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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04화 (104/227)

#104화

‘…나에 대해 알고 있어. 어째서?’

바닷물에 젖은 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며 아렌이 물었다.

“…꽤나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학교 전체에 그렇게 소문이 났나요?”

“아니? 다녀보면 알겠지만, 다른 학생들은 누가 새로 전학왔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을 거야. 신입생이야 항상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거니까.”

“그럼 당신은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보다, 당신은 누구죠?”

“아, 내 이름?”

붉은 머리카락의 감독생은 아렌의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해. 자기소개가 필요했던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했어. 난 세밀 메렌치야.”

‘-메렌치 가문. 그렇군.’

아렌은 곧바로 이해했다. 어째서 그녀가 아렌을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왜 자기소개에 낯설어했는지.

아렌이 도국의 모든 유력한 가문들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메렌치 가문을 모를 수는 없었다.

메렌치 가문은 카르도나와 인접한 도시국가, 헬데움을 지배하는 가문이었다.

이곳 카르도나는 교육의 도시답게 대륙 전체의 온갖 서적들이 흘러들어왔다.

한번 글로 기록된 정보는 모두 카르도나에 모였고, ‘박제된 지식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반면 헬데움은 상업의 도시, 그리고 밀정의 도시로 유명했다.

대륙 전역에 퍼진 밀정의 수가 만 명을 넘으며, 발달한 상업을 통해 온갖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상인들의 뜬 소문과 야사가 모여드는 도시.

입과 입 사이를 떠도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모두 헬데움에 모여서 걸러지고 가공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휘발하는 지식의 도시.’

두 도시는 서로 가까운 만큼 패권다툼도 심하고, 어느 곳이 더하고 못하지 않는 훌륭한 라이벌 관계였다.

‘그 헬데움의 패자이니 당연히 황궁 안에도 밀정을 숨겨뒀겠지. 하지만, 놀라운데?’

메렌치 가문의 세밀은 푹 젖은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후, 어쨌든. 다음엔 헷갈리게 그러고 있지 말아.”

“수고를 끼칠 생각은 없었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됐어. 나도 감독생으로서 점수 한번 벌어보려고 한 거였으니까. 보기 좋게 실패한 거지 뭐.”

“이 빚은 학교에 있는 동안 꼭 갚도록 하죠.”

“기대 안 하고 기다릴게. 아참. 그런데 넌 무슨 수업을 들을 생각이지?”

“정확한 과목명은 모르지만, 일단은 화술과 외교 쪽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세밀은 가는 눈섭을 찡그렸다.

“흐음, 화술 수업이 너한테 필요해?”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람을 홀리는 말솜씨는 이미 더 배울 것 없이 특출난 것 아냐? 너, 점술가잖아?”

“…….”

아렌이 점술가임을 그녀가 아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문제였다.

마치 아렌의 점술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 너나 점술을 믿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건 아냐. 그냥 내가 믿지 않을 뿐이지. 점술이란 건 대부분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것, 아닌가? 사교적 대화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지.”

그녀의 말은 완벽히 정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신 뿐만은 아니겠죠?”

“사실 도국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 주의자라서. 특히 온갖 정보가 들어오는 카르도나와 헬데움 사람들은 더할걸? 아마 이곳에선, 네 점괘로 별로 재미 못볼 거야.”

“음, 그런가요?”

아렌은 벗어뒀던 옷을 챙기며 운을 띄웠다.

“얼마 전에, 황도에서 ‘비 나그네’라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나타나는 곳마다 비를 뿌린다는 남자요. 분명 도국 연합에서 시작된 소문이었는데요. 심지어 인상착의에 현상금까지 붙었다면서요?”

“그게 왜?”

“그건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요?”

아렌도 젖은 옷을 입은 여자를 언제까지 붙잡아둘 생각은 없었다.

이걸로 대화를 끝내려는 찰나.

세밀은 젖어서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비 나그네가 미신이라고 누가 그래? 너도 눈앞에서 보지 않았어?”

“…….”

짧은 만남 동안의 대화에서는 아렌의 완패였다.

