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레온나토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더글라스, 이정도 비면 전력에 지장은 없겠나?”
“네. 지금 정도라면 그리 큰 비가 아니고, 옷이 젖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보다는 전하의 옥체가 상할까 그게 걱정입니다.”
“난 괜찮네.”
두건 쟁탈전에서는 대장 역의 두건을 벗긴 쪽이 승리한다.
실제 전쟁에서도 지휘관이 당하면 승기가 확연히 기운다. 실전을 본뜬 규칙이기는 하지만, 정말 실전이라면 지휘관이 보통의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 사이에 숨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모의전에서 대장이 병사들 사이에 숨으면 안 된다는 법 역시 없지. 나중에 엔지 형님의 볼멘소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승리하면 그만이다. 아니, 나중에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수를 쓴 이상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급작스런 비라니.
“…그런데, 아렌 녀석의 원래 예보에는 비가 온다고 했었죠? 역시 용하단 말입니다.”
“확실히, 점괘대로의 기록적인 폭우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비가 내리다니.”
오늘 비가 내린다는 아렌의 점괘는 함정을 파기 위해 둘러댄 말이었다.
레온나토스와 병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점괘가 빗나간 것 같은데 마침 엔지 진영에도 유출된 것 같으니 역으로 이용하자며 급조한 듯 제안한 작전이었다.
“…하긴, 아렌이 날씨 예견은 좀처럼 안 하긴 하지.”
“왜 그런 거죠? 예전엔 태양이 사라지는 것도 잘만 예견하지 않았습니까.”
“말하기론, 점괘가 완벽한 것이 아닌 만큼 틀렸을 때 민망해진다고 하던데. 하늘의 뜻이 워낙 오묘하니 해석의 실수도 자주 일어나고.”
“…지나친 겸양 같군요.”
지금도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듯한 빗줄기는 이제 옷을 때릴 만큼 강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편안한 지붕 아래에서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이내 병사들의 복장은 비를 흠뻑 머금어 몸에 달라붙었다.
“…전하. 물러서십시오. 적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에겐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골목 너머로 나타난 건, 검은 두건을 쓴 엔지의 병사들.
자신들의 코앞에서 구경거리가 열린 시민들은 환호했고 엔지의 병사들은 옆으로 넓게 늘어섰다.
서른 명 남짓으로 보이는 인원. 고작 스무 명으로 수적 열세에 놓인 레온나토스로선 물러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더글라스. 할 수 있겠지?”
“이게 제 역할이니까요. 제 몫을 다해야죠.”
하지만, 레온나토스는 여기서 싸우는 것을 택했다.
더글라스가 있을 때는 극복할만한 숫자이기도 했으니.
“여기, 대장이 있다!”
검은 두건 진영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비록 가마에서 내렸지만 아직 성장중인 레온나토스의 체형은 도드라졌으니까.
“어, 뭐라고? 적장은 세 블록 건너에 있지 않았어?”
“그 사이에 여기 온 건가?”
검은 두건 사이에 약간의 혼란이 일었다.
‘…아렌이로군.’
레온나토스는 가면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눈앞의 검은 두건 서른 명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병력이었을 뿐이다.
물론, 적의 병력을 줄일 수 있을 때 줄여두는 편이 낫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다! 적장의 두건을 빼앗아 단숨에 끝내는 거다!”
수적 우위를 믿고 점점 다가오는 검은 두건 군.
곧, 레온나토스군과 엔지군은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서로 뒤엉켰다.
전장이지만 피가 흐르지 않고, 고성이 오고 가지만 양옆 주민들이 환호성 치는 기이한 전장.
주민들이 축제 중 날린 꽃가루가 비에 젖어 길 곳곳의 요철에 알록달록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 두건이 서로 뒤엉킨 가운데 누구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흰색 두건이 있었다.
아군 병사를 움직이는 나무나 벽으로 삼아, 공격한 후 두건을 빼앗아 다시 아군 사이에 뒤섞이는 것을 반복하는 무사.
