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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02화 (102/227)

#102화

황도의 외곽.

아렌이 몰디나의 검은 천막을 찾았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셨군요. 사실은 이제는 다 잊은 줄 알았거든요?”

“그쪽이야말로, 왜 안 찾아온 겁니까?”

제4 황자 가웨인에게 고용당했던 ‘진짜’ 점술가 멜로익.

아렌은 가웨인 밑에서 일하는 것을 관두고 대신 레온나토스 아래에 들어오라고 미끼를 던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그만뒀을 때는 바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동안 몰디나로부터 먼저 온 연락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구두 약속만 믿고 덜렁 쫓아갈 만큼, 전 강심장이 아니거든요. 그 제안이 정말 진심이었고 제가 필요하다면, 지금처럼 찾아올 테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몰디나가 하는 말에는 당위성 이외의 묘한 확신도 섞여 있었다.

“제가 찾아온다는 거, 그것도 점괘로 안 거예요?”

“…아뇨? 그냥 감이죠?”

‘…또 ‘감’이라.’

몰디나는 아렌과 달리 아무런 속임수가 없는 진짜 점술가다.

비록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렌이 사실 과거로 되돌아온 성인이라는 것도 첫눈에 보고 알아맞혔을 만큼, 몰디나의 직감은 뛰어났다.

“한동안 자리를 비우신다고요?”

“네. 최대 1년 정도로요. 제가 없는 사이, 황궁에서 낙일관을 운영해주셨으면 해요. 물론 레온나토스 전하의 이름으로요.”

낙일관은 곧 레온나토스의 상징. 그곳에 다른 점술가를 들이는 건 아렌으로서도 쉽게 한 선택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낙일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직접 점을 보고 싶은 거잖아요?”

“그렇죠. 낙일관은 제 이름값에 톡톡히 금칠을 해줬고요. 그러니 제가 없는 동안에도 레온나토스 전하의 낙일관은 쉬지 않아야 해요.”

어쩌면, 몰디나의 진짜배기 점술을 맛본 사람들은 돌아온 아렌을 까마득히 잊을지도 몰랐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레온나토스 진영은 여전히 기세등등함을 알려야 했다.

이미 황궁을 나올 때부터 반쯤 마음이 기울었던 멜로익은 흔쾌히 수락했다.

“음, 좋아요. 레온나토스 전하 밑에서 일해본 적은 없으니,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아직 세리엔 전하와 제대로 화해하지도 못했고.”

“고마워요. 덕분에 한시름 놓겠네요. 그런데…”

아렌은 망설였다.

최근 이따금 느껴지는 기이한 ‘감’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도 되는 질문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따금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별다른 근거도 없지만,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한 예감 같은 거요.”

“아, 물론 있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더욱요.”

몰디나는 당연한 그렇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사기로 점을 쳐왔던 아렌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감각일 뿐이다.

“그 ‘감’이라는 거, 잘 들어맞는 편인가요?”

“…네?”

몰디나는 별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저와 아렌의 점 방식은 다르지만요. 보통은 감에 연결된 채로 카드를 뒤집지 않나요? 그러니 점 또한 아렌이 말하는 ‘감’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고요. 아렌도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거잖아.’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려던 아렌은 이내 포기했다.

자세히 물어보면 되레 아렌의 점술을 의심할 테고, 애초에 아렌의 감과 몰디나의 감이 같은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답도, 도국으로 가면 있을까?’

세상의 모든 지식이 모인다는 카르도나 국제학교.

어쩌면 그곳에, 아렌이 찾는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

“사실은, 아렌 너를 너무 황궁 밖으로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

아렌이 북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서쪽 국경 너머의 도국 연합으로 보내진다.

그것도 길면 1년.

보통 누군가를 황궁 밖으로 돌리는 건, 사실상의 축출 작업이다.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표정을 보고 그 진의를 알기에 괜한 오해를 하지는 않았지만,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다.

‘최대 1년이라니. 더 빨리 돌아올 수 있는 수도 있을 거야.’

아렌을 더욱 요직에 앉히기 위한 사전작업.

요컨대 도국에 있는 대륙 굴지의 학원에서 무언가 성과를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운명석에 대한 정보와 자신의 ‘감’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덤이다.

“그런데, 혼자 학교에 가는 건 아닐 거야.”

