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숲?”
도서관 옥상 문을 열었을 때 아렌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숨 막힐 듯 펼쳐진 짙은 녹음이었다.
흙이 깔린 바닥에서 위로 뻗어 올라간 나무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쳐 있었지만, 그 모습은 옥상의 높다란 담에 가로막혀 도서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옥상 위에 오르자 비로소 보이는 울창한 정원에, 아렌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 건물 옥상 아니었나?’
정글을 연상케 할 만큼의 나무와 식물이라면 바닥에 야트막하게 깔린 흙으로는 절대 지탱할 수 없다.
흙을 깔아도 썩지 않게끔 어떻게 배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도서관에서 습기는 가장 신경 써야 할 적이었다.
다른 도서관에서는 어떻게든 습기를 조절하기 위해 안달이었는데,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카르도나 국제도서관의 옥상에는 오히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정원이 있다.
‘…아니면, 반대로 정원이 건물의 습도를 조절해주는 건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공학이 적용되었다거나.’
그거야 아렌도 모를 일.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옥상 한중간, 무성한 녹음 한가운데 유리로 만들어진 방이 있었다.
유리방 안에는 사람 키만한 책장이 사방으로 둘려 있었고, 그 중앙에는 원형 탁자와 그 위에 겹겹이 쌓인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 쓰러질 듯 위태롭게 올라간 책들 사이에서 태평하게 책을 읽는 인물.
아렌이 유리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귀밑에서 끊어지는 짧은 머리에, 아렌보다도 한두 살은 더 연하로 보이는 외모.
하지만 아렌이 미리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아렌보다도 다섯 살이나 많았다.
그녀가 바로 지식의 도시 카르도나를 지배하는 유력가문의 차녀, 듀란 우피치였다.
‘그런데, 날 모르나? 그동안 꽤나 알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렌은 이미 학생들의 고용인 사이에서 나름대로 화제인 인물이었다. 사용인을 통해 학생들에게도 점점 아렌의 이름은 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렌과 같이 입학했던 귀족 도련님, 몰트 치가렌은 점점 소외되는 것 같았지만.
일반 학생이라면 아렌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주변의 모든 정보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헬데움의 유력가문 출신인 세밀 메렌치는 이미 아렌을 훤히 알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듀란이 아렌을 모르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아렌의 생각이 표정에 드러난 것일까.
듀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라. 혹시 제가 알아보지 못해 실망했나요? 하지만 그래봤자 아직 책에도 올라가지 않은 인물일 뿐이죠. 그 말은 제가 몰라도 하등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고요.”
그녀는 일축했다.
‘…‘박제된 지식의 도시’ 출신이라 그건가? 이름값은 한다만 그래선-’
“-그래서는, 이곳 학생들 태반은 기억할 필요 없는 사람들 뿐일 텐데요.”
“제가 한 말이 바로 그 말인데요?”
“…”
“학생들의 절대다수는 기억할 노력조차 아까운 자들이에요. 당신 이름도 마찬가지겠죠. 가르쳐주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금방 잊을 테니까.”
그녀는 아렌에 돌렸던 시선을 다시 책으로 내렸다.
“옥상 문이 열려 있었나 보죠? 하지만 열린 문이라고 모두 환영을 의미하는 건 아니죠. 제게 용건이 있어도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전, 제국의 제 12황자 레온나토스의 비서관인 아렌이라 합니다.”
“레온나토스라. 제국의 보고서에서 읽어본 적 있는 이름이군요. 그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은 필시 번영하겠죠. 저희도 그리 나쁘진 않을 테고요.”
제국과 도국연합은 암묵적인 경쟁 관계.
제국의 발전은 도국 연합에게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결과지만, 이웃한 초강대국의 황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이 앉는 것에 비할 수는 없다.
유능한 자라면, 그만큼 말이 통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네. 전하께서도 도국과의 관계 개선은 무척 신경 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알았어요. 그래서 어쩌란 거죠?”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레온나토스, 그 부하인 아렌에게 잘 해줄 이유는 역시 없는 듯했다.
