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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01화 (101/227)

#101화

제국의 제1 황자가, 황궁 한복판에서 사람의 목을 잘랐다, 라는 소문은 다음날 황궁 안에서 작은 화제가 되었지만, 그 이상 크게 번져나가지는 않았다.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는, 당시 그곳에 있던 건 레온나토스와 아렌, 몇몇 궁인들 뿐이었고 궁인들은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의 험담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나마 소문을 퍼트릴 ‘자격’이 되는 건 레온나토스 정도지만, 나쁜 소문의 진원지가 되고픈 생각이 없는 건 레온나토스도 마찬가지.

각 황자들 역시 곳곳에 심어둔 정보원으로 언젠가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라이안의 대책은 그들이 나서는 것보다도 더 빨랐다.

“…황궁에서 죽은 사람, 도국 연합의 밀정이었다면서?”

“실제로 목을 자르니, 비가 귀신처럼 멈췄다던데?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바다 건너 대륙에는 마녀들이 산다며? 마녀의 술법이라도 되는 것 아냐?”

만약 가웨인이 황궁 안으로 사람을 끌고 와 죽였다면 흉흉한 소문한 하나 더 적립했겠지만.

같은 행동이라도 라이안이 하니 확실히 달랐다.

‘…그렇군.’

그리고, 아렌은 라이안이 자신을 죽인 자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비 나그네를 죽이는 데에 별로 망설임이 없었어.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고, 끝도 아니겠지.’

라이안의 믿음대로 ‘비 나그네’라는 청년은 운명석 계약자였고, 그가 죽으니 흑옥 거울이 깨졌고 비가 멈췄다.

하지만 첫 번째 삶의 아렌은 정말 무고한 사람이었다.

물론, 정말 천운으로 물려받은 반지가 운명석으로 만들어지긴 했었지만.

‘…그러고 보니 내 반지도 그 이후에 깨진 거지. 그렇다면, 첫 번째 삶의 라이안은 정말 자신의 오해를 진실이라 믿었겠군.’

첫 번째 삶에서의 잘못을 지금 사람에게 물을 순 없다.

이미 아렌이 5년 전에 내린 결론이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참을 수 없다.

라이안을 제외하면 운명석에 대해 단서가 있는 건, 아렌의 주군인 레온나토스 정도.

그런 그에게조차 운명석이라는 존재는 생소했다.

“…아렌. 형님이 말한 운명석은, 적어도 황궁의 도서관에는 없는 내용이야.”

“네. 아마 책에 적혀있는 지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

5년 전, 동부 국경 너머의 멸망한 왕국 아티스의 수도에서 겪은, 죽어서도 움직이는 망자들.

그, 매개체는 노인의 흑옥으로 만들어진 피리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흑옥 중 일부에 힘이 깃든다는 것을 안 것도 그때. 하지만 그 외의 정보들은 누군가 일부러 말소하기라도 한 듯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라이안 형님은 왜 연회장까지 데려와 그 자를 죽였을까.”

“그야, 경고하는 차원이 아니었을까요.”

“경고하는 차원?”

“네. 눈가를 콕 지목해서 하는 건 아니었겠지만요. 어쩌면 황자 전체에게 내린 경고일지도 모르죠, 운명석인가 뭔가 하는, 저런 사이한 것의 힘을 빌리면 안 된다는 경고 말이죠.”

“설령 라이안 형님이 그 신비한 능력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고 쳐도,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굳이 죽여야만 했을까?”

“라이안 전하에겐 어쩌면, 의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죠. 실재하는 위협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아렌 너도 그리 생각하는 건가?”

“단지 그렇게 생각하신 건 아닐까, 유추해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라이안이 한 경고는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황자들 중 태반은 운명석에 대해 몰랐을 테니까.

레온나토스도 5년 전 망자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쉬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게, 아렌.”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집무실을 나왔다.

이제, 수확제 6일째의 아침.

