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95화 (95/227)

#095화

수확제의 첫날이 밝았다.

정오의 연단 연설으로 일주일간의 수확제는 시작된다. 황궁의 아침은 여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이른 아침 아렌은 내원 시종장의 부름을 받았다.

“어떤가, 아렌. 자네는 이번에도 점괘를 봤겠지? 이번 행사는 무탈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수확제는 기본적으로 수확을 거둬들인 제국민들의 축제이지만, 제국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둬들이는 건 다름 아닌 황궁이다.

레온나토스와 엔지의 모의전 외에도 황궁이 주관하는 행사는 많다.

‘아, 길흉이 궁금한 건가? 이제와서?’

아렌은 넌지시 물었다.

“내원 시종장 각하께서는 점괘를 믿지 않는 것 아니셨습니까?”

“그야 믿지는 않네. 하지만 자네의 점괘가 효력이 없다는 증거도 없지.”

믿든 믿지 않든, 어차피 손해될 게 없다면 따라보는게 낫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가장 위험하지.’

점괘를 맹목적으로 믿거나, 반대로 점괘를 믿지 않아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렌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가장 위험한 건, 일단 점괘대로 따라주지만, 점괘 자체에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부류다.

점괘대로 따르지 않아서 들어맞지 않았다고 뒤집어씌우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별일 없는 평범한 점괘를 내줬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더욱 곤란해진다.

‘…사건이 없는 점괘는 위험하니 가급적 모호한, 나중에 둘러대기 좋은 점괘를 줘야 해.’

문득, 아렌은 엔지를 낚기 위한 4일째의 거짓 예보, 폭우의 점괘를 떠올렸다.

‘정말 폭우가 내리진 않지만, 기왕이면 점괘가 한 방향으로 일관된 편이 둘러대기 좋겠지?’

아렌은 시종장의 앞에서 카드를 뒤집었다.

“…‘구멍 난 하늘’과 ‘넘쳐흐르는 강물’ 카드입니다. 하지만 강물 카드는 뒤집혀 있군요.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띠지만 강물 카드는 반대로 놓여 있습니다. 물에 관련된 무언가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조심해야 할 정도는 아닐 듯합니다.”

“흠, 수재(水災)라. 모처럼의 점괘이니, 당연히 해법도 있겠지?”

“네. 강한 흉조가 아닌 만큼 그 대비책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하늘’과 ‘강물’ 모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색깔, 요컨대 노란색이 길한 색일 듯합니다.”

“…흠,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내원 시종장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 대비책은 시행하지 않겠네.”

“…네?”

“난 자네의 점괘를 믿지는 않지만, 그 점괘가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는 지켜보고 싶어졌거든. 그러니 일어날 거라는 그리 심하지 않은 수재를 지켜보고 싶어졌음이야.”

“…그러하시군요.”

아렌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렌 입장에서 점괘 한두 가지가 빗나가는 것 정도는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점괘가 모든 것을 맞추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애초에 없으니까.

하지만, 평화로운 점괘의 내용과 반대로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거나, 혹은 지금처럼 점괘가 맞나 틀리나 시험해보는 자리에서 틀리는 건 그 무게감이 크게 달라진다.

‘한번 점괘가 빗나간다고 내 모든 점괘가 부정당하지는 않아. 하지만, 내 명성에 조금은 금이 가겠지.’

어쩌면 내원 시종장의 목적 역시 그것일지 몰랐다.

내원 시종장과의 회동에서 물러난 뒤, 아렌은 고민했다.

‘물에 관한 무언가라… 흠.’

모의전에 나서는 병사들에게 우의를 씌우는 거짓 점괘는 빗나가도 상관이 없다. 후에 기만을 위한 거짓 점괘라고 알리면 그만이기에, 아렌의 명성에는 금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원 시종장에게 공언한 점괘만큼은 그럴 수 없다.

‘폭우, 수해, 길한 색은 노란색이라…’

자신의 점괘대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해보는 수밖에 없겠어.’

아렌이 스스로, 점괘 대로의 사건을 일으키면 된다.

*****

대확장전쟁 전승 기념광장.

반경이 500m도 넘는 거대한 원형 광장 앞.

