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렌이 미켈에게 한 제안은 간단했다.
집사에게 말한 점괘의 내용을 알고 싶다면, 세밀이나 듀란이 알고 있는 ‘어떤’ 정보를 가져와달라는 것.
둘 중 누구에게 부탁해도 상관없고,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상관없다.
미켈이 그 정보를 가져와 주기만 하면, 아렌이 집사 프리드먼에게 전해준 점괘와 맞바꾼다.
아렌이 원하는 것은, 비 나그네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
특히 그가 어떻게 그런 힘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아렌이 원하는 것을 미켈이 알고 있었다면 일은 한결 간단했겠지만, 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세밀과 듀란조차도 극비리에 다루는 정보를 미켈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레데 안에도 정보상은 있으니 서신을 보내면 어쩌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던 미켈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본국에 연락하기 위해선 프리드먼을 거쳐야만 한다. 아렌과의 거래도 프리드먼이 말해주지 않는 점괘 내용이 궁금해서였으니, 본국과의 연락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할아범이, 왜 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지 그 이유를 꼭 알아야겠어.’
미켈은 세밀 메렌치를 찾아갔다. 듀란 우피치도 거래 후보 중 하나였지만, 그녀는 항상 도서관 옥상에만 틀어박혀 있었기에 같은 감독생이라도 교류다운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세밀 그 여자와 친한 것도 아니지만.’
미켈은 세밀 메렌치를 인적이 뜸한 수풀로 불러냈다.
학원의 감독생 두 명이 나누는 대화는 학생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끈다.
“어머, 와 있었네? 날 불러내다니 무슨 일이지? 목검 휘두를 시간도 모자란 것 아니었나?”
“시끄러워. 어차피 서로 긴말 섞어봤자 좋을 것 없을 테니 용건만 말하지.”
세밀의 비아냥을 흘려넘긴 미켈은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어떤 정보를 사고 싶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랜돌프 가문의 도련님이 굳이 날 찾아올 이유야 그것뿐일 테니.”
“…….”
“그런데, 정보를 사는 건 미켈 랜돌프 개인이야? 아니면 랜돌프 가문의 공식적인 요청이야?”
“…내가 개인 자격으로 의뢰하는 거다. 가급적 가문에는 알리지 않아 줬으면 하는데.”
“흐음, 개인적 의뢰라. 나야 좋지.”
랜돌프 가문의 공식적인 의뢰라면 거래의 규모 역시 커지지만, 숨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공식적인 거래에서 가문이 아닌 세밀 메렌치 본인이 얻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미켈의 의뢰가 가문에 알리지 않는 개인 자격이라면 그것을 약점 잡아 훨씬 비싼 값을 부를 수도 있었다.
눈을 빛내는 세밀의 낌새를 눈치챈 미켈 랜돌프가 경고했다.
“어째 봉이라도 잡았다는 표정인데, 경고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손님으로 둘 거면 양심적으로 장사해야 할걸?”
학원 한 1500명 학생 중 단 세 명만이 뽑히는 감독생이면서, 도국 유력 가문의 후계자.
세밀과 미켈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유념하지. 그래, 가문에 직접 알리지도 않고 얻으려는 정보가 대체 뭐지?”
세밀의 물음에 미켈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순전히 호기심으로 묻는 건데.”
“호기심 때문에 가문에도 비밀로 하고 거래를 해?”
“…비 나그네에 대해 알고 있지?”
미켈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항. 아렌이 시킨 거야?”
“…….”
미켈에게 거짓말하는 재능은 없었다.
어차피 금방 알려질 거짓말.
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랜돌프 가문의 후계자가, 제국인의 심부름을 하는 거야?”
“심부름이라니. 거래관계, 라고 해둘까?”
“하지만 말야. 아렌 녀석, 이미 나한테 한번 찾아왔었단 말야. 굳이 너를 통하는 것보다 나와 직접 거래하는 게 낫지 않나?”
“글쎄. 네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라도 부른 모양이지.”
세밀 메렌치는 고개를 저었다.
“비싸다니. 원래 상품은 상대방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딱 적정가라고.”
“적정가라서 아렌 그 녀석이 너한테서 안 사고, 날 통해 우회하려는 건가?”
