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정말, 지독하게도 쏟아지는군….”
제2 황자 엔지는 우의를 쓴 채 가마 위에서 투덜거렸다.
격하게 움직일 일 없는 엔지는 아지기 우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병사들은 이미 급하게 우의를 벗은 뒤였다.
“우의를 준비하라는 것, 결국 허위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었나?”
가마 곁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엔지의 비서관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우의를 준비했다가 벗게 한 것도 일부러였을까요?”
“설마, 자신들도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그런 짓을 한다고?”
“만약 폭우가 내린다는 점괘가 사실이었고, 단지 이쪽을 기만하기 위해서 자신들도 우의를 벗은 거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엔지는 허튼소리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점점 비서관의 말이 사실처럼 들렸다.
두 집단이 완전히 같은 상황이더라도, 주도권을 쥐고 스스로 선택한 쪽의 심리적 타격이 훨씬 덜하기 때문이다.
엔지 진영이 완전히 모르고 있다가 비를 맞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첩보를 입수해 적과 마찬가지로 우의를 준비했음에도 계략에 놀아나 우의를 벗은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대로 승전 광장으로 다시 돌아가, 벗어놨던 우의를 입는 것은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미 병사들을 산개해 골목에 투입시켰단 말이다. 그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어. 그렇다고 우리만 전승 광장으로 향했다간 위치가 완전히 노출되어버리니.”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더 떨어질 겁니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는 병사들의 체력과 체온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빗물에 섞여,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 아래로 녹아들고 있었다.
거기에 가마에 타고 있는 엔지는 우의를 입고 있어 비에 젖지 않아, 병사들과의 대비가 더 심했다.
엔지또한 비를 맞는다면 병사들과의 일체감은 생기겠지만, 황자로서의 체면과 체통이 젖은 생쥐 꼴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미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흥, 그래봤자 대장이 없는 반쪽짜리 전투겠지.”
두건 쟁탈전은 대장의 두건을 빼앗아야만 끝난다. 대장이 없는 곳에서의 전투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엔지가 레온나토스보다 큰 규모로 병력을 나눈 것도 결국 대장 지키기가 훈련의 본질이라 파악했기 때문이다.
레온나토스 부대는 200명을 20명씩 10개 부대로 나눴고, 레온나토스를 지키는 부대 또한 다르지 않았다.
반면 엔지 부대는 황자 자신을 지키는 부대에 50명, 나머지 부대를 30명씩 다섯 개 부대로 나누었다.
병사들 간의 유동적인 움직임에선 약세겠지만 한 덩어리로 맞붙었을 때는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배분했다.
“모의전을 빨리 끝내고 싶다면 레온나토스 녀석을 찾는 것이 먼저야. 가마에서 내려온 뒤라 쉽게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그때였다.
가마에 타고 있어 시야가 높은 엔지의 눈에, 거리 저편에 흰 두건을 쓴 병사가 보였다.
“…적이다. 한 명인 걸 보니, 주변 탐색 중인가?”
상대도 이쪽을 파악한 듯했다.
가마에 타고 있는 엔지이니만큼 그로서도 대장의 유무는 금방 파악했을 터.
흰 두건을 쓴 병사는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쪽도 척후를 보내라. 저 녀석이 도달한 끝에 레온의 본대가 있겠지. 몇 명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빗속을 달려가는 검은 두건을 쓴 병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적 대장이 사거리 건너 모퉁이에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열다섯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그들을 확인했음을, 상대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들 사이엔 대장도 있었습니다.”
“…레온나토스를 호위하는 병력이 고작 열다섯 정도라고? 믿기 힘든데.”
덫의 미끼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달콤한 먹잇감이다.
오히려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열다섯이면 엔지의 병력 50에 비해 확실히 보잘것없는 숫자.
하지만 척후로 이쪽의 동향을 파악한 것 치고는 전혀 움직임이 없기에 엔지는 오히려 더 경계했다.
