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세밀 메렌치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렌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국제학원의 외곽, 바다 중앙의 성벽이 보이는 바닷가에 있었다.
“뭐야, 날 기다리고 있었어? 어떻게 알고?”
“저도 여기서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요. 그 정도는 알아야죠.”
점괘를 빌미로 사람들의 정보를 캐내는 건 아렌도 황궁에서 자주 하던 것이었다. 감독생 쯤이나 되는 사람의 평소 동선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아렌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내 평소 동선까지 파악하고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네. 전에 도서관에서 한 말,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네가 찾아야 할 건 그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를 알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자면, 메렌치 가문의 장녀 세밀, 본인과 같은 사람 말이다.
“사실은 저도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당신들은 어떻게 그 많은 정보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거죠?”
“모든 걸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일단은 인력, 이라고 얘기해둘까?”
‘인력이라.’
1만명 이상의 밀정을 다룬다는 헬데움 출신 다운 이야기였다.
그간의 대화로 비추어 봤을 때, 운명석에 대해 세밀도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0만권의 서적 사이를 뒤지는 것보다는 눈앞의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빠르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대가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럼 만약에, 당신에게서 정보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별 것 아닌 정보라면 간단하게 돈을 받겠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건 아니겠지?”
세밀은 바다를 향해 놓인 벤치에 앉고 말했다.
“정보. 네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값은, 그에 상응하는 정보로 받겠어. 어때?”
“…….”
마침 아렌은 제국의 황실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자였다. 그녀로서 궁금해할 정보가 아렌에겐 한가득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론, 내가 하는 일과 그리 다르지도 않아.’
아렌이 점괘의 복채로 정보를 받는 것과, 그녀가 하는 일은 꽤 유사한 지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관계는 아렌이 갑이었던 전과 달리 을에 더 가깝다.
“정보의 값을 정보로 받는다면, 그 정보의 경중은 누가 정하죠? 제가 받았던 것보다 더 비싸게 지불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문제야.”
‘…역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이쪽인 이상, 저쪽의 제안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미 그녀는 아렌이 운명석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전 메렌치 가문이 만족할만한 정보를 줄 수 없는 걸요?”
“그래? 차기 황권이 유력한 황자의 최측근이면서. 황궁 안 헬데움의 밀정이 얻을 수 없는 정보들도 쌓을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을 텐데?”
“그것들만은 알려줄 수 없으니까요. 공무라면 또 모르겠지만, 정보를 사려는 이유가 제 개인적인 용건이라서. 황궁 안의 이야기는 할 수 없어요.”
“그렇게는 안 봤는데, 제법 의리가 있네. 정보원으로선 결격 사유지만.”
그녀는 벤치에서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정보를 뱉지 않는 아렌은 그녀에게 길가의 돌맹이보다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만약, 출처를 말할 수 없는 정보라면 값을 매길 수 있나요?”
세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장난해? 출처는 정보가 가지는 최소한의 신용이라고.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정보는 시세를 모르는 동전과 마찬가지라고. 그걸 사용할 수도, 거래할 수도 없으니까.”
“…아쉽네요. 저 개인적으론 꽤나 신빙성 높은 정보라 생각하는데.”
“그거 설마, 점괘야?”
“…….”
“후훗!”
세밀이 웃음을 터트렸다.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고, 어이없어서 터트린 웃음에 더 가까웠지만.
“네 점괘를 믿는 사람이 학교 안에 많아졌다고, 설마 나까지 그런 미신을 믿는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사실은, 조금은요?”
“…뭐?”
“사실은 당신도, 제 점괘가 ‘진짜’인 건 아닌지 반신반의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더 날카롭게 반응하는 거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렌은 세밀을 더욱 몰아붙였다.
“어느건 미신이고 어느건 아니라니. 세상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돌아갔다면 훨씬 알기 쉽고 편한 세상이 되었겠죠. 하지만 현실에는 ‘비 나그네’라는 이상한 것도 존재해요. 그럼, 저같은 사람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잖아요?”
“착각하지 마. 적어도 비 나그네에 대해선 충분히 선험적인 검토가 있었어. 하지만 너에 대한 건 용하다는 평가 뿐이지. 세상에 용하다고 평가받는 점쟁이는 많아. 그들의 실체가 대부분 사기꾼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넌 너와 그들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
아렌은 입을 닫았고, 세밀은 거 보라는 듯 말했다.
“그것 봐. 할 말 없지? 아쉽지만 네가 가진 정보로는 거래할 수 없어.”
아쉽게도, 아렌으로선 그녀를 속이기 쉽지 않았다.
아렌이 평소에 하는 정보 수집은 그녀에게는 숨 쉬듯 일상적인 일. 점괘를 빙자해 사람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로는 아렌의 ‘영험함’을 설득시킬 수 없다.
아렌이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정보는, 곧 도국 사이에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였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미켈 랜돌프의 집사 프리드먼의 반응을 통해 유추해냈고, 아마 높은 확률로 사실일 것이다.
아렌은 세밀이 자신의 점괘에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걸 반응으로 알아챘지만, 그녀로선 그것을 표면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알았어요. 하는 수 없죠.”
지금 당장 거래 수단이 없는 이상, 언제까지고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럼 그쪽 뜻은, 황궁 안의 정보가 아니라면 정보를 맞교환할 수 없다는 거, 맞죠?”
