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100화 (100/227)

#100화

아르테의 말에 아렌이 눈가를 찌푸렸다.

“비 나그네? 그건 무슨 설화 같은 건가?”

“글쎄? 그런 것치고는 최근에 회자되는 것 같았어. 원래 도국 주변의 해안선이 복잡하잖아? 최근 몇 년 동안 날씨가 더 변덕스러웠던 거겠지.”

아르테의 말이 상식적이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비가 내리는 나그네라니.

우는 아이를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가깝겠지만, 아이는 흘려듣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원래라면 내리지 않았어야 할 비는, 지금도 세차게 내리고 있었으니까.

아렌이 과거로 되돌아왔기에 변하는 것들은 존재한다.

사람의 태도나 관계, 나라와의 관계 같은 것들은 달라지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한 사람이 과거로 돌아온 것만으로, 날씨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아렌이 첫 번째 삶과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었다고 내리지 않았던 폭우가 내린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방문하는 곳마다 비를 내리는 나그네를 연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뭐야, 표정 왜 그래, 아렌?”

“…뭐가요?”

“너 혼자 알아채고 납득한 표정이잖아? 기왕이면 알려주지? 난 네 마음은 못 읽거든?”

“음… 비 나그네라는 사람 말이에요.”

“그 뜬소문이 왜?”

“어쩌면 운명석 계약자일지도 몰라요.”

아르테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곤 머리를 낮춰 물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비를 뿌리는 능력이라고? 그게 사실이라 쳐. 왜 그런 능력을 얻었대? 운명석은 대부분 그 사람이 원하는 힘을 준다고.”

“…그거야 모르죠.”

“넌, 그런데도 비 나그네가 진짜라 생각하는 거지? 어째서?”

“…….”

“뭐야, 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사이에 그러기야? 서운한데?”

‘우리 사이가 뭔데, 우리 사이가.’

아렌의 사정까지 전부 다 말해줄 순 없겠지만,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 납득할 정도로는 말해주기로 했다.

“제가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 건 알겠죠.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어떤 뜻인지 모호한 것도 있으니 제 능력은 제한이 많아요. 하지만, 또렷하게 보인 미래가 완전히 빗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어쩌면 그게-”

“-운명석 계약자라서 네 능력이 빗나간 거다? 오늘이 맑은 날을 예견했나 봐?”

아렌의 둘러대기는 그럴듯하게 성공한 듯했다.

“…그래서? 운명석 계약자가 인구 50만의 도시에 있다 쳐. 그 사람을 찾을 거야? 지금은 평소 인구의 두 배도 넘을 텐데?”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누군가의 도움만 있다면요.”

아르테가 멜로익의 마음을 읽어 아렌을 빨리 찾아낸 것처럼, 그 ‘비 나그네’라는 자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다면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아렌에게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죠. 전 단지, 제 예견과 다른 날씨길래 원인을 찾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 ‘비 나그네’라는 사람을 찾으면 궁금증은 해결되겠지만, 고작 궁금증 하나 때문에 백만 명을 하나하나 찾아볼 수는 없으니까요.”

“흠, 그래? 하긴, 그럴 만하지. 그래도 좀 아쉽네.”

“아쉬워요?”

“또 다른 운명석 계약자라는 거잖아?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어떤지, 좀 궁금하긴 했거든?”

“그럼 혼자서 찾아보시죠. 제가 끼나 안 끼나 어차피 별반 차이는 없을 테니까.”

그때.

여관 1층의 주점으로 우의를 쓴 남자들이 들어왔다.

‘…누구지?’

단단하게 훈련된 근육에 목적성을 띤 굳은 얼굴.

평범한 여행객은 아니었다.

“어라? 황궁의 병사인데?”

아르테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낮게 소곤거렸다.

주점 안 사람들의 약간의 시선을 받으며, 우의를 입은 사복 차림의 병사는 주인에게 가 품속의 종이를 보였다.

“…”

그리고, 들어왔던 것처럼 말없이 나가는 병사.

굳이 황궁에 비밀로 이곳에 온 건 아니지만, 혹시나 누군가에게 들키면 아르테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아렌은 주점 주인에게 물어보는 대신, 아르테에게 물어보기를 택했다.

“무슨 내용이에요?”

“으음… 글쎄. 누구를 찾는다는데?”

“누구를 찾아요?”

“종이 내용은 인상착의와 특징이 적힌 종이였어. 뺨이 홀쭉하고 이마에 상처가 있는,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서해안 사투리를 쓰고 항상 젖어있는 남자를 발견하면 관군에 보고하라는 내용인데… 뭐지?”

서해안 사투리면 도국 연합의 구역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당신은 몸을 사리는 게 낫겠어요.”

“어머, 그건 네 점괘야?”

“아뇨.”

아렌은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한 낌새를 느끼며 말했다.

“뭔가가 그냥 위험해 보인다는, 그냥 감이에요.”

*****

굳이 빗속을 누벼가며 아르테를 만나고 온 성과는 있었다.

황궁에 돌아오면서도 생각했지만, 비 나그네에 대한 소문이 정말이라면 꽤나 나라를 통치하는데 제격인 능력일 수도 있었다.

당장 가뭄이 든 땅에 비를 뿌릴 수 있을 테고, 전장의 땅을 일부러 질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당사자에게는 괴롭겠지만, 타인이 활용할 가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너무 튀는 능력이고, 평소엔 계속 떠돌아다녀야 하겠지만. 역시, 아르테 힘을 빌려 찾아볼 걸 그랬나?’

