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준비해뒀던 대로 모두 가면을 쓰고 있군.”
“금면병이나 은면병처럼, 따로 이름이라도 붙일까요? 동면병이라거나.”
“그건 너무 속보이지 않나?”
전열에서 한층 떨어진 곳에서 아렌과 레온나토스가 대화했다.
일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부대만 가면을 쓴 게 아니라, 가마 위에 탄 레온나토스와 아렌까지 가면을 착용한 상태.
최대한 얇게 펴서 늘렸기에 무게를 덜었고 눈구멍도 크게 파냈지만, 가면 특유의 답답함까지 벗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아렌은 병사들에게 가면을 씌우길 제안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전투일수록 한 명, 한 명의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라.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렌.”
황자 직속의 기사들은 대부분 얼굴이 알려져 있다. 하다못해 복장이라도 조금 다르거나, 같은 편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르거나 하는 식으로 티가 나기 마련.
그리고 고수에게는 같은 고수가 상대하거나, 다수가 에워싸는 식의 대응은 일상적이다.
“네. 엔지 전하의 기사는 80명이 넘지만, 이쪽은 40명이 고작입니다. 물론 장점도 있죠. 이쪽엔 1대1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고수, 더글라스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상대하는 쪽에서는 어떻게든 고수를 고립시키고 다수로 에워싸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면을 쓴다면 그만큼 이쪽의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일선에 선 레온나토스의 병사들은 후퇴만을 하지 않았다.
조금씩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옆 사람과 자리를 바꿔가며 강함의 차등을 이용했다.
엔지의 병사들이 보기에는, 대등하게 싸우던 상대가 어느 순간 자리가 바뀌니 일선의 기사급의 강함을 뽐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보통의 병사들 사이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나 두건을 빼앗고 사라지는 더글라스까지.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는 것 같군. 아렌, 네 공이 크다.”
“저는 단지, 전하께서 같은 숫자로도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기억했을 뿐입니다.”
“내가 한 말은 병법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원론적인 말에 지나지 않아.”
“제 제안도 누가 더 강한 자인지 얼굴만 보고도 판가름할, 이런 소규모 모의전에서만 쓸 수 있을 뿐입니다.”
“…….”
레온나토스와 같은 가면을 쓴 아렌은 레온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병사들을 물려야 할 때인 것 같군요.”
후방에서 우의를 벗고 있던 엔지의 병사들이 하나둘 전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부터로군.”
레온나토스는 네 명이 이고 있던 가마에서 내렸다.
최대한 가마를 골랐고, 아렌의 체격이 아직 작기에 가마꾼에 가는 부담이 크지는 않겠지만, 가마에 타고 있는 것만으로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병력 네 명이 줄어든다.
거기에, 지금처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순간엔 어디에 대장이 있는지 훤히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만다.
물론 고작 열다섯인 레온나토스이기에, 가면을 쓰고 있어도 체구 때문에 곧바로 들통이 나고 만다.
…원래라면 그렇다.
“준비됐나? 잘 부탁한다, 아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황자에다 모의전의 대장역이기에 조금은 더 화려한 복장을 해도 되었겠지만, 레온나토스의 복장은 아렌과 똑같은 수수한 훈련복이었다.
거기에 똑같은 가면에 비슷한 체형까지 합쳐지니, 방금 가마를 이고 있던 병사들조차도 누가 아렌이고 레온나토스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았다.
그때 가면을 쓴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외쳤다.
“모두, 날 따라라!”
“모두 후퇴한 후 시가지로 산개하라!”
둘 다 외침 속에 적당히 가성을 섞어,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레온나토스의 병사들조차도 누가 황자이고 누가 비서관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병사들의 움직임을 광장 외곽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저기 저것 봐! 흩어진다!”
안면을 덮은 번쩍거리는 청동가면은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물론 단순한 보여주기식의 장치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미 가면을 여흥의 하나로 받아들여 즐기는 단계에 있었다.
아렌과 레온나토스를 스무 명의 병사들이 호위하고, 나머지 병사들도 모두 스무 명씩 조를 이뤘다.
엔지의 전열도 레온나토스 부대를 추격해 더 큰 병력 손실을 야기하려 했지만, 아직 움직이기 불편한 엔지의 본대와 너무 떨어질 수 있었기에 추격을 단념했다.
그 사이, 레온나토스의 병사들은 광장을 향해 나 있는 16갈래의 대로를 따라 사라졌다.
레온나토스, 혹은 아렌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엔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빌어먹을 우의를 빨리 벗어라! 뭘 이렇게 쓸데없이 튼튼하게 묶어둔 거냐!”
“…간밤에 점술가 아렌의 점괘가 나왔다며 우의를 아주 단단히 결속해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명령을 내린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머쓱해진 엔지는 애꿎은 우의의 매듭만 노려봤다.
“이따위 매듭만 풀면 여전히 이쪽에 우세하다. 그 뒤엔 곧바로 레온나토스의 두건을 벗기면 그만이야!”
“하지만, 레온나토스 전하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 비서관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에 누가 황자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하나 각개 격파하면 되잖아!”
엔지의 호통에도 그의 비서관은 익숙한 상황인 듯 태연했다.
“그런데, 이만한 인원이 모두 골목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무리 큰 대로라도 마차 세 대가 동시에 지날 정도 뿐이니, 그만한 공간에서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겠지!”
즉, 레온나토스가 병사를 나눈 숫자와 일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좁은 곳에서 소수끼리 싸우면 저쪽이 훨씬 불리할 텐데? 더글라스 하나를 믿는 건가? 하지만 이쪽의 기사는 저쪽의 두 배가 넘는단 말이지.”
