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적은 단단하게 밀집해 있었다.
그 안쪽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자진해서 포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낮안개 기사단과 발커스, 더글라스의 기량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한 점을 노린 돌입은 곧바로 포위당해 무마되었을 것이다.
“파고 든다! 저지해!”
좁고 긴 쐐기 형태로 아렌을 중앙에 둔 채, 가마 위에 탄 엔지를 향하는 아렌부대.
그건 검은 두건 부대의 후방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하를 지켜라! 더 두텁게 막아!”
“이쪽도 마찬가지다! 거긴 알아서 해!”
양동작전과 대장이 둘이라는 데에서 오는 한순간의 혼란.
그 두 가지를 이용한 기습이었지만, 아무리 강한 고수라도 수적 우위라는 단순하고 강력한 물리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렌을 에워싸고 보호하던 기사들이 하나둘 두건을 잃었다.
“아, 젠장!”
그리고 눈앞의 두 명을 내리 상대하던 발커스 또한 뒤쪽에서 몰래 접근한 손에 두건을 빼앗기곤, 분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어이, 힘내라고! 강한 고수 양반!”
이제 아렌을 지켜주는 강한 보호막 따위는 없다.
더글라스와 다섯 명의 기사가 아렌 주위의 전부.
기사들의 몸을 비집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손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그 대신이랄까, 더글라스의 돌파력에 힘입어 아렌 부대는 정말 가마의 지척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더글라스는, 포위되어도 여전히 고수였다.
“고수다! 이 자가 더글라스 경이다!”
단번에 서너 명의 병사들의 목검을 쳐내는 더글라스. 포위되자 예전처럼 날뛰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상대를 압박해가고 있었다. 천천히, 포위망을 유지한 채 가마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더글라스.
하지만 끝은 다가온다.
끝끝내, 더글라스는 검은 두건 병사들에게 짓눌리듯 두건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입니다, 전하!”
아렌을 향해 사방에서 손이 날아오기 직전, 더글라스의 외침.
이내 더글라스는 허리를 숙였고, 아렌은 허리 숙인 더글라스의 등을 밟고 단숨에 뛰어올랐다.
목표는 포위망 너머의 가마 위, 제2 황자 엔지였다.
아렌은 간신히 가마의 끝부분에 엎어지다시피 착지했고, 그 앞에는 의자에 앉은 엔지의 발이 보였다.
“레, 레온나토스?!”
단숨에 두 명분의 체중이 가해진 가마가 휘청거렸고, 아렌은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자신까지 전투에 나설 거라고 생각지 않은 우의 차림의 엔지에겐, 목검 한 자루조차 없었다.
“이제 끝입니다, 형님.”
빠악!
아렌이 힘껏 휘두른 탄성 있는 훈련용 목검이 제국의 제2 황자 엔지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끄그극!”
엔지의 목이 푹 꺾이며, 입에선 꼴사나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이 아렌은 재빨리 황자의 두건을 벗겼고,
“백팀이 이겼다!”
“가면부대의 승리다!”
와아아!
2층에서 모의전의 결말을 끝까지 지켜본 시민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끄으윽.”
휘청거리며 가마에서 내려오는 엔지.
아렌 역시 가마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아렌은, 아직 가면을 벗고 있지 않았다.
‘…이겼어.’
승리한 백군의 가려진 얼굴 속에는 미소가, 패한 흑군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짙게 깔렸다.
“성공했구나!”
그리고, 뒤쪽에서 흑군의 신경을 분산시켰던 레온나토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여전히 가면을 쓴 레온나토스를 보고, 엔지의 눈이 변했다.
“누가 레온나토스지? 앞에 있던 너냐? 아니면-”
아렌이 재빨리 나서며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다, 아렌. 모두 아렌 녀석이 뒤에서 애써준 덕분입니다, 형님.”
“…정말 저 녀석이 아렌이냐? 지금 당장 가면을 벗어볼 수 있겠지?”
“…….”
“…….”
약간의 정적이 어색해지기 직전이었다.
“전하! 몸이 식습니다! 어서 비를 피하시지요! 아렌, 네놈도 빨리 들어와라!”
“옥체를 보존하셔야지요!”
더글라스와 발커스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위를 가렸다.
한순간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두 기사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만! 난 가면을 벗으라고 했다!”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두 기사에게 가려진 사이, 아렌은 쥐고 있는 검은 두건을 몰래 레온나토스에게 넘겼다.
레온나토스도 사태를 이해하고 자연스레 두건을 받아들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대답하는 레온나토스.
“가면을 벗어보라고 말했다!”
“아, 잊고 있었습니다. 가면을 쓰고 형님을 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두건을 바꿔든 레온은 당당하게 가면을 벗었다.
“제게 생소했던 모의전이라, 너무 힘이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못난 동생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훈련 중에 일어난 일에 사과가 어디 있겠나.”
일개 가신인 아렌이 황자의 머리에 전력으로 목검을 후려치는 건, 자칫 큰 문제가 된다.
훈련 규칙상으로야 문제가 없겠지만, 규칙과 감정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똑같은 일격이라도 황자,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동생의 일격이라면 문제의 대부분은 희석된다.
방금 아렌은 꽤나 위험한 강을 건넌 셈이었다.
“…휴!”
뒤로 물러난 아렌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 자식아. 그렇게 힘껏 내리치면 어떡하냐? 넌 목숨이 두 개라도 되냐?”
“그러게요.”
확실히, 지금 두 번째 목숨을 살고 있긴 했다.
시민들은 2층 창문에서 승자를 축하하는 꽃가루를 던졌다.
하지만, 흩날렸어야 할 꽃가루는 비에 맞아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꽃가루는 얼룩덜룩하게 돌로 짜맞춰진 바닥을 더럽혔다.
