야.”

“…카드를 가져오면 곧바로 점쳐보죠. 그런데, 꼭 집사가 희생됐다고 확신할 순 없지 않아요?”

아렌의 말을 세밀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사실은 집사가 범인이었다? 물론 가능해. 고려 안해 본 것도 아니고. 랜돌프 가의 멍청이는 그쪽으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릴 때부터 알고지낸 가족같은 사람이니까요. 설마 그가 악인이라고는 생각지 않겠죠.”

“하지만, 정말 집사 프리드먼이 범인이었다면 왜 굳이 모습을 감춘 거지? 어차피 직접 손을 쓴 게 아니잖아? 태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텐데.”

“…집사 프리드먼에게도 점괘를 쳐줬어요. 어떤 내용인지는 밝히지 못하지만, 꽤나 놀란 반응이었죠. 암살자가 날 죽이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고, 내 점괘가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다면 이미 진상이 밝혀진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걸지도 몰라요.”

“…….”

“어디까지나, 그가 범인이라는 가정 하에 하는 말이지만요.”

휘오오.

창 밖에는 아직도 태풍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아렌은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이런 태풍이, 자주 오나요?”

“설마. 보통은 해안선까지 오지 못하고 바다 한복판에서 서서히 사그라들지. 섬 위에 있는 레데는 그래서 태풍 대비가 잘 되어있다지만, 서부 해안에 있는 도국에게 이만한 태풍은 생소한 일이야.”

“설마, 비 나그네처럼 태풍 나그네라도 있는 것 아니에요?”

“허, 재밌네.”

세밀은 아렌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겼지만, 아렌이 괜히 한 말은 아니었다.

운명석과 거래해 머리 위에 비를 뿌리는 사람도 존재했으니, 태풍을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으니.

‘게다가, 비를 뿌리는 것보다는 몇 배나 유용해보이고.’

하지만 세밀의 반응을 보니 적어도 세밀이 아는 건 없는 듯했다.

“우선은, 제 카드를 가지러 가죠. 그걸로 프리드먼을 찾고 싶은 거잖아요?”

“그래. 역시 네 점괘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렌은 세밀을 데리고 하루 동안 비워뒀던 자신의 기숙사로 향했다.

몰아친 비바람에 교복이 흠뻑 젖은 두 사람이, 물을 뚝뚝 흘리며 기숙사 문을 연 순간.

“…….”

“…….”

로비에 모여있던 수많은 눈이 아렌에게 꽂혔다.

그리고, 절대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는 학생들.

아렌을 중심으로 느슨한 반원이 그려졌다.

‘…하는 수 없지.’

비록 지금은 가석방 상태이지만, 아렌은 사람을 죽였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비록 정당방위를 인정받긴 했지만,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평생 살인과는 인연이 없었던 학생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이런, 경원시당하는데? 앞으로 학교생활, 괜찮겠어?”

“이런 거야 늘 있었는데요 뭐. 고향에 온 거 같고 좋네요.”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에게 점을 못 쳐주는 것 아냐?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겸사겸사 이상한 소문도 퍼트리고 말야.”

아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심도 못 하겠군.’

“어차피 점괘로 뭔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매일 보던 점괘를 잊지 않게끔 하는 소일거리였을 뿐이에요.”

“흠… 달리 무슨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아렌은 방에서 카드를 챙겨 빈 교실로 향했다.

전에 다른 학생들을 점쳐주던 빈 교실.

아렌과 감독생 세밀의 동행에, 몇몇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멀찍이 떨어진 채 따라왔지만, 교실 앞에서 세밀 메렌치가 막았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턴 떨어져 주겠어? 아렌이랑은 이야기할 게 있거든?”

“무, 물론입니다!”

학생들에 한해선 선생 이상의 권위를 가진 감독생의 말에 거역할 만큼 강단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따라오던 학생은 깨끗이 물러났다.

그 뒤 아렌은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교실 안에서 카드를 늘어놨다.

“…아. 그러고 보니 미켈은 지금 어떻죠?”

“밤 동안 하루종일 온 학원을 뒤진 모양이야. 그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지금쯤은 방에 뻗어 누워있을걸?”

“그거, 고생했겠네요.”

‘수색에 그만한 공을 들이다니. 설마 그것까지 연기는 아니겠지?’

프리드먼이 사라진 이유가 전쟁을 암시한 점괘 때문이라면, 마찬가지 점괘를 내린 세밀과 듀란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어젯밤 미켈에게 그녀들을 지켜봐달라고 말하려 했던 아렌은, 미켈 본인이 범인일 가능성을 무시 못 해 결국 단념해야 했다.