“최초의 돌격도 의아했습니다. 처음부터 흩어져서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왜 굳이 처음에 돌격했을까요. 그다지 피해를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엔지는 빠르게 두건을 빼앗긴 인원과, 빼앗은 두건을 비교했다.
잠깐의 대치 상황이었지만 이쪽이 빼앗긴 인원은 열다섯이었고, 빼앗은 두건의 숫자는 열셋.
후퇴하는 도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선전했지만, 고작 이 정도의 전과를 올리기 위해 감수할 위험은 결코 아니었다.
“글쎄, 모르지. 더 나은 점괘를 기대하고 작전을 내린 것인지도.”
“…뭔가 이상합니다. 그들이 나올 때까지 광장에서 기다리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비서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지만, 엔지는 고개를 저었다.
“실전이었다면 그랬겠지만… 그렇군.”
모의전은 전쟁을 본뜬 것이지만, 당연히 실제 전쟁과는 다르다.
특히 이 자리가 다른 이들의 평가를 받는 자리이며, 사람들의 이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그랬다.
레온나토스의 흰색 두건 진영은 시가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을 엔지의 검은색 두건 진영이 쫓지 않는다는 건, 이쪽이 겁을 먹었다는 징후로 비춰질 여지가 다분했다.
재미있는 한바탕 전투를 기대했던 시민들의 야유를 감수해야 하는 건 덤이다.
“레온나토스 자식은, 수확제의 모의전이라는 상황조차도 이용했다는 건가?”
실전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인지.
아니면, 그게 오히려 더 실전적인 사고방식인지.
그건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5년 전, 레온나토스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도 테오드릭 녀석은 레온나토스를 아꼈었지. 그때는 심약한 샌님 녀석을 부하처럼 여긴다고만 생각했는데.”
제2 황자 엔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시작된, 이겨야만 모든 것을 얻는 모의전.
엔지는 이제 와서야 지금의 승부가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
*****
“여깁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청동 가면을 쓴 낮안개 기사단장 발커스가 말했다.
기사단 스무 명이 인솔하고 있는 건, 아직 몸집이 크지 않은 열다섯 남짓한 소년.
양쪽 길가의 2층 집에선 창문을 열고 환호 소리가 쏟아졌다.
“어이! 나리들! 저기 내가 아는 개구멍이 있는데, 그거 이용해봐!”
“여기 길가도 널찍하고 좋은데, 여기서 싸워요! 문은 박살 내지 마시고요!”
“목이 마르면 맥주도 있다오! 한잔에 3닢밖에 안 하지!”
축제에 잔뜩 들뜬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은 발커스로서도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지만, 언제 모퉁이 너머로 다가올지 모르는 적들의 소리를 다 묻어버리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웠다.
발커스는 기사들의 한중간에 있는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전하입니까? 아니면 아렌 공?”
“수고가 많군, 발커스 경.”
“아, 전하시군요. 제가 마지막까지 모시겠습니다.”
더욱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하는 발커스.
그리고, 가면 아래서 대답한 아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 사람들의 소란 때문인가? 목소리가 꽤 부자연스러웠을 텐데 위화감을 못 느끼는군. 하지만 키나 체격으로는 황자와 분간 못 하는 게 확실해.’
아렌의 계획은 황제와 체격과 복장이 완전히 같은 금면병, 가면을 쓰고 있어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은면병에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가면을 씌울 거면 차라리, 테오드릭에게 순순히 기사단이라도 빌려올 걸 그랬나?’
조금은 후회하는 아렌.
하지만 그랬다간 종국에는 다들 가면을 벗어야 하니, 기사단까지 빌려준 테오드릭과 레온나토스 사이의 관계를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빌려온 병력으로 이겨봤자 레온나토스의 명성은 올라가지 않아.’
“자, 가지. 발커스 경.”
아렌은 발커스와 기사들을 대로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길 양쪽의 2층 창문에선 시민들이 뿌리는 꽃가루가 흩날렸고 어디선가 연주되는 현악기가 흥을 돋웠다.
“시가지에서의 싸움은 결국, 누가 먼저 길 양쪽에서 포위하느냐가 승부처니까”
레온나토스 진영에 검성에 근접한 더글라스가 있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이점도 있었다.
상대는 레온나토스와 아렌, 둘 중 누가 황자인지 모르기에 한 점을 돌파해 대장만 노리는 작전이 어렵지만, 이쪽은 상대의 대장을 훤히 안다는 것.
즉 상대측 대장, 엔지를 피해 외곽의 병력을 잘라먹기도, 너무 앞서나온 외곽의 병력을 무시하고 바로 심장부를 노리는 것도 레온나토스 측에선 둘 다 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적의 본대를 조금이라도 줄여둬야-’
아렌이 중얼거릴 때였다.
-툭.
투툭.
하늘에서 가볍고 차갑고, 서늘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비?”
“맙소사, 아렌 공의 점괘가 정말이었잖아요?! 날씨가 맑다고 우의를 벗지 말걸!”
발커스가 하늘도 야속하다는 듯 털어놨다.
병사들에게는 점괘가 빗나가 오늘 하늘이 맑으니 기습으로 우의를 벗는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이번 점괘는 명백한 허위였다.
‘뭐지? 사실은 지금 이맘때쯤의 수확제에서 비가 왔었나? 내가 기억 못하는 것뿐인가?’
아렌은 스스로 자문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았다.
이번 수확제는 아렌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태양교를 무력을 진압한 후, 다소 흉흉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수확제였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는 분명, 오늘의 하늘이 맑았다.
‘내 행동으로, 날씨조차도 바뀔 수 있는 건가? 그도 아니면-’
날씨를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