“여하튼, 실은 별 기대 안 했는데 당분간 꽤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럼.”

세밀은, 걷는 곳마다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렌도 생각했다.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

아렌은 학교에 다녀본 적 없지만, 통속 소설이나 선입견에서 오는 상투적인 장면들은 알고 있다.

가령 전학생이 오면 와글와글 몰려드는 학생들, 새로운 얼굴에 낯설어하면서도 그만큼 숙이지 못하는 호기심.

하지만 그런 장면은 카르도나 국제학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완전 공기 취급이군.’

화술과 외교 과에 각각 입학한 아렌이지만, 아렌에게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이 학교에 신입생은 흔했고, 특히나 언제고 포기하고 나갈 수 있는 만큼 학생들은 괜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

황궁에서의 아렌은 어떻게든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필요한 사교관계에 관심을 끄고 조용히 수업을 이수하며 학위만 따면 그만이다.

저들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 만큼, 아렌에겐 편했다.

물론, 몰트는 좀 달랐지만.

“저, 저기. 혹시 ‘영지경영의 이해’ 들어? 같이 들을 생각-”

“아니, 됐어.”

스윽.

몰트의 제안을 자연스레 무시하며 지나치는 학생들.

몰트는 꽤나 상심하는 듯했지만, 아렌이 보기엔 단순한 따돌림은 아니었다.

‘혐오나 경멸은 아니군. 단순한 무관심일 뿐이야.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줄 관심은 없다, 이건가?’

평생 주변의 떠받듦 속에서 자란 몰트에게는 가혹할 수도 있지만, 아렌에겐 아니었다.

“흠, 뭐지. 수업을 두 개 밖에 안 듣는 건가?”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아렌의 수강신청서를 몰래 훔쳐본 사람은, 구릿빛 피부의 건장한 청년.

제대로 단련된 근육이 옷으로 가려지지 않고 도드라질만큼 우락부락한 몸이었다.

그의 팔에는 세밀 메렌치와 같은 청색의 완장이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크고 각진 인상에 아렌은 절로 조금 위축되었다.

‘…생긴 건 테오드릭 저리가라인데?’

“신입이 왔다길래 와봤지. 내 이름은 미켈 랜돌프다.”

“전 제국에서 온 아렌입니다. 여기 이쪽은 제국의 명망 있는 가문의 몰트 치가렌입니다.”

“그래, 아렌. 잘 부탁하지.”

“…….”

몰트를 소개해줬지만 미켈은 그 소개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랜돌프 가문이라. 레데의 유력가문 출신. 확실히 이곳이 명망있는 학교이긴 한가 봐?’

레데는 서부 해안선 너머의 바다 한복판에 있는 도시국가로, 카르도나와 헬데움에 버금가는 도국연합의 또 다른 주축이었다.

상업의 발달은 다른 도시보다 뒤떨어졌지만, 그간 숱한 배들을 수장시킨, ‘수장된 배들의 도시’라는 이명에 걸맞은 당당한 서해의 패자로서 도국 연합의 군사력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랜돌프는 도국 레데의 유력가문 중 하나.

실질적인 주인답게, 미켈 랜돌프 역시 무력에는 일가견 있어 보이는 외견이었다.

미켈은 아렌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너, 무술 수업은 안 받는 건가?”

“제가요? 왜 들어야 하죠? 혹시 권유라면, 몰트에게 물어보시죠.”

“난 강한 사람 아니면 관심없어.”

“…….”

“눈만 봐도 알아. 너 검 좀 쓰지? 아니라면 한번 배워보던가. 제법 잘 할 것 같은데?”

“…그냥 제 몸이나 지킬 정도예요.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못 됩니다.”

더글라스는 아렌의 실력이 또래 중에서는 최상위권이라고 말했었다.

물론, 가면 갈수록 노력과 재능을 타고난 자들에게 점점 뒤처지게 된다고도 말했지만.