황금 가면을 쓴 황제는 모습만 보여주고, 연단에 선 것은 황국의 제1 황자 라이안이었다.

“-그럼, 제 508회 수확제를 시작하겠다!”

와아아아!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 하고 라이안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단상 아래에는 다른 황자들도 모두 참석해 있었다. 라이안을 보는 눈빛의 성격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현재 하는 생각은 다 같았다.

‘…사실상, 이미 황태자나 다름없군.’

보여주는 모습이나, 하고 있는 행동이나 영락없는 차기 황제였다.

“…쳇. 지금까지는 한 번도 수확제에 참석한 적 없으면서, 참석하자마자 연단에 서다니.”

겉과 속이 거의 같고, 복잡한 구석이 없는 테오드릭조차 라이안에겐 대놓고 날카로운 말을 할 정도였다.

이미 황태자가 될 욕심은 버린 테오드릭이지만, 마치 이미 황태자 자리를 맡아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테오드릭이 저 정도라면, 다른 황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겠군.’

하지만 지금 아렌의 당면한 상대는 제2 황자, 엔지였다. 아렌은 테오드릭의 뒤에 가 소곤거렸다.

“…테오드릭 전하.”

“…뭐지, 아렌?”

다른 황자들과 가신들이 모여있는 자리. 이런 곳에서의 밀접한 접촉은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광장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황도 시민들의 함성은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덮어줬고, 주변의 시선들은 모두 연단에서 내려오는 라이안에 꽂혀 있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테오드릭 전하의 병사들을 좀 빌리고 싶습니다.”

“아, 모의전 때문인가?”

“네. 200명이나 필요하지만, 레온나토스 전하를 호위할 병력을 감안하면 저희 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숫자는 절반인 100명 정도입니다.”

부족하면 황실 위병들을 빌려올 수도 있지만, 자신의 정예 사병만 차출할 엔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내 기사단을 보내줄 순 없을 거야.”

“네. 테오드릭 전하의 위병이면 충분합니다.”

황자 직속의 기사단이면 그 한명 한명이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이다. 테오드릭이 병사를 빌려줬다는 사실 자체를 숨길 수는 없겠지만, 기사단까지 지원해주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처사다.

평소 아끼는 동생의 부탁에 마지못해 위병을 빌려줬다, 정도라면 그리 이상할 것 없겠지.

“그런데, 정말 엔지 형님을 이길 자신이 있는 거냐? 물론 레온나토스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엔지 형님을 얕봐선 곤란해.”

엔지 황자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별다른 특기가 없는 그저 그런 황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엔지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일 것이다.

그에게 내세울 만한 특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크게 뒤떨어지는 부분도 결코 없다. 엔지의 저평가는 단지 라이안의 연년생 동생으로 태어난 것, 그것으로만 기인했을 뿐이다.

‘그러니, 엔지를 고른 거기도 하지.’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뒀고요.”

“대책?”

“네. 간단합니다.”

긴말을 해줄 수는 없지만, 아렌은 짧게 말했다.

“모의전은 실제 전장이 아니고, 엔지 전하에겐 없는 것이 이쪽엔 있으니까요.”

*****

축제가 벌어진 황도 안은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올해는 특별히 가물거나 질지도 않았고, 상업도 잘 되었기에 60만 황도 시민들은 거리낌 없이 축제를 즐겼다. 성대한 축제를 만끽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방문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관리들은 일주일 간 황도 안에 머무는 사람들 수를 100만에까지 육박한다고 추산했다.

병사와 광대들이 뒤섞인, 꽃가루가 날리는 시가행진.

저마다 가져나온 악기로 연주하는 즉흥 합주.

말의 배 속에 든 송아지의 배 속에 든 닭의 배 속에 든 메추리 통구이까지.

시민들은 3일 차까지의 축제를 모두 만끽했다.

그리고 4일차. 두 황자가 벌이는 두건 빼앗기 모의전.

모의전은 전승 기념광장에서 시작되지만, 원한다면 황도 안 모든 시가지가 전장이 된다.

도열한 400명의 병사들을 시민들은 광장 외곽에서, 2층 이상의 건물 창문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봤다.

“레온나토스 전하라면, 가장 총명하다는 그분?”

“그냥 공부벌레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엔지 황자는 대체 누구야?”