“…책에 적혀 있는 정보라면 당신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낫다고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카르도나의 차기 지도자로 낙점된 분이라니까요.”
팔랑, 듀란은 무심한 듯 책장을 넘겼다.
“글쎄요. 확실히, 제게 당신을 도와줄 능력은 있겠죠. 크게 어렵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도와줄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돕는 것, 그 사이의 간극은 커요.”
“…감독생이잖아요? 다른 학생의 고충을 들어줘야 하지 않나요?”
“그런 건 알량한 권위를 대가로 봉사하기를 자처하는 멍청이들에게나 직접 청해보시죠? 가령 랜돌프 가문의 둘째 자식이라거나.”
듀란 우피치는 다른 감독생들도 싸잡아 비난하면서, 아예 세밀 메렌치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렌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세밀 가문의 장녀에게 물어보는 건 괜찮나요? 그녀도 분명 감독생이었죠?”
“…괜한 헛수고를 굳이 하려면 말라지는 않겠어요.”
“헛수고라고요? 왜죠?”
“메렌치 가문은 자신들이 취급하는 걸 정보라 착각하고 있죠. 사실은, 정보의 부스러기일 뿐인데. 식탁 위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아무리 그러모아 봤자 한 사람의 허기도 제대로 만족시킬 순 없어요. 그런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이 입 밖으로 흘린 것에 흥분하는 변태 정도겠죠.”
듀란의 태도가 부쩍 신랄해졌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아주 잘 알았다. 아렌은 대답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정보의 부스러기만 갖고 있다는 세밀 메렌치는 제가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다고 하던데요?”
“정말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겠죠. 그런 실수야 하루 이틀이 아닐 테니까.”
이제 듀란으로선 아렌의 제안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들어주지 않은 부탁을 세밀 메렌치가 들어주면, 그건 개인을 넘어 우피치 가문 자체의 위신에도 영향이 미치니까.
“…우선, 들어나 보죠. 원하는 건 무엇에 대한 정보죠?”
“제가 섣불리 말했다가, 질문을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죠.”
아렌은 일단 한발 물러섰지만, 듀란은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기세로 물고 늘어졌다.
“절 믿지 않으면 애초에 제게 질문할 필요도 없겠죠. 제가 무슨 대답을 하든,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보증은 저에 대한 신뢰뿐이었을 테니까. 아닌가요?”
“…하는 수 없네요.”
아렌은 어쩔 수 없는 ‘척’하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전 비 나그네라는 자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자세한 유래와 함께요. 가능한가요?”
듀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쉽군요. 그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정보에요.”
“아… 그래요?”
‘거짓말이군.’
도서관을 통하는 수많은 책을 모두 섭렵한 듀란 우피치조차도 아렌이 표정으로 사람의 심중을 헤아린다는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렌은 그녀의 거짓말을 쉽게 간파했다.
‘…그 말은 이곳 책 어딘가에 운명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는 말이군. 그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고.’
짐작이야 하고 있었다.
세밀 메렌치도 듀란과 비슷한 반응이었으니까.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고급 정보이니만큼, 다른 이들에게 섣불리 말해주는 건 꺼리는 모양이었다.
‘제국 안에서는 운명석에 대한 서적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어.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시킨 것처럼.’
아렌은 듀란에게 물었다.
“방금한 말, 사실인가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런걸요?”
듀란은 그 말 한마디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렌이 막아 세웠다.
“방금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제가 점괘를 봐서 판단해도 될까요?”
“점괘?”
아렌의 말을 듣자마자 듀란은 눈가를 찌푸렸다.
‘정말 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
“당신, 진지하게 점괘 같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요.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점으로 확인한다고요? 그걸로 확인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거죠?”
“당신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근거가 될 순 있죠.”
“아뇨. 점괘 같은 속임수는 절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없어요.”
“책에는 점술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지 않나 보죠?”
“적혀있죠. 허황되고, 쓸모없고, 거짓이라는 내용이.”
“하지만 점술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전부 부정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건…”
아렌의 말이 맞았다.
