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렌을 태운 곤돌라가 학교 부지 외곽에 마련된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는 범선 정도도 충분히 정박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지만, 한 번에 정박할 수 있는 숫자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이 학교의 유일한 부두인가? 학교에서 나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는데?’
국제적으로도 저명한 학교이니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만약 아렌이 야반도주를 하려 해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의 경우 학교를 몰래 나가는 것도 생각했는데. 이래선 학교의 허락 없이 외출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군.’
부두 앞에는 커다란 유리 안경을 낀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아렌과 몰트 치가렌. 맞습니까? 따라오시죠.”
그녀는 다짜고짜 둘을 안내했다.
“카르도나 국제학교 기숙사의 사감, 휴민트입니다. 당신들이 학교 밖에서 무슨 신분이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학교에 있는 이상 자네들은 이곳의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아렌은 그렇다 쳐도, 몰트는 제국의 귀족이다. 설령 적국의 귀족이라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설령 레온나토스가 입학했어도 이곳에서는 아렌과 동급의 취급을 받을 것이다.
‘과연. 지도자를 선출하는 나라 답군.’
도국연합의 도시국가에는 전통적인 왕이 없다. 5년에 한 번 투표로 선출되는 시장이 있을 뿐.
물론 그 시장도 도시의 유력가문 몇몇이 돌아가면서 맡지만, 적어도 유력가문은 말 그대로 유력하기만 할 뿐, 신분적으로 보장된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무일푼으로 들어온 이방인조차도 자수성가만 한다면 얼마든지 도시의 유력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레온나토스가 선페일 지역에 관리자를 선출하기로 한 제도와도 흡사했다.
제국에서는 급진적인 제도라 평가되지만, 이곳에선 일상적인 일이다.
‘여기에 레온나토스가 왔으면 배울 게 더 많았을 텐데.’
“자. 여기가 2인실입니다.”
사감이 둘을 2인실 기숙사 방으로 안내했고, 몰트의 얼굴은 단번에 찌푸려졌다.
“이, 이게 뭐야. 완전 쥐구멍만 한 방이잖아?!”
책상 두 개와 위아래로 겹쳐진 침대, 높고 좁은 옷장 하나가 방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설마, 우리가 타국 사람이라고 홀대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만약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다면 사무처로 가 보시죠.”
“장난하지 말라고! 침대는 또 왜 위아래로 겹쳐 있는 거야… 이런 방이면 사용인조차 들이지 못하잖아! 저들은 어떡하라고!”
“두고 오셔야지요.”
“…뭐?”
사감은 몰트의 항의에도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본교는 입학할 때 고용인을 지참하라 말한 적 없습니다. 물론 지참하면 안 된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었죠. 학교는 지식만 배우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자립심을 함양하는 곳이기도 하죠. 불만입니까?”
“…….”
“불만이라면, 곧바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최후 통첩같은 사감의 말.
아렌은 재빨리 말했다.
“전 남을 겁니다.”
“나, 나도 남을 거다!”
사감은 뒤에 줄줄이 서 있는 아렌과 몰트의 하인들을 훑어본 뒤 내뱉듯 말했다.
“…정 사용인이 필요한 자들도 있으니, 한 명 정도는 동행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다만 사용인은 학교의 모든 일과가 끝난 후에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외부인 용 기숙사에 대기해야 하죠.”
“그, 그럼 나머지 인원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도시 안에 숙소라도 잡으시죠?”
‘…이런.’
몰트는 완전히 낭패한 기색이었고, 그건 아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안에 얼마나 남아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도시에 여관을 잡고 대기하는 건 금전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너무 큰 손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다시 제국으로 돌려보낼수도 없다. 아렌이 카르도나 시내를 거닐거나, 다시 돌아갈 때는 호위가 필요했으니까.
호위를 부르는 서신이 가는 시간, 호위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처음부터 카르도나 안에 기다리게 하는 게 아렌으로선 유리했다.