아직 땅이 조금 젖어있긴 했지만, 연달아 내린 비 때문인지 시민들은 더욱 활기차게 남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건, 황궁 안도 마찬가지.

라이안의 돌발행동은 단순한 소동으로 끝나는 듯했다.

어제의 흔적이 깨끗이 치워진 연회장을 곁눈질하며, 아렌은 내원 시종장의 부름대로 알현장으로 향했다.

만나자마자 내원 시종장이 대뜸 한 한마디.

“내가 졌다.”

아렌은 잠시 큰 눈을 끔뻑끔뻑 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녀석의 점괘 말이다. 역시 꽤나 신통하더군. 노란색 간판의 여관에 숨죽이고 있던 비를 뿌리는 남자라. 허 참. 그런 것이 존재하다니.”

사실은 아렌이 대충 주워섬긴 말이 어떻게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무언가 맞아 들어갈 때 ‘우연’보다는 ‘필연’이기를 원하고, 그런 바람이 점괘를 믿게 하는 원동력이다.

특히 지금 내원 시종장처럼 아렌의 점괘를 의심하고 있을 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면, 강한 부정론자도 단번에 회유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토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한번 받아들이면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법.

“어쩌면 나도, 네 점괘를 종종 이용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영광입니다.”

아렌에겐 의외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모의전에 승리한 것도 축하하네. 자네에겐 꽤나 바쁜 수확제가 된 것 같지만. 앞으로는 어쩔 텐가.”

“…모처럼 비가 그쳤으니, 잠깐 축제를 다녀볼까 합니다.”

라이안은 운명석 계약자를 극도로 혐오한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목을 잘라버릴 만큼.

그리고, 지금 황도 안에는 또 다른 운명석 계약자가 있었다.

‘아르테에게 가봐야겠어.’

*****

응접실을 나온 아렌은, 곧바로 성을 나갈 준비를 했다.

황궁에서도 항상 아렌 곁을 수행하는 멜로익이 대뜸 물었다.

“어딜 가려고?”

“마침 비가 그쳤잖아? 잠깐 거리를 다녀보려고.”

“…또,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거지?”

어째서인지 멜로익은 아렌이 아르테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뭐, 겸사겸사? 다른 호위를 데려가는 것도 뭣하니 너도 올래?”

“…글쎄. 난 별로 안 가고 싶은데. 위병 아무나 데려가지?”

하지만, 아렌이 아르테를 만나는 장면은 최대한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그래? 그럼 나 혼자 다녀오는 수밖에. 어차피 옷은 갈아입을 거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

“그럼 나갔다 올게? 전하께서 찾으시면 내가 혼자 나갔다고-”

“아, 알았어! 나도 나가면 되잖아!”

멜로익은 급하게 외출복을 겹쳐 입었다.

그리고, 아르테가 머물렀던 여관을 다시 찾은 아렌.

하지만 그곳에 아르테는 없었다.

“…아, 그 하얀 인상의 아가씨? 그 아가씨라면 어제 급하게 떠났는데?”

“…급하게요?”

“그래. 아직 축제가 한창인데 벌써 나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기억하고 있지. 설마 계속 비가 와서 실망한 건가? 그렇다면 아깝겠어. 오늘은 이렇게 맑은데 말이야!”

여관 주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급하게 장소를 옮겨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 어쩌면, 뭔가 위협을 감지한 걸지도.’

어쩌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도 아르테에겐 부담일지 몰랐다.

물론, 교국의 사람이 제국의 축제장소에 있는 것 자체는 문제되지 않지만, 그녀는 신분을 속이고 황궁에 초대된 전적이 있으니.

“아, 그러고 보니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있으면 말해 주라더군?”

“…뭘요?”

“예감, 전해줘서 고맙다고.”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몸을 사리라고 전해줬었다.

아렌은 형언하기 어려운 불길한 기분을 느꼈고, 그것을 뭉뚱그려 ‘예감’이라며 그녀에게 전해줬다.

그녀는 아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독심술로 위험을 먼저 감지했거나. 어쨌건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겠지.’