“이상하군. 수적 열세인데, 왜 도망가지 않는 거지?”
“무언가 꿍꿍이가 있거나, 혹은 무리를 해서라도 모의전을 빨리 끝내고 싶은 건지도 모르죠.”
지금도 내리는 비에 병사들의 체력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엔지의 병사들도 사거리의 골목을 돌았다. 거기엔, 도망가지 않은 열다섯 명의 흰색 두건 병사와 체격이 작은 청동 가면, 레온나토스가 있었다.
“…자신이 보기 좋은 미끼가 될 테니 이리로 오라는 건가? 하지만 미끼가 있다면, 분명 어딘가 덫도 함께 있을 텐데.”
엔지는 어렵지 않게 그 덫을 찾았다.
“…전하.”
“그래. 내 귀에도 들린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섞인 주민들의 환성 소리, 그리고 휘파람 소리는 바로 주변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곧이어, 엔지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뒤쪽에서 막고 있는 또 다른 부대를 발견했다.
뒤쪽을 막고 있는 부대는 스무 명 정도였다.
“꽤나 부대 간의 연합이 잘 되는군. 미리 협의된 건가? 상황은 우리와 같을 텐데 말야.”
지금 상황에선 소리조차 멀리 퍼져나가지 않는다.
사실은, 지금 상황은 아렌으로서도 예상 밖이고 준비해뒀던 뿔피리도 비의 소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레온나토스 부대와 합류해 양동 작전을 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
하지만 엔지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로 인해 절로 고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군.”
뒷골목 수준의 좁은 골목이 있긴 하다.
정말 싸움을 피하고 싶으면 모두 그 길로 달려들면 되겠지만, 엔지는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다.
“싸우시겠습니까?”
“속이 뻔히 보이는 양동작전이지만, 어울려주는 수밖에. 무엇보다 우리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앞의 열다섯과 뒤쪽의 스물. 포위되어있긴 하지만 도합 서른다섯의 병력이다. 그리고 앞에는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대장도 있다.
엔지의 병력이 비록 포위당한다 해도, 50명이나 되어 수적 우세는 확실하다. 괜히 싸움을 피하는 것보다는 한번 승부를 걸어볼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어차피 모의전일 뿐이야. 싸움을 길게 가져가면 병사들의 충성심에도 영향을 끼치니까.’
엔지는 자신의 결정을 그렇게 합리화했다.
실상은, 병사들이 모의전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것만큼 자신 또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지만.
엔지는 자신의 결정에 작용한 요인들에 대해 끝까지 알지 못했다.
*****
“…접근하네요. 미끼를 문 것 같아요.”
“정말이네? 설마하니, 이렇게 간단히 양동을 감수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요.”
“네. 그야 이건 실전이 아니니까요.”
발커스의 말에 아렌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두건 쟁탈전은 실전을 흉내 낸 모의전이지만, 결국 승패를 결정짓는 부분은 실전과 별로 관계없는 요였다.
모의전에서는 실전처럼 활을 쏘지도 않고, 적장을 쓰러뜨리면 그림처럼 곧바로 모든 전투가 끝나버리니까.
또한, 목숨이 달려 있지도 않다.
“실전이라면 절대 미심쩍은 장소에 발을 디디지 않겠죠. 승패에 아군 모두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모의전은 비를 빨리 피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불리한 지형에 스스로 들어오기도 해요.”
특히, ‘그럼에도 할 만한’ 불리함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겁니까?”
“형세는 이쪽이 유리하고 수적으로는 불리한, 설마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질지는 몰랐지만요. 그보다, 슬슬 준비하셔야겠는데요?”
검은 두건 진영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상대로선 앞과 뒤, 양쪽과 모두 싸우느니 앞을 밀어버리며 일점 돌파하는 것을 원할 것이다.
특히나, 앞을 막아선 자들은 열다섯밖에 되지 않고 그중에는 대장처럼 보이는 아렌도 있다.