“몰트, 네 사용인들은 어떡할 거지?”
“나?! 나는, 일단 돌려보내야겠지. 적어도 1, 2년은 걸릴 테니까.”
보통은 그 정도 걸린다. 하지만, 아렌은 이곳에 1년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호위 둘은 카르도나 외곽에 여관을 잡아야겠어.”
아렌의 수중엔 돈이 제법 있었다. 황궁에서 일하면서 받았던 봉급을 꼬박꼬박 저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높은 카르도나 안의 여관에 하염없이 머물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3개월. 그 사이에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조금은 느긋하게 학교생활을 보내려고 했던 아렌이었지만, 그 계획은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
카르도나 국제학교는 학생을 학년제로 받지 않는다.
입학 자격은 12세에서 20세까지.
이 사이에 있는 누구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으며, 먼저 입학했다고 선배 대접을 받는 등의 텃새도 없다.
학년 제도가 없고, 자신이 등록한 과목의 이수 성적만 나온다면 곧바로 학위가 나오는 자율 시간표 제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돈이나 지위로 학위를 얻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학생들은 교수들이 원하는 수준의 성취를 이뤄야만 학위가 나오는 등 카르도나 국제학교의 학과졸업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렌과 몰트 모두 한 명의 하인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학교를 나가야 하는 상황.
아렌은 멜로익을 남기고, 몰트 역시 하녀 하나를 남겼다.
둘은 주말이나 방과 후에나 만나볼 수 있었고, 지금은 외부인 기숙사에서 대기해야 했다.
몰트의 하녀는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렌 님. 부디 저희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적당히 가능한 선에서 그러죠.”
멜로익 역시 아렌이 불안한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렌 님, 저도 가 볼게요. 귀찮아질 테니 어지간히 화가 나도 몰트 공에는 손을 올리면 안 돼요?”
“…남이 들으면 내가 막 때리는 사람인 줄 알겠다?”
둘이 물러가고, 아렌과 몰트는 좁고 긴 기숙사 방에 덩그러니 남았다. 수업을 들어가는 건 내일 아침부터.
오늘 하루는 꼬박 짐 정리하는 데 다 써야 할 것 같았다.
“…아렌의 짐은 그게 다야?”
“그러는 너야말로 방 하나를 통째로 가져온 거 같다?”
몰트가 가져온 짐은, 아렌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그만한 짐을 정리하는데 정리하는 기술은 없으니, 몰트는 짐정리를 하는 내내 툴툴거렸다.
“대체 왜 내가 짐 정리를 직접 해야 하는 거야! 난 여기 배우러 왔을 뿐인데!”
“청소도, 정리도 직접 해봐야 느는 거니까.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지?”
“그런 것들이 늘어서 어디에 쓰이겠어? 어차피 돌아가면 하인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글쎄. 자기 방 청소도 못 하는 사람이 다른 걸 잘할 수 있을까?”
“…….”
기왕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한쪽만 계속 어지럽히면 참을 수 없고, 그렇다고 몰트의 청소를 대신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몰트는 부랴부랴 자신의 짐을 여분의 공간에 쑤셔 넣었다. 아렌의 짐이 얼마 안 되는 만큼 몰트에게 할당되는 공간이 더 많았지만, 아렌의 3배나 되는 짐에 정리 속도까지 느렸으니 아렌이 훨씬 일찍 짐 정리를 마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아렌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난 잠깐 학원을 돌아다녀 볼게.”
“아, 잠깐만! 견학할 거면 나도 같이 가!”
“싫은데.”
“…왜?!”
“목이 뻣뻣한 사람이랑 같이 다녀서,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몰트를 회유해서 차후 레온나토스의 지지세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살갑게 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몰트를 이용 가치 없는 구제불능으로 보게 된 이상, 아렌이 그에게 잘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서운해하는 몰트를 두고 혼자 기숙사 밖으로 나온 아렌.
