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렌은 침착한 태도로 사실만을 전달했다.
“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방안에 있는 하녀는 말이죠.”
“그럼 복면 쓴 사내를 죽인 건 인정하는 거잖아?!”
카르도나 국제학교 안에는 최소한의 치안유지를 위해, 경비 열 명 정도가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학교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은 처음인지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저 복면인을 죽인 건 제가 맞습니다.”
“역시!”
“하지만 저쪽이 먼저 공격해왔고, 전 대응했을 뿐입니다. 하녀가 찔린 상처와 복면인의 단검을 대조해보면 확실해지겠죠.”
“그딴건 우리도 알아. 하지만 공교롭게도, 네가 가지고 있던 단검도 꽤 비슷하게 생겨서 말이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그가 정말 당당하다면, 왜 복면을 쓰고 있었죠? 애초에 그 사람은 누구고요?”
아렌의 추궁에 위병은 인상을 찡그렸다.
“…학교 안 사람은 아니었고, 외부에서 숨어든 것 같더군.”
코르도나 국제학교는 작은 섬 위에 세워졌고, 섬 주변에는 바다 한복판에 솟아오른 성벽으로 빙 둘려 있었다.
섬으로 들어올 수 있는 부두는 오직 하나뿐.
외부인이 함부로 침입할만한 구조는 결코 아니다.
“어찌 됐건, 이제 곧 시에서 조사관을 파견할 거다. 자세한 진상은 그때 다 밝혀질 거야. 다만-”
“다만?”
위병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곧 태풍이 몰려온다더군. 어쩌면 모든 배가 운항을 못 할 수도 있어. 보통은 내륙까지 상륙하지는 않는데…”
아렌은 취조실로 쓰고 있는 방의 작은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뒤덮은 짙은 구름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어두웠다.
아렌은 중얼거렸다.
“부디, 배들이 들어올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휘오오-
몰아치는 거센 비바람이 아렌이 갇혀있는 방의 창문을 때렸다.
오후부터 급격히 몰아친 태풍으로 모든 선박의 출항이 금지됐고, 배들은 단단히 묶인 채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모든 운항은, 적어도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야 재개될 수 있다고 한다.
‘나한텐 좋은 소식은 아니군.’
이곳의 위병들에게 수사 능력이라곤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 아렌에게 걸려있는 혐의는 몰트의 하녀를 아렌이 죽였는지, 그리고 복면인을 죽인 것이 정당방위였는가, 이 두 가지.
모두 전문 수사관이 와야 밝혀낼 수있는 사안들이었다.
좁은 방 안에 갇힌 채, 아렌은 생각했다.
‘방문 밖은 위병이 지키고 있을 테고, 창문에서 올라오는 적은 없을 테지?’
누군가 아렌을 죽이려 했다. 그 살해 동기를 생각하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무의미했다.
그 이유야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뱉는 점괘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제국 황자의 비서관이 학교 안을 거니는 게 싫었던 건가?’
복면인은, 원래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숨어든 외부인이었다.
아렌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것도, 복면을 쓴 채 몰래 숨어든 침입자의 모습이 충분히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아렌은 방 안에서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방문 너머로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지금 다른 학생들은 뭘 하고 있죠?”
“날씨도 이 모양이니, 제대로 수업이 될 리 없지. 아마 며칠 간은 제대로 수업을 못 할 거다.”
“그럼 지금 기숙사는 미어터지겠네요.”
‘차라리 잘 됐어.’
섬 안에 아렌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더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학생들이 한데 모여있다면, 서로를 감시하는 셈이 되어 아렌은 더 안전해진다.
문밖에서, 경비병의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너. 왜 그렇게 침착해?”
“네? 제가요?”
“방금 사람을 죽였잖아. 정당방위든 아니든, 그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야?”
“침착하면 안되나요?”
학교 안에 배치되는 경비병이, 평소 살인사건을 접할 리 없다.
어쩌면 이번 사건에서 본 두 구의 시신이 경비병이 생애 처음 본 시체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어린데도 시체 앞에서 태연한 아렌이, 그의 눈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왜 이렇게 침착하냐면… 글쎄요. 목이라도 잘려본 적 있나 보죠.”
“-뭐라고? 목 잘린 사람을 본 적 있다고?”
방문을 사이에 두고 한 대화라 핀트가 어긋났지만, 아렌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제국의 황실에선 이런 살인이 일상인가 봐?!”
‘…듣고 보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네.’
아렌은 굳이 정정하기를 포기했다.
당분간은, 이런 좁은 방에서 바깥 구경이나 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렌도 반쯤 체념했을 때.
문밖에서 경비병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미켈 공 아니십니까?!”
“수고가 많으시군요.”
‘미켈 랜돌프? 왜 여기?’
“잠시 아렌과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제가 감시를 못 하게 됩니다만?”
“어차피 문은 밖에서 잠겨있죠? 문밖에서 잠깐 대화할 뿐입니다. 정 미덥지 못하시면 바로 근처에서 지켜보셔도 되고요.”
“…원래는 안되는 건데, 특별히 들어드리는 겁니다.”
랜돌프 가의 이름값은 여기서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경비의 발소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고, 방문 앞에 미켈이 섰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켈의 목소리.
“…정말 별일이 다 일어나는군. 넌 명색이 점술가라는 자가 자기 앞에 닥칠 일은 못 보는 건가?”
“어쩔 수 없어요. 자기에 대한 점은 안 치는 것이 불문율이거든요.”
