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다 같은 정보처럼 보이지만, 정보 사이에도 차이와 우열은 존재했다.
가령 헬데움의 메렌치 가문이 취급하는 정보는 소문이나 낭설같은 가십, 휘발성 높은 정보들.
그래서 다른 정보보다 빠르게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부정확하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카르도나의 우피치 가문은 서적과 보고서에 기록된, 상대적으로 검증된 정보만을 취급했다.
메렌치 가문의 정보보다 느리지만, 그만큼 정확도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렌이 가진 정보, 점괘는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조차도 미리 이야기해준다.
물론, 그걸 믿는 사람에게 한정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아렌의 점괘는 듀란 우피치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듀란은 말했다.
“아렌 당신은, 어찌 됐건 내가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이유는 고작 점괘 하나 때문이고?”
“고작이랄 것까진 없겠죠. 제 점괘라 항상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두 눈으로 본 것만큼은 믿으니까요.”
“…그 정도면 거의 확신하는 것 아녜요?”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도 완전한 진실은 아니잖아요? 잘못 봤다거나, 착각하거나 하니까.”
“…….”
보통의 경우라면 듀란이 아렌의 말을 안중에 둘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렌이 말한 것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일이다.
“전쟁이라… 정말 그 정도로 확신한다고요?”
“저는 그렇다 확신하지만요.”
듀란의 반응을 보면, 우피치 가문의 사람조차도 전쟁의 징후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아렌은 물었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제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방금 듀란은 서적에 적힌 확실한 정보만 취급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때로는 덜 정확하더라도 빠른 대응이 필요한 정보도 있을 거예요. 가령 헬데움의 메렌치 가문의 정보라든가. 카르도나는 그런 정보들은 모두 다 무시하는 건가요?”
직접 메렌치 가문을 이야기하자 듀란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물론, 저희 가문도 책에 없는 모든 정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남들이 뜬 소문에 과민반응할 동안, 우리는 확실히 검증하는 것에 가깝죠. 결과적으로 남들보다 느리게 움직일 때도 분명 있겠지만, 반대로 불필요한 행동을 방지하기도 하죠.”
카르도나의 메렌치 가문이 그러모으는 정보들엔, 당연히 거짓 정보도 많이 섞여 있다.
수많은 소문 중 무엇이 믿을만한지 가려내는 것도 메렌치 가문의 역량 중 하나였지만, 그 정보의 정확성이 우피치 가문의 것보다 뛰어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우피치 가문은 다른 도시나 가문이 헛발질하는 동안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본다.
‘느린 건, 느린 것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건가?’
세밀 메렌치와 마찬가지로, 듀란 우피치 또한 아렌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세밀은 황가의 기밀 정보라는, 아렌이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했고 듀란은 아예 정보의 존재 자체를 숨겼으니.
‘…여기 있는 게 제1 황자 라이안이었다면 훨씬 쉽게 정보를 알아냈을까?’
그가 왜 대부분의 시간을 도국 국경 근처에서 보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제국 안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운명석에 대한 정보마저도, 도국 안에서는 곧바로 찾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말이다.
‘장래를 위해서라도 메렌치 가나 우피치 가, 둘 중 한 곳과는 친분을 맺는 게 나을까?’
아렌은 듀란 앞에 늘어놓은 카드를 정리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방이 유리로 된 방 안에는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이 놓여 있었지만, 이곳은 햇빛이 바로 들어오는 남향이라 밝아도 너무 밝았다.
“햇볕이 강한 곳은, 책에 별로 좋지 않을 텐데요?”
아렌의 말처럼 너무 강한 빛은 책을 상하게 한다. 유리 벽 하나로만 막힌 곳이니 습기나 온도변화 또한 철저히 관리될 리 없다.
아렌의 오지랖에 듀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여기엔 망가져도 되는 책만 가져온 거니까. 낡은 책은 언제고 다시 활자를 맞춰 찍어내면 되거든요.”
‘…그러시겠지.’
이곳은 밝아도 너무 밝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아렌 자신의 눈이 아파올 지경. 사방이 유리로 되어선지 야외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빛을 강하게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얼른 내려가려던 그때.
“…어라?”
비틀.
순간 너무 많은 빛을 받은 듯 시야가 환해졌고, 동시에 아렌의 발밑이 흔들렸다.
‘-현기증인가?’