“…아렌 녀석은 미련한 짓을 했어. 거래란 원래 중간 상인을 거칠수록 값이 더 오르지. 상업의 기본이잖아? 아렌은 스스로 더 비싸게 사는 방법을 택한 거라고.”
“시세가 안정된 시장일수록 그렇지. 하지만, 세밀 네가 취급하는 상품에 정해진 ‘시세’라는 게 있나?”
세밀이 아렌에게 요구한 건, 제국 안 황실의 내부 정보.
아렌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렌은 세밀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없어도 미켈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다.
고도로 상업화된 시장일수록 중간과정에서의 단가가 올라가지만, 원시적인 물물 거래에서는 거래를 거듭하는 동안 도리어 이득을 보기도 한다.
미켈이 지적한 것도 그 부분이었다.
‘…메렌치 가에서 취급하는 고급 정보가, 그런 원시적인 물물교환과 같은 취급이라고?’
아렌과 미켈에게 조롱의 의도는 없었겠지만, 세밀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너한테는 양심적으로 거래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착각하지 마라.”
미켈의 표정이 굳었다.
“원하는 건 단지 거래일 뿐이야. 거래를 제안한다고 네가 우위에 서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착각이다. 네가 가격을 제시하면 내가 거래를 고민한다. 단지 그것뿐이야.”
“내가 할 말이야, 미켈. 난 돈을 내면 무조건 음식이 나오는 식당이 아니거든.”
둘의 기싸움은 평행선을 달렸다.
서로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먼저 물러선 건 세밀이었다.
“…그만두자. 우리끼리 이러는 게 의미 있어? 전부 아렌 그 녀석 때문에 생긴 일인데.”
“동감이야. 애먼 기 싸움은 그만두자고.”
“그런데, 그 당사자께서는 어디에 있지?”
세밀의 물음에 미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렌 녀석은, 따로 할 게 있다더군.”
*****
아렌이 카르도나 국제학교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곳에 있는 사용인들의 점을 대부분 봐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주인에 대한 정보들도 많이 모였다.
정보로는 대륙 전체에서도 명성 높은 메렌치, 우피치 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렌 역시도 점괘를 빙자한 정보 수집을 일평생 해온 몸.
황궁 안에서 활약했던 아렌의 정보수집법은, 그대로 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국제학교, 자연과학동.
건물의 3층 외곽에는 쓰이지 않는 빈 교실이 있었다.
여학생 둘이 그 앞에 서서 망을 보고 있었다.
“두명 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짐이라도 있는 건가? 우리가 들어줄까?”
안면 있는 남학생 셋이 순전히 친절로 그녀들에 접근했다.
빈 교실 앞을 막고 있는 여학생들은 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다가오지 마세요. 물러서요.”
“지금 교실 안에서 치마를 벗고 있단 말이에요.”
“치마 밑단이 뜯어져서 수선하는 중이에요.”
“설마 여학생의 맨다리를 우격다짐으로 엿보려는 건 아니겠죠?”
두 여학생이 쏘아붙이자 남학생 둘은 단숨에 사색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났다.
“무, 무슨 소리야!”
굳이 괜한 오해를 무릅쓰면서까지 오지랖을 부릴 사람은 없다.
두 여학생이 사용하지 않는 교실 앞을 지키는 동안,
아렌은 빈 교실 안에서 창문을 모두 가려, 마치 암실처럼 꾸며둔 채 한 여학생의 점괘를 보고 있었다.
‘좋네. 원래 분위기도 나고. 자고로 점을 볼 땐 이래야지.’
도국 카르도나에 들어온 후, 아렌은 이렇게 본격적인 분위기 속에서 점을 친 적이 없었다.
도국연합은 실용주의적인 학문이 발달한 만큼, 전반적인 미신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의 총아라 자부하는 이곳 카르도나 국제 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 미신에 흠뻑 빠졌다는 건, 되도록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암실 안에서 아렌은 쓰게 웃었다.
‘그래봤자, 결국 호기심 많은 한 명의 사람일 뿐이지.’
아무리 지식과 이성으로 무장한다 해도, 미래를 알고 싶다는 본능은 인간이 최초로 모닥불을 놓고 둘러앉았던 시기부터 이어져 온, 태초부터의 본능이었다.