‘건물은… 스무 개 동이 넘는군.’
카르도나 국제학교는 학원도시로 불릴 만큼 학생 수가 많고 건물이 밀집해 있지만, 면적 자체가 그리 넓지는 않다.
중앙의 광장을 제외하곤 건물들이 빽빽하게 지어져 있고 층수도 3층 이상으로 높아 섬의 면적 이상으로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섬의 끝과 끝을 모두 돌아보는 데에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금은 다들 수업 중인가?’
아렌이 교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건물 안에서는 이따금 강연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 지금 시간에는 모두 다 학과 건물 안에 있는 듯했다.
아렌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학원의 외곽으로 향했다.
바닥에 반듯하게 깔린 보도블럭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가다가 바다 안으로 사라졌고, 바다 너머에는 섬을 일정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보였다.
바다 한복판에 세워진 성벽은, 학원에서 자랑하는 대로 섬을 둘러싼 채 학원을 때리는 파도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성벽은, 처음부터 바다 한복판에 쌓은 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창 수업 중인지 학교 외곽의 바닷가를 거니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고, 아렌은 얼른 웃옷과 바지를 벗었다.
“그건, 확인해보면 되겠지.”
굳이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아렌에겐 지금이 생애 첫 바다를 본 날이었다.
바닷물은 짙은 비취색으로 일렁였고, 바다 아래에 들어가서야 그 아래가 훤히 보일 것 같았다.
풍덩, 물속에 들어간 아렌.
소금 물에 눈을 끔뻑끔뻑 떴다 감았다 한 아렌은, 곧 바닷물 아래 잠겨있는 옛 시가지들이 보였다.
바닷속 옛 건물들은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학원에서 멀어져갔고, 그 끝에는 도심의 경계를 가르듯 세워진 성벽이 있었다.
지금 보이는 것보다 훨씬 높게 세워진 성벽은, 지금도 수면 위로 올라와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역시.’
물의 도시라는 이명이 있는 카르도나지만, 그 이명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슬슬 숨이 막혀왔기에, 수면 위로 올라가려는 아렌.
그때, 아렌의 시야가 점멸하는 것처럼 번쩍였다.
바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수면 위는, 마치 바다 위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환했다.
그 모습은 아름다웠고, 또한.
‘-끔찍해.’
어쩐지 그렇게 생각한 아렌이었다.
그 직후.
푸확!
누군가 아렌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다.
“…어푸! 너 뭐 하는 거야! 벌써 삶을 포기해서 뭐 하게!?”
아렌의 목을 붙잡고 바닷가로 질질 끌고가는 여자의 적갈색 교복에는 청색의 완장이 달려 있었다.
‘감독생인가? 그런데 왜 이런 시간에-’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는데, 전 딱히 죽으려고 한 게 아닙니다.”
“…뭐라고?”
“바닷속이 궁금해서, 한번 들여다보려 했을 뿐이에요.”
“뭐? 아…”
그제야 여자는 아렌이 가지런히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바라봤다.
확실히 접어서 한쪽에 얌전히 놓아둔 옷은 생을 포기하는 사람의 마지막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두 수업할 시간에 혼자 밖에서 오해받을만한 행동을 하니까 헷갈리잖아! 좀 더 조심해!”
“일단은, 죄송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아렌을 구하기 위한 선행이었고, 그녀의 교복이 홀딱 젖었기에 일단 아렌은 순순히 사과했다.
“너, 신입생이야?”
“네. 오늘 들어왔습니다. 내일부터 수업에 들어가는 아렌이라 합니다.”
“아. 제국에서 두 명이 온다고 하던데. 그게 오늘이었나?”
그녀는 물을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쭉 짜며 말했다.
“그럼 네가 아렌이겠구나. 황자의 비서관인. 그렇지?”
“…….”
그리고, 감독생인 그녀는 사감조차 모르던 아렌의 인적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