그리고 시야가 둘로 나뉘었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정원 안쪽 유리방의 평화로운 시야와, 정원은 불타고 유리벽은 박살이 나 흩어지는 또 다른 시야.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니야.’
아렌은 비틀거리지 않도록 책장을 붙잡고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다시금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게끔.
“왜 그러죠, 아렌? 갑자기 비틀거리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개로 겹쳐 보이던 시야는 어느새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도 환영, 인가? 하지만 이렇게 뚜렷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야.’
처음엔 단순한 예감이었던 것이, 이제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 또렷한 환영이 되었다.
아렌은 비틀거리던 몸을 다잡고 몸을 세운 후 그녀에게 말했다.
“실은, 괜히 악담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꼭 말씀드려야겠군요.”
“이제까지가 예의를 차린 거였다고요? 정말?”
어이없어하는 듀란.
아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옥상의 정원은 불타고 도서관은 무너져내릴 거에요.”
“…….”
듀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렌은 울창한 도서관 옥상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
‘정말, 카르도나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건가? 이번만큼은 좀 편하게 있고 싶었는데.’
아렌이 본 환각은, 아마 높은 확률로 실제 일어나는 사건이다.
평생을 신기 따위 없는 점술가로 살아온 아렌으로선 여전히 적응되지는 않지만.
아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교내를 걸었다.
“아, 아렌이군요. 안녕하세요.”
“아렌 군? 수업은 따라갈 만한가요?”
“이봐, 점이 꽤나 용하다면서? 어디 나도 한번 봐볼까? 심심풀이 삼아서!”
이제 학교 안 어디를 가나 아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특히 말을 거는 학생 중 절반 정도는 아렌도 처음 보는 학생들일 정도였다.
아렌은 어딜 가나 인기인이었고, 그건 아렌과 같은 날 입학한 학생에게는 다소 못마땅한 일이었다.
“…너와 나, 이 입장 차이는 뭐지?”
얼굴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한 귀족 도련님, 몰트 치가렌은 부아가 치미는 듯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이상하지 않아? 아마 나랑 같은 수업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 내 이름도 제대로 모를걸?”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시더군. 돈이나 지위는 국경을 몇 번만 넘어도 못 쓰게 되는데, 배워놓은 기술만큼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그게 지금 상황에 쓰일 말인가?”
몰트 치가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렌이 물었다.
“그런데, 왜 따라오는 거야?”
카르도나 국제학교에선 반의 개념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들으면 그만.
그리고 몰트와 아렌은 서로 수업이 겹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점심 시간.
“…설마, 아직도 친구가 없는 거야?”
“친구가 없다니! 아직 서로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야!”
“이제 입학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크흠!”
몰트는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무마했다.
“하긴, 학교에선 배울 거나 배우고 나가면 되니까, 굳이 친구를 만들 필요도 없겠지. 나도 없어, 친구는.”
“그, 그렇지? 역시 나만 이상한 건 아니지?!”
몰트 치가렌이 아렌에 강하게 붙었고, 아렌은 다시 그와 거리를 벌였다.
아렌과 몰트와 달리 친한 사람이 없다고 서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굳이 지금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어이! 아렌!”
“…또야?”
복도 앞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덩치와 그를 보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을 내리는 몰트.
다가오는 덩치 큰 학생의 팔에는 푸른색 완장을 차고 있었다.
미켈 랜돌프. 서부 해안의 패자인 레데의 유력가문 랜돌프 가의 차남이었다.
“또라니, 뭐가?”
“또 감독생이 널 찾아오잖아? 세밀 메렌치에 이어, 미켈 랜돌프까지. 이러다 듀란 우피치까지 만나보는 것 아냐?”
“아니, 듀란은 그쪽이 아니라 내가 직접 찾아간 건데?”
“…벌써 만나본 거야? 그럼 이미 감독생 셋을 전부 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몰트는 차마 감독생 앞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는지 알아서 비척비척 물러났다.
아렌의 앞에 온 미켈은 벌써 저만치 멀어진 몰트를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저런. 친구를 놀라게 한 건가?”
“친구? 아닌데요?”
“…같이 식당 가던 것 아니었나? 매정한 자식이군.”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켈은 아렌에게 몇 번이고 접근했다.
소식에 능한 세밀 메린치가 아렌에 관심을 보인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아렌과 대련을 해보고 싶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괜찮다면, 같이 대련이나 하지?”