“정말 얄궂은 일이야.”
문 너머에서 미켈은 한탄했다.
“카르도나 국제 학교의 유구한 역사 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전례는 없다더군. 이런 것의 산증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저도 연루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군. 이보다 훨씬 더 놀랐을 것 같았는데.”
“제국의 황실 안에서 겪은 일들이 얼만데요. 이정도야 사건도 아니죠.”
“누가 널 노렸는지는 짐작이 가나?”
“전혀요. 왜 절 노렸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제가 누군가의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죠. 아니면,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알려고 했거나요.”
“…알아선 안 되는 것?”
미켈 랜돌프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가령, 비 나그네에게 비를 내리는 능력을 부여한 건, 어떤 특별한 돌이었습니다. 전 그것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죠.”
“…뭐야, 그게 비 나그네가 가진 능력의 유래야? 넌 알고 있었잖아!”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만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직 부족해요. 이곳 도국에 더 자세한 정보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고요.”
“설마, 네가 카르도나 국제 학교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
“겸사 겸사죠.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에도 말해봤지만, 세밀은 비싼 값을 부르고 듀란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더군요.”
“그게 거짓말이라고 어떻게 단정하지? 정말 모른 걸 수도 있잖아.”
아렌은 확언했다.
“아뇨. 그건 정말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어차피 못 믿을 테니까 말해줄 순 없지만.”
표정을 읽고 속내를 짐작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뭔가 있어 보이는 화법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지금처럼 살인 누명을 쓴 경우에는 도리어 역효과 아닐까?”
“반대로 지금부터 태도를 달리하면, 제 태도가 달라졌다고 의심하겠죠.”
“…….”
미켈의 은근한 압박성 발언에도 아렌은 꿈쩍하지 않았다.
“세밀 메렌치와의 거래는 어떻게 됐죠?”
“말도 마. 세밀 메렌치가 네가 날 거쳐 대신 거래한다는 걸 눈치챘어.”
‘…저런.’
“아직 거래가 완전히 엎어진 건 아니지만, 세밀은 제법 기분 나빠하는 것 같더군.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차라리 듀란을 건드려볼까?”
“아뇨. 그녀는 정보를 팔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가도 달라질 건 없겠죠. 오히려 당신이 어떤 정보를 구하려 한다는 정보만 더 퍼질 거고.”
“…그럼, 레데의 정보상을 이용하면? 세밀이나 듀란만 못할 수도 있지만, 괜히 전문업자는 아닐 테니.”
미켈의 제안은 아렌으로선 뜻밖이었다.
“…본국과 연락하려면 집사의 협조가 필요한 것 아니었어요?”
미켈이 아렌에게 원하는 것은, 아렌이 집사 프리드먼에게 해준 점괘의 내용이었다.
아렌에게 점을 본 후 프리드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고,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미켈이 프리드먼을 통해 본국의 정보상과 연락하면, 프리드먼은 분명 그 이유를 물을 것이다.
미켈이 둘러대봤자 조금만 조사해보면 곧바로 들통날 게 뻔하다.
“…실은, 그것 때문에 왔는데.”
미켈은 문을 사이에 둔 채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프리드먼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아.”
*****
아렌이 놀라 소리쳤다.
“프리드먼이, 사라졌다고요?”
“적어도 숙소엔 없었어. 섬 곳곳도 살펴봤지만, 혼자선 역부족이더군. 태풍 속이라 수색이 쉬운 것도 아니고.”
아렌은 창밖을 봤다.
아름드리나무 윗부분이 크게 휠 정도로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선 수색도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프리드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어쩌지? 바다에라도 버려졌다면,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는데!”
외부인용 기숙사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살인. 실은 세 번째 살인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미켈이 걱정하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프리드먼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죠?”
“어젯밤에 본 게 마지막이지만, 프리드먼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안 게 방금 전이라 정확히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섬 안에 그밖에 사라진 사람들은 있나요?”
“글쎄. 그것도 본섬에서 조사관이 들어와야 확실히 조사해볼 수 있을 거야.”
‘…흠. 그렇군.’
이제까지는 누가 아렌을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윤곽이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말을 듣고 조금은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았다.
‘역시 점괘 때문이었나?’
아렌은 프리드먼에게 해준 점괘를 떠올렸다.
바다 위에서 타오르는 불, 전쟁, 그리고 미켈의 죽음.
앞의 두 가지는 환영으로 본 것과, 그에 대한 유추였지만 미켈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단지 프리드먼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아렌이 미켈이 죽을 거라 말했을 때 프리드먼의 반응은 전혀 생뚱맞은 것을 들을 때의 반응이 아니었다.
‘프리드먼은, 점괘가 아니라도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어.’
도시국가 레데가 주도하는 해전이 곧 일어난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겐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전쟁 점괘를 말했던 사람은 더 있지.’
“저기, 미켈. 혹시 괜찮다면-”
“뭐야?, 왜 말하다 말지?”
“-아니에요.”
방금 전까지 아렌은, 미켈에게 두 감독생, 세밀 메렌치와 듀란 우피치를 지켜달라고 말할 셈이었다.
만약 프리드먼이 살해당했고, 그게 전쟁 점괘 때문이라면 그녀들도 범행 대상에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만약 미켈이 범인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두꺼운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로는, 미켈의 의중을 전혀 파악할 수 없으니까.
“…태풍이 빨리 그쳤으면 좋겠군요.”
아렌은 창밖을 바라봤다.
거센 폭풍은, 좀처럼 그칠 기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