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렌은 불과 물로 인한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가 봐도 해전의 은유였고, 프리드먼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항상 꼿꼿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하던 노집사였기에, 아렌에게 한 질문이 일상적이진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물과… 불이라니. 꽤나 구체적인 점괘를 내주시는군요.”
“구체적인가요? 전 단지, 카드에 나온 대로의 점괘를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렌은 뜸을 들이다 말했다.
“방금 본 점은 꽤나 뿌렷하게 보이긴 한 것 같아요.”
집사 프리드먼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을, 아렌은 놓치지 않았다.
“…설마, 도련님에게 그런 일이. 꽤나 흉흉한 점괘입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피할 수 있는 다른 해법이 있겠지요?”
프리드먼은 아렌에게서 해답을 찾았다. 물론, 그 해답은 아렌도 모른다.
“글쎄요. 이런 흉괘는 본인에게 직접 하는 것이 더 정확하거든요. 지금 상황에서는 될 수 있으면 물을 멀리하라는 말씀 밖에는 못 드리겠군요.”
사면이 바다인 카르도나 국제학교에서 물을 조심하라니, 그건 학원 밖을 나가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역시, 아렌의 말을 들은 프리드먼은 황당해했다.
“저명한 점술가라 들었더니, 그런 당연한 말밖에 못 하십니까?”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려고 하는 프리드먼.
그때.
“-으윽!”
아렌은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가, 갑자기 또 환각이…”
“환각? 뭔가 수상한 약이라도 하는 겁니까?”
아렌은 일부러 어금니를 악물고 근육을 긴장시켜 식은땀을 흘렸다.
“이따금, 별 의미 없는 장면이 보이곤 해요. 방금도, 바다 위가 환히 불타는 환각을 봤죠. 물 위가 불타다니, 그런 게 현실일 리는 없으니 분명 어떤 은유겠죠. 안 그래요?”
“…….”
아렌은 쐐기를 박았다.
“아무튼, 저도 더 이상의 도움 되는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하군요. 미켈 씨를 직접 점쳤다면 또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걸 언제까지 아쉬워할 수는 없죠.”
아렌에게 점을 볼 때보다도 부쩍 생각이 많아진 듯한 프리드먼은 비척대며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점괘를 보려 했던 프리드먼에게 의외의 말로 충격을 주는 것은 일단 성공이었다.
그리고, 얻어낸 것도 있었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게 랜돌프 가문인지, 레데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일어나기는 할 모양이군.’
그리고, 전쟁에 대한 강한 확신은 먼저 일으키는 쪽만이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왜지?’
아렌이 기억하고 있는 원래 역사에서는, 이맘때쯤 도국 사이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대체로 제국의 영향력 아래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레온나토스가 살해당하고 아렌이 누명으로 죽을 때까지, 대륙 안에는 별다른 분란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렌으로선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슬슬 요령이 생길 때도 되었다.
과거와 다르게 역사가 진행되는 것은 곧, 아렌이 되돌아와서 바꿔버린 사건에 그 해답이 있다.
가령 태양교의 초대가 첫 번째 삶에서보다 빨랐던 것은, 전생에서와 달리 고드프리가 실각해서 생긴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축제에서 내릴 리 없었던 비가 내렸던 것도 비 나그네가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그가 왜 축제 중의 황도로 왔는지는 불명이지만 아렌으로 인해 바뀐 역사가 영향을 줬을 것은 확실하다.
레데, 혹은 랜돌프 가가 일으킬 전쟁 또한 이미 달라져 버린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난다라. 일이 뒤숭숭하니 내가 졸업한 후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렌이 제국도 아닌 타국의 일에 깊이 관여할 이유는 없다.
설령 전쟁이 일찍 일어나도 이곳은 안전할 테고, 원하는 바를 이룬 채 도국 연합을 떠나면 이곳의 전쟁 따위 아렌이 알 바 아니다.
‘당장은, 내 환각이 진짜일 가능성이 조금 더 올라간 거겠지?’
처음부터 아렌의 환각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미래를 보여주나 알아보고자 했던, 하나의 실험일 뿐이었다.
대강 사안을 알았으니 아렌으로선 다른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아렌은 간과하고 있었다.
한번 발을 들이민 후, 다시 빼낼 수 없는 경우라는 것이 왕왕 존재한다는 것을.
*****
카르도나는 ‘박제된 지식의 도시’라는 이명에 걸맞게, 대륙에서 작성된 모든 서적이 모여든다.
‘이곳이라면 운명석과 환각에 대한 정보도 찾을 수 있겠지?’
아렌에게 이따금 보이는 환각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했다.
이제는 그 원인을 찾을 때.
아렌은 카르도나 국제 학원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원형의 건물, 카르도나 국제 도서관을 정면에서부터 올려다봤다.
화강암 벽돌을 쌓아 올린 벽 위로 담쟁이덩굴이 빽빽하게 타고 올라간,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였다.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큰 첫 번째와 두 번째 도서관이 이곳 카르도나에 있다.
첫 번째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카르도나 대도서관.
두 번째로 큰 곳이 바로 이곳, 카르도나 국제 도서관이었다.
대도서관의 경우 보유하고 있는 장서의 수가 50만 권. 그 절반인 국제 도서관이 장서량 2위인 것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크기다.
원형의 건물을 나선형으로 올라가며 외벽과 중앙을 가득 메운 책장을 보면서, 아렌은 혀를 내둘렀다.
‘…이곳만 해도 엄청난데, 대도서관은 50만 권? 세상에.’
황도의 사람들 숫자가 50만 명이니, 그곳에 있는 책을 다 읽는 건 아렌이 황도의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악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황실 도서관 장서량이 결코 적지 않은데, 이곳에 비하면 앙증맞을 정도였다.