아무리 이성과 합리로 미신을 억압하려 해도, 억압은 압력으로 작용해 약해진 구석을 비집고 빠져나온다.
남은 건, 아렌이 미리 학원생의 고용인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적당히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당신, 혼약자가 있군요? 하지만 당신 본인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요. 맞나요?”
“세상에! 어떻게 알았죠?”
아렌 앞의 여학생은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만을 쏟아냈다.
“아버님도 무심하시지! 머리는 반쯤 벗겨지고, 조금 투실투실한데다 심지어 나랑 열두 살이나 차이 난다니까요?! 너무하지 않나요?”
“…흠.”
“어때요? 역시 저와 별로 궁합이 좋지 않죠?”
여학생은 이미 마음 속의 답을 내린 채 아렌에게 물었다.
“그게… 실은 그리 나쁘게 나온 건 아니에요.”
“…네?!”
“혼약자 되는 분은 외모도 별로고 나이도 많지만, 성품도 뛰어나고 아내에게 소홀할 사람은 아니에요.”
‘실은, 그쪽 하인이 한 평가지만 말야.’
이미 여학생은 자신의 약혼자에 안좋은 선입견이 있었다.
이런 경우 사람의 됨됨이는 이미 선입견이 씌워진 본인보다, 한발자국 떨어진 주변 인물이 더 잘 보는 법이다.
“힝, 뭐야. 궁합이 괜찮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궁합이 괜찮다는 말이 꼭 결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선택하든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이제는 본인이 선택할 일이죠.”
그녀가 정말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안의 모든 지위를 저버릴 각오만 있다면 혼약을 파기하고 집을 나오면 그만이다.
아렌의 점괘는 여학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그녀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태도로 환심을 샀다.
여학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역시, 시내의 다른 점쟁이와는 확실히 다르네요.”
‘그야 당연하지.’
이제 막 철이 들었을 때부터 황가의 사람들을 입으로만 구워삶았던 아렌이었다.
시내의 점쟁이들은 다시 만날 일 없는 손님들에게 한탕 장사를 하면 그만이지만, 아렌은 계속 얼굴을 맞대면서 한순간 실수하면 목이 달아나는 자들에게 세 치 혀로만 그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
점괘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의 환심을 사는 건, 아렌의 장기 중 장기였다.
‘미켈이, 과연 비 나그네의 정보를 잘 가져올까?’
확신은 없다.
가능성은, 잘 해봤자 절반.
‘…그렇다면.’
아렌은 학원 안에 독을 타기로 했다.
“…어라?”
“왜 그러시죠?”
“샨테 양의 집은, 분명 헬데움에서 밀 유통업을 하죠?”
“그저 조그만 상회일 뿐이죠. 최근에야 다른 곡물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건 믿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아렌은 먼저 운을 뗀 뒤 천천히 말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집안의 사업이 크게 위축될지도 몰라요.”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그게, 점괘가 모호해서 확답은 못하겠어요. 군데군데 이미지로만 유추해봤을 때, ‘불’과 ‘배’가 관련 있어요.”
“설마, 화재?!”
“확실하지는 않아요.”
아렌은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경고를 계속해서 남겼다.
“월렛 양 집안의 사업 확장은, 미루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확실히 흉조에 가까워요.”
“운세를 사계절로 치자면 초겨울에 진입했어요. 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면 제법 혹독할지도 모르겠네요.”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꺼내진 않는다. 하지만 곧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암시는 계속해서 뿌려뒀다.
아무리 아렌의 점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고작 점괘 하나로 가문의 사업을 완전히 위축시키진 못한다.
‘…하지만, 열 걸음 확장할 사업을 여덟, 아홉 걸음으로 줄이기만 해도 충분해.’
중요한 건 한순간 망설였다는 ‘경향성’이었다.
아렌의 점을 본 학생들은 조금만 더 조심하자는 핑계로 사업 확장을 늦췄고, 그건 마치 그들이 어떤 징조를 보고 같은 행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소문에 재바른 누군가는 전쟁을 눈치챌까?’
설령 진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렌이 학교에 남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불온한 공기가 남아 있으면 된다.
사람은, 불안할수록 미래를 엿보고 싶어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