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아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수면 아래를 확인하기 위해 바닷속으로 들어간 건 한순간의 변덕이었을 뿐이지만, 숨을 한껏 참았다가 다시 위로 올라올 때, 갑자기 느껴졌던 시야의 점멸을.
그때 수면은 유난히 환했고, 붉고 뜨거운 열기가 함께했다.
처음에는, 단지 숨이 막혀서 정신이 혼미해 느끼는 착각이라고만 느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그때의 장면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조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다른 형태의 ‘예감’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세밀 메렌치의 표정을 본 아렌은 확신했다.
‘아무래도, 정말 그런 게 있는 모양인데?’
“그건, 왜 묻는 거지?”
“글쎄요. 그냥 문득 떠올랐다, 정도로 이야기하죠.”
아렌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루는 밀정의 숫자만 수천 단위인 메렌치 가문의 장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능숙했지만, 표정에서 속내를 알아내는 아렌의 감식안이 더 우위였다.
‘바다를 불태우는 무언가라면, 역시 병기 종류겠지. 물 위에 뜨는 인화성 액체같은 건가?’
“…설마, 그것도 네 점괘로 알았다고 주장할 셈은 아니겠지? 그런 둘러대기는 도국에서 통하지 않아.”
“그러면, 그냥 꿈에서 본 걸로 할게요.”
“…….”
“그보다 세밀. 지금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는 건 알아요?”
여기까지 오자 세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칫. 역시 너, 화술 과목 따위 필요 없는 것 아냐?”
“원래 잘하는 걸로 학위를 따는 것도 나쁘진 않은 선택이죠. 아무튼, 세밀 당신이 거기에 대한 답을 줄 수는 없는 거겠죠?”
“…….”
그 침묵이 일종의 대답이었다.
“네. 잘 알겠어요.”
방금의 대화로 아렌이 확인한 것.
아렌이 ‘본 것’처럼, 바다 위를 불태우는 무언가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메렌치 가문의 세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세밀은 그 정보를 제국 황자의 비서관 정도의 인물이 절대 알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가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예견이라면, 그게 언젠가 다시 쓰이기라도 하는 건가?’
아직까지는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아렌이 대충 말한 무언가가, 우연히 도국의 비밀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조만간 확인하게 되겠지.’
물러가려던 아렌은 문득 돌아섰다.
“혹시, 방금 말한 것 때문에 제가 위험해지거나 하지는 않겠죠?”
“…그렇지는 않을 거야. 네가 온갖 곳에 떠들고 다닐 성격 같지는 않으니까. 밤중에 칼 맞을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그거 다행이네요. 덕분에 잠은 푹 자겠어요.”
아렌이 물러갔다.
그리고 바닷가에 혼자 남은 세밀의 눈은 아렌의 시선이 한동안 머물러있던 수면으로 향했다.
천천히 일렁이는 수면을 본 채, 세밀은 중얼거렸다.
“랜돌프 가에서 흘러 들어갔을 리는 없어. 설마하니 간도 크게 도국에 밀정을 집어넣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세밀은 고개를 들었다.
“볼 수 없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 사실인가?”
*****
방과 후.
아렌은 외부인 숙소에 남아있던 멜로익을 만났다.
“어때? 거기는 지낼 만해?”
“글쎄. 학생 수에 비해, 남아있는 외부인은 그리 많지 않아. 기껏해야 100명 정도?”
학생들은 대부분 명망 있는 집의 자식들이니, 한 명씩은 하인을 데리고 와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남아있는 하인의 숫자는 적었다. 1500명 학생 중 하인을 대동한 사람은 100명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그럼 사용인들은 평소에 뭘 하지?”
“글쎄, 고작 하루 지낸 걸로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책을 보거나, 수다를 떨거나 하던데? 학과가 끝난 후에는 교정도 거닐 수 있고.”
‘…아, 그래서.’
아렌이 교정을 산책할 때 한산했던 이유가, 학과 중에는 사용인들도 건물 안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난 대체 여기 왜 온거지?”
멜로익은 조금 불만인 듯했다.
“이래서야 네 시중도 못 들고, 지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잖아. 하는 일이라곤 외부인 숙소 안에서 빈둥대는 것뿐이라고.”
그건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렌은 함구했다.
“정말이지, 이런 생활을 일주일만 더 했다간 몸에 녹이 슬어버리고 말 거야.”
“하긴, 바닷가니까. 바람이 습하고 소금기를 머금고 있긴 해.”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거든? 아, 맞다.”
툴툴대던 멜로익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몰트 치가렌 공은 잘 지내?”
“음, 몰라? 아침에 보고 못 봤는데. 왜?”
“몰트 공의 하녀들이 네게 점을 보고 싶어 하더라고. 대부분 돌아갔지만, 한 명 남아있기는 해. 물론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
“…몰트가 괜찮은 인재였으면 회유해보려 했겠지만, 지금은 딱히-”
시큰둥하던 아렌이었지만,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아니다. 역시 불러와 줄래?”
“뭐야, 그냥 공짜로 해주게? 복채도 없이?”
멜로익은 조금 놀랐다.
사실, 아렌은 복채를 받는다. 몰트의 하녀가 지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 점괘를 몰트의 하녀가 만족해하면, 외부자 숙소에 내 소문을 퍼트려주겠어? 용한 점술가가 왔다고 말야.”
“…또 뭔가를 계획하는 거야?”
“그리고 되도록 거기 미켈 랜돌프의 사용인이 있다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도 아니면 도국 레데의 사람도 좋고.”
아렌은 점점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도 점판을 열려고? 이곳에서는 좀 쉬려던 것 아니었어?”