다소간 함정처럼 보이더라도 아렌만 잡으면 모의전이 끝이라 생각할 테니 이보다 확실하고 좋은 미끼는 없다.
아렌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빨리하는 오십 명의 검은 두건 부대.
차가운 비를 맞은 채 체온이 떨어져, 그들의 몸에선 연신 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 사기는 이 모의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모의전을 끝내기 위해서처럼 보였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당하는 건 시간 문제겠는데?”
“이곳 골목이 좁으니 포위는 안 당하겠네요. 그것을 위안으로 삼죠. 최대한 버티는 사이 뒷열이 도와줄 테니까.”
앞뒤 동시에 싸워야 포위라 할 수 있다. 병력이 분산된 것을 노려 한쪽만 집중 공격 당하면 그건 포위가 아니라 각개격파가 된다.
아렌은 뒤를 돌아봤다.
“할 수 있겠죠, 더글라스?”
“하고 말고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잖아. 내일이면 분명 앓아눕겠군. 독한 술이나 한 잔 하면 딱이겠는데.”
더글라스는 가면을 고쳐 쓰고, 흰색 두건 진영 중 하나로 서 있었다.
수는 열다섯이지만, 이곳에 모인 건 낮안개 기사단과 기사단장 발커스, 검성 급의 고수인 더글라스까지.
모두 레온나토스의 정예들이었다.
*****
아렌은 사양하지 않고 전면에 나섰다.
“모두, 적습에 대비해라!”
아렌만 잡으면 모의전이 끝나는 상황.
검은 두건의 병사들은 아렌을 잡기 위해 일제히 손을 뻗었다. 다소간 목검으로 맞는다 해도, 아렌의 두건을 벗기면 모의전이 끝나기에.
하지만 그들의 손이 닿는 것보다 아렌이 아군의 뒤쪽으로 빠지는 것이 먼저였다.
서두른 만큼 검은 두건 진영은 혼란스러웠고, 그 빈틈을 숨어있던 더글라스가 파고들었다.
따닥!
두 명의 검은 두건이 땅에 떨어졌고, 더글라스는 인원 속에 숨었다.
그 사이 아군 한 명도 두건을 빼앗겼다.
방어에만 치중한다지만, 숫자에서 너무 열세였기 때문이다.
‘…뒷열은 아직 붙지 않은 건가?’
지금 아렌과 더글라스의 역할은 정확히 반대다.
대체 불가능한 강자이기에 아군 사이에 숨으면서 그 정체를 숨기는 더글라스.
그리고, 두건을 빼앗기면 끝이기에 오히려 전면에 나서 적의 눈길을 끄는 아렌.
일종의 망치와 모루였다.
넓은 의미에서 아렌 분대가 모루, 뒤쪽의 20인 부대가 망치라면, 좁은 의미에서는 미끼가 되는 아렌이 모루, 흐트러진 틈을 공격하는 더글라스가 망치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열다섯이 50명을 상대할 수는 없다.
‘언제지? 지금인가? 아니면 아직?’
그 뒤 두 번의 공방이 더 있었다.
일곱 명의 두건을 벗길 수 있었지만, 아군도 네 명의 두건을 잃었다.
이제 남아있는 아렌 분대는 열 명뿐.
수가 줄어들수록 힘을 잃으니 앞으로 남아있는 공방은 한두 번밖에 없었다.
그때.
“적장이다!”
“적장이 뒤에도 있다!”
“두 명이다! 적장이 두 명이야!”
“뭐라고?! 누가 진짜야?!”
고성과 함께, 아렌에게만 쏠려있던 이목이 단숨에 흐트러졌다.
누가 적장인지 모른다는 의구심, 그리고 뒤에서 시작된 협공.
앞쪽, 아렌만을 향하던 적의 압력이 단숨에 느슨해졌다.
“지금이에요!”
열 명만 남은 아렌의 병사들이, 송곳처럼 한 점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당연히, 지금도 고고하게 가마 위에 올라타 있는 제2 황자, 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