‘미켈이 범인이 아니라면, 역시 범인은-’

“지금 듀란은 뭘 하고 있죠?”

“글쎄? 내가 그 여자 행동까지도 알아야 하나?”

“같은 감독생이잖아요? 카르도나 국제학교 학생들의 정점인데, 신경쓰지 않아도 정보는 들어올 텐데요.”

“내게 필요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야. 그런데 굳이 알 필요 있을까?”

“흠…”

세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한 귀로 흘리며, 아렌은 카드를 뒤집었다.

물론 지금 점괘로는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 있으며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쪽인가에 따라 점괘 내용도 180도 변한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범인은 하녀를 죽였던 그 자식이겠지. 학원 부지 안도 그리 크지 않은데, 숨어든 사람이 둘 이상일 가능성은 적으니.’

하지만, 하녀의 시체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방 안에 그냥 널브러져 있었다. 어차피 시체가 발견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사후 처리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양새.

그건 프리드먼을 죽였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리드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범인일 확률이 높다는 건가?’

그가 살아있다면, 여전히 폭풍이 몰아치는 이상 이 섬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세밀 메렌치는 카드 앞에서 머뭇거리는 아렌을 채근했다.

“자, 빨리 카드를 뒤집어봐! 오늘 중으로 본가에 연락을 넣어야 하니까.”

“기다려봐요. 점괘를 무슨 식당 메뉴처럼 주문해봤자-”

세밀의 말에서, 아렌은 이상한 지점을 눈치챘다.

‘…연락?’

“연락을 어떻게 하죠?”

“뭐가?”

“지금은 날씨 때문에 배는 못 떠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학교 밖에 연락을 할 수 있죠?”

“전서구가 있잖아?”

아렌이 왜 놀라는지, 세밀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굳이 배를 통하지 않아도 연락 자체는 할 수 있어. 직접 훈련시킨 전서구를 지참해야 하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폭풍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요?”

“비둘기가 아니라, 갈매기거든.”

세밀히 말한 건 전서구(傳書鳩)가 아니라, 전서구(傳書鷗)였던 모양이다.

“서부 해안의 갈매기는 어떤 폭풍 속에서도 날 수 있어. 날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

갈매기로 섬 밖에 전서를 보낸다는 말은, 아렌은 들어본 적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사실 학교 밖으로 연락을 보낼 수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갈매기들은 어디에 있죠?”

“전서국이 열었다면 새장 안에 있겠지만, 지금은 사육탑 안에 있을걸?”

“거기로 가죠.”

“뭐? 왜-”

“빨리.”

세밀은 의아해하면서도 아렌을 학교 외곽에 있는 사육탑으로 안내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원형 탑에 회반죽을 바른, 10미터쯤 돼 보이는 굴뚝 모양의 건물.

사이사이에 나 있는 구멍은 갈매기가 다니는 문처럼 보였다.

처음엔 의아해했던 세밀도 겨우 눈치챈 모양이었다.

“설마, 저 위에?”

“하루 종일 섬을 돌아다닌 미켈도 이 탑 위는 조사해보지 않았겠죠. 바닷가나 풀숲, 프리드먼이 있을 만한 다른 곳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시체를 짊어지고 탑을 오를 순 없을 테니까. 프리드먼이 저 위에 있다면, 그건-”

“자의로 탑 위에 오른 거겠죠.”

세찬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피부를 때렸다.

아렌은 탑의 1층으로 내려간 뒤, 위를 바라보며 외쳤다.

“프리드먼! 위에 있는 거 알고 있어요!”

“…….”

아렌의 외침에 세밀은 숨죽여 반응을 살폈다.

잠시 뒤.

“…놀랍군. 이것도 점괘로 맞춘 건가?”

탑 위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탑 안이 어두워 위가 보이진 않았지만, 틀림없는 프리드먼의 목소리였다.

“미켈이 걱정하더군요. 걱정 끼치지 말고 얼른 내려와요.”

“도련님께는, 심려를 끼쳐 면목이 없군.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실패했지만.”

“…….”

“하지만 이것마저 실패할 수는 없지.”

그와 동시에, 날렵한 날개를 가진 새가 탑 밖으로 날아갔다.

새의 다리에 작은 원통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전서구!’

“아렌. 미켈 도련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다오.”

“그런 말은 직접-”

아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석!

탑 위에서, 무겁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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