멜로익이 어이없어했지만, 아렌은 느긋하게 있을 새가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좀 다르겠지만, 도국 출신의 학생들에겐 특히 아렌의 점괘가 잘 먹혀들지 않을 것 같았다.
도국 특유의 현실적인 풍조가 강하게 스며들어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고위 지식인층이 아닌 사용인들이라면 어떨까.’
평소 경험으로도, 학문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조금 무딘 사람이 점괘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학생들이라면 모를까, 사용인들이라면 아렌의 점괘가 꽤나 유용할지도 몰랐다.
아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멜로익이 말했다.
“그야, 네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냥, 할 것도 없으니 심심하잖아?”
아렌은 대충 둘러댔고.
당연히, 멜로익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
그 뒤로 한동안, 아렌의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 안에서 아렌의 활약은 평이한 편.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겠지만, 아렌은 자신의 역량을 숨기는 것을 택했다.
이성적이며 미신을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굳이 어필해봤자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다.
아렌이 학원에 들어온 지 2주.
그 사이 아렌은 외부인용 숙소의 하인들을 공략했고, 사용인들 사이에서 아렌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2주가 지났을 때. 사용인들 사이에서 아렌에 대한 말이 오가는 것은 더이상 특별한 광경이 아니게 되었다.
“-뭐라고요? 당신은 그딴 미신을 믿습니까?”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용하단 말야! 실은 제국 황실에서도 용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래! 외국에서도 막 찾아오고!”
“허, 참. 그런 사람이 학교에는 왜 오겠어! 당연히 사기꾼이겠지!”
“…우리 도련님도 그런 건 믿지 말라고 하던데요.”
“하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성격이랑 취미까지 알아맞혔다고요!”
“…….”
도국의 사람들은 역시 타국 사람들보다는 점술과 같은 미신을 덜 믿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한 번이라도 ‘미심쩍음’이 파고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쉽다.
믿음에 균열이 생긴 시점부터 사람은 점점 더, 믿고 싶은 것만을 더 믿게 되니까.
남은 건 저들의 의구심과 경계심을 허물면서, 얼마나 능숙하게 아렌에게 의존하게 하느냐만 남았다.
그러기 위해선, 아렌이 먼저 나서서 공언해야 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점괘를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셔야지요.”
“아무리 실력이 좋다는 점술가의 점괘도 적중률만 따지면 고작 8할에 불과합니다. 세부적으로 따지면 더 보잘것없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점괘를 너무 맹신하시는 분께는 점을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제 점은 흥미로만 보셔야지, 어디까지나 선택은 본인이 한다는 점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가슴 아픈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아마도, 가족때문에-”
“세상에나! 그걸 어떻게!”
아렌의 소문을 사용인들 사이에 널리 퍼트리고 완전히 믿게 하는 건, 딱 2주면 충분했다.
‘…드디어.’
그리고, 처음 아렌이 목표로 하던 도시국가 레데의 유력자, 미켈 렌돌프의 사용인이 드디어 아렌의 앞에 섰다.
“…집사 프리드먼이라 합니다.”
‘…후, 너무 길었어. 드디어 만났군.’
마르고 말쑥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차려입은 꼬장꼬장해보이는 노인.
안경을 쓴 눈에서는 아렌을 무작정 신용하지 않겠다는 경계심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렌 앞에서는 점을 보기 위해 선 손님일 뿐.
“듣자 하니, 정말 어떤 대가도 원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이죠. 전 단지, 제국에서 매일 하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점을 보고 있습니다. 제 ‘감’이 무뎌지면 큰일이니까요.”
무료 봉사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복채를 받게 되면, 사람들은 대가만 있으면 언제든 아렌의 점괘를 볼 수 있는 것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대가를 받지 않으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점괘를 거절할 수 있다. 무료 봉사에서까지 점을 봐달라 떼를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바다를 태우는 불이 도국 연합의 병기라면, 레데의 유력가가 모를 리 없어.’
첩보에 특화된 메렌치 가문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군사력에 치중한 대신 첩보의 소양은 다소 떨어지는
랜돌프 가문을 파보는 것이 낫다.
아렌은 물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점치고 싶으신 겁니까?”
“…글쎄요. 점괘를 그다지 믿는 것은 아니지만, 모처럼이니 저희 미켈 도련님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그분은 무사히 장수하실 것 같습니까?”
평이한 질문이다.
주인의 안녕을 묻는 것은 충직한 하인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아렌은 늘 하던 대로, 적당한 조건부 흉조를 말한 다음 해결책을 제시할 예정이었다.
그때.
‘…잠깐만.’
미묘하게 집사 프리드먼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렇게나 묻는 질문이라고 했지만, 프리드먼은 아렌의 앞에 직접 찾아온 사람이니까.
‘사실은, 꽤나 마음에 걸리는 질문인가? 그리고 그걸 내게 숨기고 싶고?’
아렌은 능숙하게 섞은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놀란 듯 카드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건…!”
“…왜 그러십니까?”
“이건…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화를 당하실지 모르겠군요. 사인은… 애매하군요. ‘물’과 ‘불’? 둘이 같이 나오는 적은 드문데…”
아렌은 대충 해전을 상정했다.
물 위에서 싸우는 전투. 그리고 바다 위에서 엉겨 붙는 불.
설령 아렌의 예측이 틀리더라도 물과 불은 일상에서 흔한 것이니 아주 약간의 사고로도 쉽게 둘러댈 수 있다.
“설마!”
프리드먼은 당황했다. 그의 반응은, 터무니 없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는 달랐다.
‘뭔가, 일어나는군. 당신은 그걸 알고 있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