‘여기 레밍이 왔다면 아주 좋았을 텐데. 아예 멜로익이 아니라 레밍을 데려왔어야 했나?’
한번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레밍이었다면 이곳의 희귀 장서들을 머릿속에 담아갈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아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대동할 수 있는 사용인은 한 명뿐이고, 레밍에게는 곁에서 책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학생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이 멀었기에 힘들었다. 눈이 먼 사람에게 정상적인 수업은 여러모로 따라가기 고역일 테니까.
“음… 아닌가? 국제 도서관이 문제지, 학교 밖에 있는 대도서관은 상관없을 텐데? 나중에라도 시동을 잔뜩 데리고 여기로 보내면…”
나선형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경사 앞에서 혼자 웅얼대는 아렌.
“뭐야? 혼자 뭘 그렇게 꿍얼대고 있어?”
뒤에서 말을 건 건, 헬데움의 유력가문 장녀 세밀 메렌치였다.
“요즘 재밌는 걸 한다고 들었는데. 수업 중에 말고, 수업이 끝난 후에 말야.”
“밖에선 재밌게 보였나요?”
학생들의 하인들에게 점괘로 명성이 퍼진 다음, 잘만 하면 학생들의 점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밀에게는 하인이 없었다.
“최근에 널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거, 알고 있어?”
“네. 대강은. 그리고 보나 마나 당신은 저보다 몰트를 더 신경 썼겠죠?”
“…어떻게 알았어?”
“주목을 받는다는 건 저를 보는 눈이 많다는 의미니까요. 보는 눈이 적은 정보야말로 진짜 귀한 정보, 아니에요?”
“잘 아네.”
이제는 좀 감이 올 것 같았다.
메렌치 가문의 사람들은 고급 정보만을 쫓아 움직인다.
그리고 보는 눈이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이 그들에게 더 고급인 정보다.
그럼, 보는 눈이 적은 정보보다도 고급 정보는?
‘그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정보겠지.’
아렌의 예상은 적중했다.
“도서관에는 무슨 일이야? 단지 심심함을 때우려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거야?”
“찾는 게 있어서요.”
“찾는 거? 그게 뭔데?”
세밀이 굳이 아렌에게 와 물어봐야 했던 이유.
그건, 아렌의 학교생활이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렌의 주변인이라 할 사람이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흘러갈 정보도 없다.
“…세밀, 당신은 비 나그네에 대해 당연히 존재한다는 듯 말했죠?”
“그렇지?”
“왜죠? 제 점괘는 믿지 않으면서 머리 위로 비를 뿌리는 사람은 어떻게 믿을 수 있었냐고요.”
“전에도 얘기했을 텐데? 너도 보지 않았어? 그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비가 그쳤잖아?”
“그 사람 목을 자르기 전에는 그럼 어떻게 알고 있었죠? 도국에서는 현상금까지 붙었던데.”
“그건-”
“그리고 왜 비 나그네는 비를 뿌릴 수 있었죠? 그 원인도 혹시 알고 있나요?”
“아니?”
세밀은 고개를 돌렸다. 아렌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유를 알고 있군요. 그리고 저한테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죠?”
“…내 얼굴이, 그렇게 티 나?”
“걱정 마요. 저 아니면 못 알아볼 테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을 취사선택해 가져가는 정보교환.
아렌만의 일방적인 정보 획득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넌 비 나그네에 대해서, 혹은 그 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다는 거지?”
“네. 도국연합과 제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라이안 황자는 어느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요. 제가 모시는 분을 위해서도 전 그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흐음.”
세밀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너도 비 나그네처럼 이상한 힘이 있는 건 아니고? 미켈 랜돌프의 집사에게 꽤나 뒤숭숭한 말을 했다고 들었거든.”
“아쉽게도 저는 정말 점술가일 뿐이에요. 저보다 훨씬 용하고, 때로는 이해가 안 갈 만큼 정확한 점괘를 내리는 점술가가 황도에 있긴 하지만.”
“그래? 누구야?”
“있어요. 몰디나라고.”
아렌은 자연스럽게 몰디나의 이름을 팔았다.
“흠…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긴 한데. 열심히 찾아봐.”
한곳에 오래 서서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의 주목을 사게 된다.
세밀은 처음에 말을 걸었던 것만큼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말했다.
“네가 찾는 정보, 여기서 얻어가길 바라지.”
“저한테 그냥 말해주는 방법도 있는데요.”
“세상만사 모든 건 받은 만큼 베푸는 거잖아?”
잘 해봐, 세밀은 푸른색 완장을 제대로 고치며 떠나갔다.
“네가 찾는 정보, 여기서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
세밀의 마지막 말은 마치, 이것을 뒤져보는 것이 헛수고라는 것처럼 들렸다.
*****
“…그런 의미였군.”
매일 도서관을 드나든 지 3일째.
아렌은 그제야 세밀이 마지막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은 정보라도, 간추려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황궁에는 살아있는 도서관의 장서목록인 레밍이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이곳의 장서 목록은 총 30만 권. 아렌이 원하는 정보가 적힌 책의 제목도 모르는 이상, 말 그대로 ‘그럴듯한’ 책을 찾아 일일이 뒤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도 이곳저곳에 눈과 귀를 심어두고 점술의 재료로 활용하는 아렌이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여기서 배워가야 할 건, 화술이나 외교술이 아니었어.’
확인되지 않은 온갖 정보를 받아들이는 밀정의 도시 헬데움.
그리고 그곳에 고인 정보를 거르고 정제해 쓸만한 정보를 가려내는 메렌치 가문.
아렌이 배워가야 할 건, 그들의 신들린 노하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