더글라스였다.
그리고 더글라스의 무위는 2층에서 내려다보는 시민들에게 더욱 잘 보였다.
“-더글라스 경이다!”
“혼자서 상대하지 마! 간격을 좁혀!”
검은 두건 진영의 고함 덕에, 구경하는 사람들도 한 번에 두세 개의 두건을 빼앗는 자가 더글라스임을 알았다.
-퍼벅!
단숨에 두 명을 때려눕히고 두건을 빼앗은 더글라스.
잠깐 돌출되어있던 사이, 단숨에 세 명이 포위하듯 달려들었다.
“이크!”
하지만 더글라스는 무리하지 않고 청동 가면을 쓴 아군 속에 숨어들었다.
한번 숨어든 더글라스를 찾는 건, 그 압도적인 무위에 아군 한둘이 당한 뒤에야 가능했다.
‘확실히, 모의전이지만 실전과는 다르지.’
대장 역할의 두건을 먼저 빼앗긴 쪽이 진다. 적의 전술에는 대장을 먼저 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아무리 훈련 중이라도 황족의 옥체에 목검을 휘두르는 건 망설여지는 일.
결국은 대장을 보호하는 병사들부터 처리하고 손으로 제압해 벗기게 된다.
더글라스의 활약에 검은 두건 진영의 수적 우세는 금방 뒤집어졌다.
싸움이 끝났을 때, 레온나토스 진영은 여섯 명이 두건을 잃은 반면 상대는 도망친 아홉 명을 제외하고 모두 두건을 잃어야 했다
대부분의 두건을 병사들 사이에 숨어있던 레온나토스가 빼앗고 말았다.
“거기 구리가면 기사님! 잘 싸우던데!”
“가웨인 황자님과 비교해도 안 꿀리는 것 아냐?!”
“응원할 테니 마지막까지 두건 빼앗기지 말라고!”
시민들의 응원에 손을 들어 가볍게 화답한 더글라스.
건물 2층의 창문에서는 알아채기 쉽지 않았지만, 더글라스의 숨은 머리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헉, 헉…”
“괜찮은가, 더글라스?”
“네, 조금만 쉬면… 후우! 괜찮아질 겁니다. 젖은 옷이 달라붙어 꽤 성가시군요.”
더글라스 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최선을 다해 인간 방벽이 되어 더글라스를 도왔다.
녹초가 된 병사들 사이에서 레온나토스가 말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이렇게 가만히 보호받기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쏴아아!
비는 점점 거세어졌다.
이제는 정말 폭우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세기의 빗줄기 속에서 더글라스가 물었다.
“…전하. 모의전은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전장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만. 보통은 이런 비오는 날은 전쟁을 피할 겁니다, 피차.”
“그럴수록 이런 상황에 대비해야 할 테니.”
레오나토스는 병사들과 함께 첫 번째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렌은 지금쯤 잘하고 있겠지?”
*****
“으! 비가 점점 거세지는군요. 우의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걸 그랬습니다!”
발커스는 손을 펼쳐 아렌의 위에 올렸지만, 이미 땅을 때릴 정도로 거세진 빗줄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만두게. 그보다, 어서 정해진 장소로 가야 하네. 서두르게.”
실제 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소규모의 부대를 지휘관과 떨어뜨려 여럿 운용하지 않는다.
멀리 있는 아군은 설령 아군이라도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효시나 수기, 나팔 등 여러 도구들을 이용하지만 혼란스러운 전장의 상황 속에선 그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아렌은 미리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정기적으로 합류할 지점을 표시해 병사들에게 알렸다.
아렌이나 레온나토스가 품속의 나팔을 불면 병사들이 정해진 사거리로 모이고, 그 뒤 합류하거나 흩어지거나를 반복한다.
아렌은 품속의 뿔피리를 있는 힘껏 불었다.
-부오오오
원래는 뭉근하고 낮은 소리가 사거리 곳곳으로 스며들어야 했지만, 그랬어야 할 뿔피리의 소리는 쏟아져 내리는 폭우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큰일이다. 이래서야 흩어진 아군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아.’