아렌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수확제 중에는 황궁에서도 곳곳에 쉬지 않는 연회가 벌어진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음식과 음악이 끊이지 않는 정도.

이미 탕에 들어가 몸을 데운 레온나토스가 음식을 접시에 덜고 있었다.

“아, 아렌이군. 밖에 무슨 볼일이 있었다면서?”

“아, 네. 정보원이 황도에 들렀다 해서 잠시 보고를 받고 왔습니다.”

“정보원?”

“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렌은 대륙 곳곳에 자신의 정보원을 심어뒀으니, 레온나토스는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군, 아렌 너도 탕에 몸을 담그고 오지 그랬나.”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몸이 식은 정도가 딱 적당하기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비가 그칠 줄을 모르는군. 설마하니 이번 수확제 내내 내리지는 않겠지?”

“설마요. 수확제 기간 중 이틀 연속으로 비가 내린 적은 여태껏 없었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아렌은 불길한 시선을 하늘에 보냈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불길한 예측은 적중했다.

*****

축제 3일째에 시작된 비는 4일째와 5일째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수확제 동안 하루 정도 비가 내린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틀 연속으로 비가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3일 연속으로 내리는 비라니.

황도 안의 축제 분위기는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설마 비 나그네, 황도에 정착하거나 하진 않겠지?’

어쩌면 그를 찾아 황도 밖으로 쫓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이대로 비가 계속 내린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사항.

황도의 거리 밖의 축제가 중단됐기에 황궁 안의 연회장은 더욱 화려하고 성대하게 차려졌지만, 계속된 비의 영향 때문인지 연회장 안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레온나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요즘 라이안 형님이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자주 황궁 밖을 거니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습니다만, 그게 누구인지는-”

그때였다.

-콰앙!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이,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 사람이 있었군. 방해해서 미안하다. 금방 끝날 테지만.”

라이안의 병사들은 한 청년을 연행한 채였다.

마른 체구에 홀쭉한 뺨, 그리고 이마의 상처 자국.

‘황도의 여관에 다발로 뿌렸다는 전단지의 인상착의.’

병사는 넓은 연회장 중앙에 청년을 아무렇게나 굴렸다.

라이안은 주변에 다른 이가 없는 것처럼 오직 청년에만 집중했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네놈, 도국에서 ‘비 나그네’라 불리는 자, 맞나?”

“무, 무무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잘 모르겠다? 그럼 운명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군.”

“운명석이란, 그게 무엇입니까?”

“그럼 흑옥에 대해서는?”

멈칫.

끌려온 청년은 처음 흠칫했고, 라이안은 날카롭게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라이안은 병사들의 손에 들린 장검의 검집을 뽑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나며 빠른 목소리로 떠벌렸다.

“자, 잠깐만요! 저는 도국의 사람입니다! 절 죽이면 외교 문제가 될 겁니다!”

“그래? 도국에선 자네의 수배령을 내렸을 텐데? 자네로 인해 도국 연합이 입은 총 피해 추산은 제국 금화 삼천 닢이 넘어.”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검은 돌과 계약하지 않았나.”

“…….”

아렌의 눈에는 보였다. 이미 라이안은 마음을 굳혔고, 풍요롭기 이를 데 없는 연회장 안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임은 자명했다.

‘…잠깐만. 저대로 죽이는 것보다는-’

아렌이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도 ‘비 나그네’의 이용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죽이느니 살려두고 두고두고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잠-”

아렌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서걱!

라이안의 검은 비 나그네의 목을 실로 깨끗하게 잘라냈다.

앉은 채 목이 잘린 나그네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지며,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에 따라 간헐적으로 솟구쳤다.

잘린 목은, 연회장의 깨끗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혀, 형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레온나토스는 조금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세상에는 써선 안 되는 힘을 쓰는 자들이 있다. 요사스러운 돌의 힘을 빌린 자들 말이다.”

“이 자가 말입니까? 제 눈엔 평범하게만 보입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인간의 이치를 벗어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은, 남김없이 죽여둬야 한다. 그래야 제국의 뒤탈이 되지 않아.”

“…….”

“이미 도국은 그러고 있었다.”

풀썩, 목이 잘린 채 앉아있던 나그네의 몸이 뒤늦게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흑옥 손거울이 덜그럭, 바닥에 뒹굴었다.

“…….”

“아, 아렌도 있었군.”

“네, 전하.”

“이번에도 네 점괘가 들어맞았더군. 최우선으로 노란색과 관련된 여관을 먼저 알아보게 했거든. 간판이 노란색이었던 여관에 있었다. 역시, 노란색이 길한 색이었단 말야.”

라이안의 말을, 무엄하게도 아렌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렌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온 잘린 목.

거기에, 아렌은 자신의 잘린 머리가 겹쳐서 보인 탓이다.

기시감.

아렌이 목이 잘렸을 때, 단상 위에 있던 건 황제, 그리고 당시 황태자였던 라이안이었다.

‘단지 운명석 계약자로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고작 이런 이유로?’

만약, 라이안이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을 운명석 계약자로 의심했다면 어땠을까.

라이안은 지금의 아렌을 의심하지 않는다. 흑옥 반지에 금이 가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하지만, 첫 번째 삶에서 아렌의 흑옥 반지엔 금이 가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쩌적!

메마른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던 나그네의 흑옥 손거울에 금이 갔다.

그와 동시에 단숨에 비가 잦아드는, 창문 밖의 하늘.

맑아진 하늘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회장 안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아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이었나? 날 죽였던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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