황도 안에서 라이안 황자만 만나지 않는다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찾는 사람이 없네?”

그리고, 멜로익은 어쩐지 안도한 기색이었다.

‘…왜 안도하지? 아무튼.’

어쨌건 걱정을 하나 덜었으니, 아렌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된 거, 축제 구경이나 좀 더 하다 돌아갈까?”

“음, 네가 그러고 싶다면.”

아렌과 멜로익은 모의전을 하며 누볐던 길을 그대로 지났다.

그때는 주변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고, 지금처럼 맑은 하늘도 아니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음식은 누구든 마음껏 집어먹을 수 있었고, 가정집에서 내놓은 음식은 빨리 동날수록 그 집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뜻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이 음식을 가져갈수록 요리를 내놓은 부인은 화색이 되어 다음 요리를 내놓았다.

“음, 이건 정어리 파이인가? 맛있네.”

우물우물.

모처럼이지만, 아무 생각하지 않고 주변 길을 걷는 아렌.

“…이제 좀 여유가 생기나 봐?”

“응?”

멜로익은 가판에서 주워온 설탕뿌린 빵을 한 움큼 베어 물고 말했다.

“그동안 얼굴이 엉망이었어. 마치 무언가에 계속 쫓기는 것처럼 말야. 뭐가 그렇게 조바심 나는 거야?”

“…….”

‘이런.’

다른 사람의 속내를 읽되, 자신의 속내는 숨기는 것이 점술가의 덕목이었다.

그 간단한 것조차 잊을 만큼, 알고 있던 날씨가 바뀐 것에 대해 당황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날씨가 바뀐 이유를 알기에 고민은 덜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운명석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라이안. 이기는 건 둘째치고, 내가 운명석 계약자인 걸 알면 죽이려 들겠지?’

라이안은 운명석에 금이 가 있으면 계약자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비 나그네의 흑옥 손거울도 죽자마자 금이 간 것을 보면 아마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렌은 한번 죽었기 때문일까, 이미 반지에 금이 가 있어 라이안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아르테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차피 나한테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겠지만 말야. 무리는 하지 말라고.”

“그래, 그럴 거야. 무리해서 끝날 일이라면 얼마든지 무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제1 황자 라이안이 운명석에 대해 알게 된 곳은, 아마 라두크 도국 연합에서.

아렌으로선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아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가?’

북부나 동부나, 첫 번째 삶의 아렌에겐 생소하기만 한 장소였을 뿐.

결국은, 운명석에 대해 더 알아둬야 했다.

어째서 라이안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는지, 혹시 운명석에 또 다른 비밀은 없는지.

수확제의 마지막 날.

비가 오는 동안 뿌리지 못했던 종이 꽃잎들이 한꺼번에 뿌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을 어지럽혔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아렌은 어쩐지 가까운 시일 내에 동쪽으로 향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또 예감인가?’

점술가로 살아가는 아렌이지만, 누구보다도 점술의 허상을 잘 알기에 아렌은 예감 또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

“…네?”

“못 들었나? 카르도나의 국제 학원에, 단기 유학을 다녀오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는데.”

수확제가 끝나고 며칠 후.

레온나토스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기한은 길어도 1년 정도, 어쩌면 그보다 빨리 돌아올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이건 네게도 좋은 기회야. 빠르든 늦든 널 다른 직책에 등용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짧더라도 유학 경력이 있다면 승진 하더라도 충분할 테니까.”

카르도나는 라두크 도국 연합의 중심 도시 중 한 곳.

운명석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던 아렌에겐 기회였다.

“…저야 보내만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이곳을 비워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제 아렌의 점괘는 좋든 싫든 레온나토스 진영의 커다란 이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때에 자리를 비우는 건, 원래 가졌던 레온나토스 진영의 색깔이 흐려지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아.”

“왜 그러지, 아렌?”

“…혹시, 제가 유학 가 있는 동안 말입니다.”

아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혹시 다른 점술가를 고용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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