근처에 있는 검은 두건 진영을 불러들일지도 모르는 일.
‘역시, 이런 폭우는 원래 역사에 없었어. 무엇이 원인이지?’
생각은 모의전이 끝난 뒤 실컷 하면 그만. 지금은 모의전에 집중할 때였다.
아렌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런 아렌의 귀에 들려오는 건, 뿔피리 소리조차 금방 묻어버린 세찬 빗줄기 소리.
그리고, 사거리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함성이었다.
“발커스. 적이다.”
“-네?”
“전방 사거리의 오른쪽 대로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시민들이 모의전 병사들을 보고 지르는 소리겠지. 그리고 저기는 우리가 원래 협의한 동선이 아니야.”
“아, 그렇군요. 그런 식으로 적의 동향을 살필 수도 있겠군요!”
“빗소리가 묻어주지 않았다면 더 일찍 알았겠지만.”
아렌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다.
모퉁이에 숨어있다 갑자기 달려들어 기습을 노리거나.
혹은 이대로 물러나 아군과 합류하는 것을 택하거나.
‘어느 쪽이든, 그리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병사들은 지금도 거세게 내리는 비에 서서히 체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발커스.”
“네. 말씀하시지요, 전하.”
발커스는 여전히 아렌을 황자인줄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언제까지 모르고 있을지 궁금해지는데?’
“적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기습한다.”
아렌의 말에 발커스는 말없이 뒷 열의 병사들에 수신호를 보냈다.
숨죽이는 아렌의 병사들.
곧 당장이라도 모퉁이를 돌 적들을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아렌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병사들이 모퉁이 너머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벌써 한참 전에 나왔어야 할 적들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렌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저쪽도 발소리로 파악했군.”
주민들의 환호성으로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용한 방법이긴 하지만, 상대 역시 똑같이 사용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이대로는 위험해. 차라리 후퇴를-’
아렌이 결단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아렌? 아렌인가?”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거센 빗줄기 아래에서도 꽤나 익숙했다.
“…전하?”
아렌은 단숨에 거리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숨을 죽이고 대기하던 흰색 두건의 병사들, 그리고 가면을 쓴 레온나토스가 있었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그런데, 이곳은 처음 약속한 장소가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었어. 전투가 있었거든.”
그러고 보니 레온나토스의 병사들 수가 조금 줄어 있었다.
“아군 여섯을 잃고, 적군 스물하나를 없앴지. 맞닥뜨린 부대는 30명이 한 조였고, 나머지 아홉은 도망갔지.”
“대승이로군요.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하겠습니다만.”
대승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더글라스가 있었기에 얻어낸 승리라는 걸 아렌은 알고 있었다.
다른 곳의 전황을 아직 모르기에 방심할 수는 없다.
“…잠깐만요. 폐하라고? 어라 그럼 여기는?”
뒤에서 레온나토스와 아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발커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누가 전하입니까?”
“나다.”
“날세.”
“…….”
레온나토스가 대답했고, 아렌 역시 레온나토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답했다.
아렌의 시늉에는 더글라스조차도 깜짝 놀랐다.
그 반응을 보고 아렌은 확신했다.
‘좋아. 이 반응은 써먹을 수 있겠어.’
“전하, 사죄드리겠습니다. 점괘를 보았으나 괜히 우의를 벗는다고 해 전하를 옥체를 식게 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런 하늘이었다면 누구든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할 겁니다. 늦가을의 찬 비를 오래 맞으면 병사들의 몸이 상하고, 무엇보다 전하의 옥체가 걱정입니다.”
“내 몸이야 신경쓰지 말게. 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야 한다.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생각이 일치했다.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나, 제게 계책이 있습니다.”
“계책?”
아렌은 최측근조차 구분 못 했던 레온과 자신을 십분 활용할 생각이었다.
“우리 진영에는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두 명 있습니다. 이것을 십분 이용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