*****
레온나토스와 엔지는 비에 홀딱 젖은 채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자들을 위한 탕이 미리 데워져 있고, 병사들도 훈훈하게 난방한 방에서 몸을 닦고 물기를 말렸다.
“수고했다, 레온나토스. 이긴 모양이군.”
탕에 들어갈 준비를하는 레온나토스에게 제1 황자 라이안이 다가와 치하했다.
“그런데, 이왕 싸울 거면 광장에서 하지 그랬나. 설마 길 안으로 들어갈 줄이야. 덕분에 승패 결과를 설명으로만 들어야 했잖나.”
“감사합니다, 형님. 저로선 이기는 게 고작이어서 다른 방법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네가 직접 달려들어 엔지의 두건을 빼앗다니. 모의전 중에서도 꽤나 극적인 결말 아니냐. 직접 본 사람들은 좋은 구경을 했겠군.”
라이안은 방의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도 창밖에는 거센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빗줄기 기묘하지 않나?”
“기묘하다고요?”
“그렇게 맑았던 하늘에, 이리도 갑작스레 비가 내린다니 말이야.”
“아,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아렌도 정작 오늘 날씨를 예견했으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 자신의 점괘가 틀린 줄 알았으니까요.”
“호오, 아렌이 그런 것까지 예측했었나? 그러고 보니, 내원 시종장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지.”
“그런가요?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만?”
“대강 물과 관계된 소동이 있을 것이다,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고 길한 색깔은 노란색이다, 였다지?”
“물이라… 역시 이 비를 일컫는 거겠죠?”
“아마도… 아무튼 난, 며칠간 시내를 좀 돌아다녀 봐야겠구나.”
“…? 그러시지요.”
라이안은 표정이 굳은 채 물러갔다.
그리고.
상체를 벗어던진 채 가운을 걸친 엔지가 다가왔다.
반쯤 벗겨진 머리의 이마 부분은,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이것 좀 보라고. 너무 세게 때렸잖아, 아렌.”
“아… 정말 면목 없습니다, 형님.”
“젠장, 집어치우라고. 사과를 받으면 더 멋쩍어진단 말이다!”
엔지는 툴툴댔지만, 진지하게 책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아무튼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패배를 인정하지.”
“저야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작다면 작은 승리.
하지만 이걸로 조금이나마 엔지의 도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엔지가 마음속 깊이 패배를 인정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레온나토스를 정면으로 도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고작 모의전에서 진 것으로 앙심을 품은 속 좁은 인간이 되고 마니까.
엔지는 탕에 몸을 담그러 떠났고, 몸을 닦으며 탕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더글라스 경과 발커스 경들도 같이 들어가지. 그런데, 아렌은?”
“아, 아렌 공이라면 잠깐 볼일이 있다고 시내로 나가본다고 했습니다.”
발커스가 대답했고, 레온나토스는 무심코 창밖을 올려다봤다.
“…나가본다고? 이런 날씨에?”
*****
거센 빗줄기에 거리에서 행해지는 축제의 대부분은 정지 상태였다.
음식 가판도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집집이 수 놓인 여러 장식들도 비에 젖어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결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아렌은 우의를 입고 돌아다녔다.
곁에는 시녀이자 암살시종인 멜로익도 함께였다.
“…아렌. 슬슬 대답해주지? 왜 날 데려온 거야?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이 날씨에?”
“이유가 있긴 해. 하지만 알려줄 수는 없어.”
“…흐음.”
“사실은, 여기 어디에 있는 누구를 찾고 있거든?”
“누구를? 지금 황도에 있는 사람은 아마 100만 명이 넘거든?”
“실은 그게 비밀이라서.”
“…그럼 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정말 날 왜 데려온 거야?”
투덜대는 멜로익을 데리고, 아렌은 황도의 여러 여관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다.
몇 번째의 여관인지도 헷갈릴 때쯤.
“…이봐.”
멜로익은 조용히 경계했지만, 아렌을 부른 사람은 그가 찾던 당사자, 아르테였다.
“…나리, 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교국의 사절 자격으로 왔었던 것을 아르테는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 아르테. 잠깐만 자리 좀 피해주겠어?”
“…….”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녀는 군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아르테는 아렌을 여관 1층 식당의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머리 좋네. 날 무작정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효과적이었어.”
아르테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지만 단 하나, 같은 운명석 계약자의 생각은 읽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아렌은 멜로익을 동행시켰다.
‘아렌’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르테의 속마음을, 혹시나 멀리서 스쳐 가는 아르테가 감지할 수 있도록.
“그런데 무슨 일이야? 뭔가 급해 보이는데. 그렇게 비를 맞아가면서 말야.”
“이 비 때문이에요.”
“…뭐?”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이 비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것 없어요?”
“…대체 무슨 소리야? 비는 비일 뿐이잖아?”
아르테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요. 축제 중 지나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었잖아요?”
“음….”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생각을 낱낱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르테의 능력이다.
그 능력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아르테의 생각을 한순간에 읽고 아렌을 찾은 것을 보면, 꽤나 광범위한 독심술이 가능한 것 같았다.
“…왜 고작 비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건지는 모르겠고, 이 얘기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르테는 영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축제가 한창이니, 수도 곳곳에 교국과 도국 연합의 사람들도 많았어.”
그야 그럴 것이다. 잠재적 적국이라도 국경을 봉쇄한 것은 아니니까.
“특히 도국 연합 사람의 생각이었는데. 마른 하늘에 갑자기 내리는 비는, 최근 몇 년간 도국 연합 곳곳에서 종종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고. 아마 조금 거센 여우비 였겠지만… 도국에서는 곧잘 거론되는 괴담도 있다더라고.”
“괴담?”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어.”
“‘비 나그네가 여기까지 온 건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