듀란이 읽은 책들은 대부분 점술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렸지만, 그것이 ‘모든’ 평가 내용은 아니었다.
소수지만, 점괘에 대한 우호적인 내용도 분명 있었다.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든, 결국 당신이 원하는 내용만을 취사선택하는 거겠죠.”
“대체 무슨 소릴!”
“아닌가요? 모든 책에 같은 내용이 적혀있진 않겠죠. 서로 상반된 내용이 적힌 적도 많을 거예요. 그럴 땐 어떡하죠?”
책 안의 정보만을 추종한다는 듀란의 말조차도, 결국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것일 뿐이 아니냐는 아렌의 말.
“그땐 당연히, 다른 사료들을 모두 가져와 면밀한 교차검증을 거쳐야죠. 그렇게 개인의 판단으로 허술하게 결정되지 않아요!”
“다행이네요. 그럼 제 ‘점괘’도 마찬가지로 교차검증해봐야겠네요. 직접 경험으로 말이죠.”
“…점술가 아니랄까 봐, 말은 청산유수로군요.”
듀란은 무릎 위 올려둔 책을 내려놓고 아렌의 앞에 반듯이 앉았다.
“하지만, 일리는 있어요. 어디 그 점술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요?”
*****
아렌은 우피치 가문의 영애 앞에서 하나씩 카드를 뒤집었다.
주변 환경은 여러모로 아렌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듀란은 점술에 대해 전혀 믿지 않았고, 아렌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다.
야외에 놓인 유리로 된 방 또한 너무 밝아서, 점술에 어울리는 극적인 분위기로 몰고 가기 힘들었다.
‘…너무 밝아서 표정 읽기도 힘들고. 이럴 땐 신변잡기를 떠보는 것도 힘들겠어.’
아렌은 보여주기식으로 뒤집어놓은 카드를 주시하다 천천히 말했다.
“곧, 도국연합 사이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을 겁니다.”
“…그건, 제국 황자의 비서관으로서 하는 말입니까?”
점괘를 믿지 않는다는 듀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실 점괘가 아니라, 제국이 얻어낸 정보를 점괘의 형식을 빌려 은연중에 전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
“그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점술가로서 전해드리는 의견입니다.”
“…점괘는 대부분 모호하다고 하죠. 어떤 식으로든 짜 맞춰 해석할 수 있고, 빗나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게끔. 그런데 전쟁이라는 큰 사안을,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나요?”
“방금 나온 점괘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렌에게 가진 패가 이것뿐이니 하는 수 없었다.
전쟁은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선 일어나지 않았던, 급작스러운 사건.
어쩐지, 최근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 알아낸 정보로 점괘를 말하는 빈도가 부쩍 줄어든 기분이었다.
‘아마, 내 행동으로 역사가 많이 바뀐 것도 영향이 있겠지.’
그 대신이랄까, 최근 아렌에게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국가 간의 무력충돌 역시 그 시작은 불타는 바다의 환영이었으니까.
“미래의 정보라. 얼마 후의 미래죠? 5년? 10년? 그 사이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면 당신의 말이 맞다는 건가요?”
듀란이 날카롭게 짚었다.
전쟁은 언젠가는 일어나게 되어있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친 도국 또한, 제국처럼 강대한 외부세력과의 다툼을 제외하면 항상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설령 1년 뒤에 무력 충돌이 있어도, 듀란이 ‘공교로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는 사건.
“걱정 마시죠. 전쟁은, 제가 카르도나 국제학교에 있는 동안 일어날 테니까요.”
“…그래요? 그럼 방금 점괘를 빗나가게 하려면 당신을 어떻게든 빨리 졸업시키면 된다는 말이네요?”
아렌의 점괘를 믿으면 도국 사이의 전쟁을 막고 싶다면, 아렌이 원하는 것을 들려주고 빨리 졸업시키면 된다.
점괘를 믿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아렌을 학교에서 내보내는 편이 점괘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빨리 증명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든 아렌에겐 만족스러운 결과.
“…야비하네요.”
“칭찬 고마워요.”
아렌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