“동행자가 있습니까?”

“마침 마차까지 제공되니까. 적적하게 혼자보다는 말동무라도 하나 있는 게 낫지 않겠어?”

“…….”

사실 별로 필요 없었다.

호위로 대동할 위병 둘과 시녀 하나. 이 정도만 있어도 불편할 일도, 적적할 일도 없을 테니까.

“몰트 치가렌. 치가렌 가문의 장남이라더군. 나이는 마침 우리와 비슷해.”

치가렌 가문이라면 아렌도 들어본 적 있는, 귀족 중에서도 중견 급은 되는 곳이었다. 그곳의 장남이라면 사실상의 후계자.

잘 연만 닿는다면 레온나토스의 또다른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혹시, 그를 한번 써보실 생각입니까?”

“아, 그런 건 아니야. 아렌. 난 몰트 치가렌의 얼굴도 모르니까. 아렌 네가 정 불편하다면-”

“아, 저는 괜찮습니다. 동행하지요.”

레온나토스는 정말 그에 대해 별생각 없는 듯했지만, 아렌의 생각은 달랐다.

레온나토스에 여전히 부족한 것은 세력.

황도 외곽에 장원을 몇 개나 보유한 치가렌 가문이라면 레온나토스의 힘이 되어주기 충분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

치가렌 가문 정도 되는 귀족의 장남이라면, 보통 가정교사를 고용하곤 한다.

아무리 명문이라도 학교에 다니는 건 하급 귀족이나 부유한 자산가, 명가의 자식들 정도.

차남도 아니고, 먼 방계도 아닌 직계 후계자가 학교에 간다는 건-

‘어지간히 밉보이는 자식이거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

*****

수확제가 끝났음에도 황도와 황궁 안에는 약간의 고양감이 잔열처럼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렌은 이미 도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

“…….”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쌍두마차 뒤에 타고 있는 건 아렌과 몰트 치가렌, 단둘뿐.

아렌도 몰트 치가렌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짧게 자른 곱슬머리에 얼굴에 잔뜩 난 주근깨의 남자아이.

“…네가 아렌이냐?”

오랜 침묵 후, 아렌에게 대뜸 건넨 첫마디는 당연한 듯한 하대였다.

아렌은 바로 납득했다.

‘과연. 가문에서도 포기할 만한 폐급이 맞군.’

아렌도 곧바로 응수했다.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워. 몰트 공.”

“바… 반말?!”

아렌의 말을 들은 몰트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르기 직전.

아렌이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황궁 안에서 난 네 부군보다도 더 높은 의전 서열이야. 공식적으로는 한 단계. 실질적으로는 두 단계 정도.”

“…….”

아렌의 말은 사실이다. 황자의 비서관은 근위기사와 동격, 황궁의 최고위 대신의 바로 아래 격이다. 황궁 안 아무 직책이 없는 자라면 대귀족 정도는 되어야 아렌과 동격이 된다.

예법에 까다로운 황궁과 사교계에서 지위고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건 큰 허물이었다.

“이… 이런 실례를-”

“실례는 무슨. 첫 만남이고, 곧 같은 학교에 입학하니 말 편하게 해도 돼.”

몰트 치가렌이 처음에 강하게 나간 것도, 자신의 심약함을 숨기기 위한 허세였음을 아렌은 금방 간파했다.

‘이런 녀석의 쭈뼛대는 존대말을 계속 듣는 것도 고역일 테니.’

아렌의 말에도, 몰트는 조금 더 고집을 부렸다.

“아,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찌 제가-”

“놔.”

“…네. 아, 아니. 알았어.”

황도에서 마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면, 당분간은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그렇고, 지금 삶에서도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던 아렌이기에 지금은 마치 작은 휴가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그래. 수확제에서 멜로익도 좀 쉬라고 말했었지. 어차피 눈치 볼 것도 없으니, 내려간 김에 잠깐 쉬다 올까?’

“저… 아렌.”

“뭐.”

“무, 무슨 과목을 배울 거야? 난 예법과 영지경영, 그리고 귀족학을 배울 거야.”

“외교와 화법.”

당장 자신에게 쓸모 있을 것 같은 과목 두 개를 적당히 말한 아렌이었다.

“아, 그렇구나. 저, 그런데 아렌.”

“뭐.”