“네가 묻는 게 비 나그네가 왜 그 힘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라면-”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
세밀 메렌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렌과 세밀 모두 ‘운명석’ 자체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고 그 주변만을 두루뭉술하게 훑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힘’ 자체가 아니라, ‘그 힘’의 유래와 출처, 전반적인 지식들이에요.”
적어도 제국의 도서관에는 운명석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아렌은 지금까지의 여러 만남들을 통해 운명석이라는 특별한 흑옥이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힘을 전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거라면, 어찌어찌 알려줄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나한테 그 정보를 사려면 보통의 정보로는 불가능할 텐데?”
“일단은 알고 있다는 거죠? 그거면 됐어요.”
아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다른 곳에도 타진해봐야겠어요.”
“…다른 곳?”
“아직 듀란 우피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거든요. 혹시 그녀라면-”
“잠깐만! 왜 그년한테?!”
세밀 메렌치는 단숨에 발끈하고 나섰다.
‘…그럼 그렇지.’
우피치 가문은 이곳 카르도나의 유력가문이었고, 그곳의 차녀인 듀란 역시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감독생이었다.
3명 뽑는 감독생 모두가 도국의 유력가문 출신인 것은 제국에서 온 아렌에게 꽤나 편향적으로 느껴졌지만, 학생 수의 절반이 도국 출신이니만큼 그들에게는 오히려 균형을 잘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메렌치 가문과 우피치 가문은 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있을만큼 유명한 앙숙이었다.
도시 안의 가문들은 시장직을 다투는만큼 악감정을 가져도, 보통은 다른 도시의 유력가문에 악감정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메렌치 가문과 우피치 가문이 앙숙인 이유는, 서로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일을 하기에 생겨난 반발심에 가까웠다.
메렌치 가문은 입과 입을 통해 오고가는, 빠르고 즉각적이지만 휘발성이 강한 정보를 취급했다.
반면 우피치 가문은 수많은 비교와 검토를 통해 책으로 편찬된, 느리지만 신뢰성 있는 정보를 추구했다.
메렌치 가는 우피치 가를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바보’라 놀렸고, 우피치 가는 메렌치 가를 ‘식지도 않은 정보를 허겁지겁대다 입가에 줄줄 흘리는 철부지’라 비아냥댔다.
그리고 그건, 세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심이야?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에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어. 정말 중요한 정보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기록하지 않는다고.”
“그야, 그럴 수도 있죠.”
아렌이 점괘의 도구로 사용하는 대상의 신변잡기같은 것들은, 결코 서적에 실릴만한 것이 아니니까.
그 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찾는 정보를 듀란 우피치가 모른다는 의미는 되지 않아요.”
“…….”
“일단은, 물어보는 것이 먼저겠죠. 그럼-”
“-잠깐만.”
“네?”
세밀이 아렌을 붙잡았다. 그녀로서는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개인으로서의 자존심보다 가문 간의 자존심이 우선인 모양이었다.
“아마 살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우피치 놈들에게 정보를 살 거면, 차라리 이쪽에 와. 더 나은 조건으로 팔아줄 테니까.”
“그건, 생각해 볼게요.”
‘-좋아.’
아렌은 만족스럽게 뒤돌아섰다.
점괘를 빙자해 사람들에게 정보를 이끌어내는 건 아렌이 자주 하던 것.
그때는 항상 아렌이 우위에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정보를 사는 것이지만, 아렌은 가문 간의 경쟁심을 통해 관계의 우위를 조금 확보한 것에 만족했다.
*****
사실은, 아렌에게 사용할 만한 정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가령 레데의 현 시장이 급격한 심장 발작으로 죽게 되는 것이 바로 이맘때쯤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도국 사이의 형세도 꽤나 혼란스러워지기에, 매사에 거의 무관심했던 첫번째 삶의 아렌도 그것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렌으로 인해 생겨난 변수가, 사람의 지병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테니. 이건 꽤 신빙성 있는 정보가 맞다.
하지만, 아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출처를 말할 수 없으니 이것도 마찬가지야.’
아렌은 카르도나 국제학교 도서관에 다시 들어왔다.
몇 주간 이 안의 책을 샅샅이 뒤졌지만, 느낀 건 책의 바닷속을 무심코 헤엄치려다간 익사한다는 것 정도였다.
이 학교의 마지막 감독생, 듀란 우피치를 아렌은 한번도 본 적 없엇다.
항상 이곳 도서관 어딘가에 있다고만 소문으로 들었을 뿐.
‘감독생이라면 항상 푸른 완장을 착용하고 있어야 해. 그럼 내가 못봤을리가 없는데?’
나선형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비탈을 몇 번이고 오르내렸던 아렌이었다. 그 안의 책들을 모두 읽는 건 무리지만, 적어도 도서관 구조만큼은 구석구석 훑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확인하지 않은 곳이라면. 하나.’
아렌은 비탈길을 끝까지 올라갔다.
도서관은 면적이 꽤 되기에 탑이라고 불리진 않지만, 위로의 높이만을 생각하면 가히 탑이라 불러도 손색없었다.
도서관은 카르도나 국제학교 안에서도 가장 중앙의, 가장 큰 건물.
이곳의 옥상은 다른 건물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
도서관의 상층부일수록 고대 신화나 생활 잡지식 같은 비주류의 책을 꽂아뒀으니, 발길은 더욱 뜸할 수밖에.
‘그리고, 책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굳이 옥상에 향하지는 않지.’
아렌은 옥상으로 향하는 작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