‘지금 내 실력이 여기서 얼마나 통할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황자의 비서관이 타국의 검술 학위를 따봤자 별로 좋을 것이 없었다. 아렌이 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만약의 사태에 허를 찌르기 좋았다.

“역시.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어디, 제국에서 왔다고? 얼빠진 제국 사투리를 듣고 바로 알았지.”

“그쪽이야말로 억센 서부 억양인데요?”

미켈의 가벼운 도발에도 아렌은 꿈쩍하지 않았다.

미켈은 피식 웃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네. 이름이 아렌이면, 성은 없어?”

“네.”

“그럼 고위 관료거나, 성을 밝히기 어려운 귀족 자제겠군. 혹시 가웨인 황자를 본 적은 있어? 검성 후보로 거론된다 하던데.”

“그 본인은 검성이 되기보단 황제가 되고 싶은 것 같지만요.”

“흥! 어차피 시도했다가 안 되면 망신이나 당할 테니 한발 물러서는 거겠지! 그 실력도 전부 가짜일 거야!”

‘그건 아닐 텐데?’

아렌은 더글라스의 실력을 알고, 그 더글라스와 완전히 호각인 가웨인의 실력도 알고 있다.

가웨인이 차기 검성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닐 터.

“혹시, 검성이 되고 싶은 겁니까?”

“…내가? 설마! 레데의 함대는 포격과 충각전이 전부야! 그깟 검술다위 해전에선 아무 도움이 안돼지!”

미켈은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반응은 아렌에게 더 극명하게 보였다.

그가 만나본 적도 없는 가웨인에게 호승심을 불태운 건, 자기 자신도 검성에 대한 욕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요. 여하튼 전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간 뺏어서 미안하군. 다니면서 궁금하거나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이 완장의 의미가 그런 거니까.”

미켈은 푸른색 완장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감독생은, 이 학교에 다니는 1500명 학생들 중에서 단 3명만이 뽑히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감독생은 사실상 교수와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학점 이수를 포기한다면 학생조차도 감독생의 말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감독생이라는 것도 꽤나 성가시겠어.’

물론 개인 이력을 쌓기 위해 온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이력이 되겠지만, 누구보다 앞에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 역할은 아렌에게 맞지 않았다.

교실을 나오고, 아렌은 이곳에 온 목적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1. 학위를 따 아렌의 이력에 한 줄 더 추가한다.

2. 온갖 정보가 흘러드는 카르도나 안에서 운명석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지.’

가능하다면 자신의 예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곳에서 단서를 찾는 것.

*****

아렌은 세밀 메렌치를 찾아갔다. 그녀는 전에 만났을 때처럼 교정 안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찾느라고 혼났네요.”

“어머. 아렌 아냐? 벌써 미켈을 만났다고?”

방금 전 일인데도 세밀 메렌치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고 있었다.

‘내가 황궁에서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분명 예지안이니 천리안이니 소리를 들었겠지.’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학교 주변을 돌아다녀요?”

“학교 건물 밖에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 건물 안에서 보는 눈이 많은 정보는 그리 고급정보가 아냐. 밖에서 나 혼자만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진짜 정보지.”

“…어제 절 물에서 건진 것처럼요?”

“그건 그만 잊어주겠어? 그래서, 황자의 비서관씩이나 되는 자가 나한테는 무슨 볼일인 거지?”

마침 그녀가 서 있는 건 전과 같은 바닷가 근처였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던 아렌은 문득 말했다.

“혹시 저한테 점 보실 생각 없나요?”

“뭐야, 영업하는 거야? 하지만 난 안 믿는다고 했을 텐데?”

“어차피 복채도 안 받을 거에요. 그러니 속는 셈치고 받아보시죠?”

“음, 역시 시간 낭비 같아서 안 할래.”

세밀의 거절은 완고해서, 아렌의 설득이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럼 하는 수 없죠. 그 대신, 하나만 확인해줄 수 있어요?”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지. 뭔데?”

아렌은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확인하며 물었다.

“혹시, 바다가 불타오르기도 하나요?”

“…….”

항상 침착하던 세밀 메렌치는, 아렌의 마지막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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