“우리, 이제 친구야?”

“네가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

초면에 점을 봐달라는 기색이 만연했기에 아렌은 선수를 쳤다.

‘이 녀석은 영 쓸모없겠어.’

말이 없어진 아렌과 몰트를 실은 마차는 조금씩 흔들리며,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더 크고, 투박한 사용인 전용의 마차.

위에 천막을 씌운 짐마차에 더 가까운 마차에, 열 명 남짓한 사용인이 앉아있었다.

아렌을 호위할 위병 둘과 시녀역으로 동행하게 된 멜로익,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몰트 치가렌의 사용인이었다.

두 위병 옆에 다소곳이 앉은 멜로익.

그때, 옆에 앉아있던 치가렌 가문의 하녀가 말을 걸었다.

“얘! 너, 혹시 아렌 님의 하녀니?”

‘…아렌 ‘님‘, 이라고?’

“저희 아렌 공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멜로익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렌 님의 점괘가 그렇게 신통하다며? 황궁 안에서도 무료로 봉사해주신다는 게 정말이야?!”

“얼마나 영험한지 순번이 한 달은 넘게 밀려있다던데?”

“너도 점을 본 적 있어? 직접 수행까지 하는 사이니 당연히 본 적 있겠지? 부럽다!”

“…….”

멜로익이 대응하지 않는 동안 온갖 말이 다 나온다.

사실 멜로익은, 꾸미지 않은 날것의 아렌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아렌도 별다른 조건 없이 그녀의 점을 잘 봐주는 편이긴 했지만.

‘…황궁에서도 거의 점괘에 시달리다시피 했는데, 황궁 밖에서도 점을 봐야 한다고?’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물어보기는 하겠지만, 유학하러 와서까지 점괘를 봐주시진 않을 것 같은데요? 기대하시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아아, 역시 그런가?”

실망하는 하녀들.

“그래도, 괜찮다면 일단 물어보기라도 해 주겠어?”

“네. 정말 물어보는 정도겠지만요.”

어쩌면, 아렌에게 철부지 도련님의 정보가 필요할 수도 있었으니. 멜로익은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뒤로도 마차는 내리 일주일을 달려, 제국의 국경을 넘었다.

대륙의 서부 해안은 복잡한 해안선과 험준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침략이 쉽지 않았고, 방어하기 쉬운 지형에 사람들이 모여 도시가 되면서 19개의 도시국가 연합이 만들어졌다.

마차는 계곡과 계곡 사이, 높이가 30미터는 족히 되는 석제 고가도로를 지났다.

누가 세웠는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예전부터 이 자리에 서 있던 석제 다리.

전화(戰火)를 오랫동안 비껴간 땅답게 고대인이 지은 시설들이 도처에 있었다.

강의 상류를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버린, 산처럼 거대한 석조 저수지.

강 하구에 설치되어 바닷물의 역류를 막는 금속 수문.

그리고, 길 끝에 다다른 물속에 반쯤 잠긴 건물들.

수중도시 카르도나였다.

“와, 저것 봐. 건물을 일부러 물에 잠기도록 지은 건가?”

몰트는 얼빠진 소리를 했다.

“…수백 년 전에는 수위가 훨씬 낮았다던데.”

해수면이 올라 길의 태반이 물에 잠기고, 운송과 이동을 대부분 배에 의존하는 도시.

하지만 그렇기에 시민들은 배의 조작에 능숙하고, 물길만 있다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기에 교역에 유리한 대도시가 되었다.

곧 잠기지 않았던 마지막 대로마저도 물에 잠겼고, 마차에 탔던 아렌과 수행인들은 곤돌라에 올라타 도시 외곽의 섬으로 향했다.

원래는 야트막한 언덕이었을 땅 위에는 둘러쳐진 담장과 학교 건물, 기숙사가 하나의 소도시처럼 늘어서 있었다.

대륙에서 첫 번째 손에 꼽히는 명문, 코르도나 국제학교였다.

배는 바다 위로 돋아난 듯한 담장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문 위 아치형으로 장식된 문구가 아렌의 눈에 들어왔다.

[지식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저게 교풍인가? 재미있군.’

사방이 물로 가로막혀 있기에 곤돌라 없이는 학교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구조는 ‘자유’와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아렌은 오히려, 그 역설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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