그리고, 이번에도 대련 권유가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싫은데요? 이곳은 습해서 가급적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대부분의 도국은 항구도시. 특히 카르도나는 시가지의 절반 이상이 침수된 수중도시였다.
이곳 카르도나 국제학교도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지형.
바람은 항상 습기를 머금어 조금만 움직여도 교복 안이 땀에 찼다.
“사실 대련은 반쯤 핑계고, 할 이야기도 있으니 겸사겸사 어울려다오.”
하지만 미켈은 얼굴을 굳이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 태도에는 과연 아렌도 더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아렌과 미켈은 곧바로 섬의 뒤쪽, 부두의 반대편에 마련된 작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을 포함한 2시간의 쉬는 시간이었지만, 학교 안에서 몸을 움직이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연무장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 가만히 앉아 햇빛을 쬐거나, 식당의 밥을 가져와 식사하는 학생들 뿐이었다.
“자, 받아라.”
미켈은 연무장의 보관함에서 목검 두 자루를 가져와 하나를 건넸다.
아렌은 무의식적으로 목검을 받았다.
“…역시 너, 다룰 줄 알지?”
“저에 대해 아세요?”
“아니. 모르지. 하지만 잡는 자세만 봐도 대강의 실력은 가늠할 수 있는 법이야.”
그리고, 예기치 않은 일격이 아렌을 향했다.
큰 곡선을 그리며 옆에서 날아온 목검을, 아렌은 가까스로 받아냈다.
-딱!
“거 봐라. 금방 반응하잖아?”
“아니, 이것도 겨우 막은 건데요? 대체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됐고, 더 간다!”
미켈의 공격은 매서웠다.
제9 황자 테오드릭과도 별반 차이 없는 거구에, 실력 역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출중했다.
적당히 손대중한 공격임에도 아렌으로선 방어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느 정도 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군.”
하지만 미켈은 공격을 전부 막아낸 아렌의 실력에 더욱 놀란 듯했다.
“어디, 그럼 이것도 한번-”
“아니, 잠깐만! 저한테 할 말이 있다지 않았습니까?!”
“아, 할 말. 있었지.”
미켈의 정신이 완전히 대련으로 팔리기 전에, 아렌은 겨우 원래 목적을 상기시켰다.
미켈은 다시금 적당히 손대중을 한 목검을 날리면서 물었다.
“…우리 집사가 너에게 신세를 졌다고 들었다.”
“신세, 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미 프리드먼에게 들었단 말이다.”
“…….”
딱, 따닥!
약간의 침묵 속,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갔다.
미켈은 아렌에게 모든 것을 이미 들었다고 말했지만, 아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건, 거짓말이군. 프리드먼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어.’
도시 간의 전쟁은 물론, 미켈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미켈 본인에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미켈은 단지 프리드먼의 심상치 않은 반응을 느끼고, 아렌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한번 떠보려는 것일 뿐이었다.
아렌은 적당한 간격으로 날아오는 목검을 막고 피하면서 물었다.
“미켈 공은, 점술을 믿으십니까?”
“…이 학원 사람들에겐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갑판 위의 사내들은 원래 미신을 믿는 법이지.”
“그러면 제가 제국에서 꽤나 유명했던 점술가인 것도,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받아들이시겠군요.”
“대단하군, 그 어린 나이에.”
휙!
공격이 느슨해지자 아렌의 목검이 미켈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미켈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제가 집사에게 한 얘기는 미켈 공 본인의 점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오, 내 점괘를! 어떤 점괘였지? 본인인 나는 당연히 들을 자격이 있겠지?”
“맨입에요?”
“…….”
정 궁금하다면 굳이 아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집사에게 물으면 된다.
굳이 아렌에게 묻는 건, 주인인 자신조차도 절대 프리드먼에게서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켈 랜돌프. 세밀과 듀란에 이은 세번째 감독생.’
방어에 소홀해진 틈을 타, 아렌의 목검이 미켈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다.
“기본적으로 점괘는 의뢰한 분에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 궁금하시다면, 저와 거래하시지요?”
미켈은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춘 목검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거래라고?”
“네. 감독생인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프리드먼의 태도가 예전과 다른가. 궁금하시겠죠?”
“…….”
잠시간의 침묵.
하지만 아렌은 이미 미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