레온나토스의 이름은 시민들에게까지 퍼져 있었지만, 제국의 두 번째 황자이면서도 엔지의 이름은 그들에게 생소했다.

그리고 또 생소한 것 하나.

“…둘 다 웬 우의를 쓰고 있지?”

레온나토스의 흰 두건 팀과 엔지의 검은 두건 팀. 모두 두꺼운 우의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전승광장 중앙.

대장으로서 가마 위에 올라탄 레온나토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짓 점괘였다는 걸 듣긴 했지만, 정말 무정할 정도로 맑은 하늘이군.”

“네. 모의전 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혹시나 상대방이 우의를 준비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지만…”

엔지의 병사들은 절대 비 올 리 없는 쾌청한 하늘보다, 아렌의 점괘를 더 믿었다. 지금이라면, 아렌이 호박에서 오이가 열린다고 말해도 그대로 믿을 정도.

이번 모의전을 지켜보는 건 곳곳의 시민들만이 아니다.

황자들이 심어놓은 자들이 시내 곳곳에 숨어있을 터. 그들은 자신이 본 전투 양상을 최대한 상세하게 풀어 주인에게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아렌, 너까지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데…”

“저도 열다섯입니다. 제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피가 끓을 나이죠.”

“다른 열다섯이 다 그래도, 너만은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데.”

“…훈련 삼아 참가하는 겁니다. 한 명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혹시 다칠지도 모르니 가마 옆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가마 옆이 가장 위험할 텐데요.”

아렌의 말에 레온나토스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슬슬,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기념탑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진영 간의 긴장이 한동안 이어졌고.

-삐이이이익!

개시를 알리는 효시가 하늘을 향해 쏘아올려졌다.

그러기가 무섭게, 레온나토스 진영의 병사들은 덮어쓰는 우의를 단숨에 벗어냈다.

“-뭐야!”

아렌의 설계대로 엔지 진영이 우의를 갑옷에 바느질했을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갑작스레 우의를 벗고 한결 가벼운 몸으로 돌진하는 레온나토스 진영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당황스럽게 한 요소는 또 있었다.

“뭐야, 저 가면은!”

레온나토스의 병사들은, 펑퍼짐한 우의 아래 숨겨뒀던 청동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그때 터져 나온 제2 황자 엔지의 일갈.

“가면을 쓴다고 더 강해진다는 말이냐! 그저 보여주기식에 불과해! 절반은 가마를 지키느라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기사단이 주축이 되어 적을 막고 나머지는 얼른 빌어먹을 우의를 벗어!”

엔지의 말에 병사들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엔지 황자를 섬기는 기사단 85인과 병사 40인이 전열에 섰다. 나머지는 2인 1조로 갑옷 위에 단단히 동여맨 우의를 풀었다.

그리고-

따닥!

가면을 쓴 레온나토스의 병사들과 엔지의 병사들이 단번에 맞붙었다.

비록 엔지의 병사들은 우의를 쓰고 있어서 몸이 둔했지만, 태반이 기사로 이루어져 순수 실력만으로 레온나토스 군을 밀어붙였다.

“이 자식들, 그냥 밀려나잖아!”

“낮안개 기사단? 그래봤자 40명이 전부잖아!”

엔지의 전열이 버텨주는 동안 우의를 벗은 후위가 점점 합류하기 시작했다.

수적, 질적 열세에 초기의 기세를 잃고 서서히 물러나는 레온나토스 군.

엔지 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놓치지 마라! 지금 기회에 숫자를 벌려 단숨에 승기를 잡는 거다!”

밀어낼 때는 반듯한 직선이었던 전선이, 불규칙하게 물러나면서 톱니바퀴 모양처럼 들쑥날쑥해졌다.

혼전. 그 사이 다섯 개의 검은 색 두건과 여섯 개의 흰색 두건이 벗겨졌다.

그 순간에도 후위의 레온나토스와 여분 병력은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엔지 병사들의 머릿속에 ‘승리’라는 두 글자가 떠오를 때쯤.

딱!

따닥!

“아악!”

물러서는 레온나토스 군 사이, 벌이 쏘는 것처럼 날아온 목검이 엔지 군 두 명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의 두건을 단숨에 벗기고, 다시 후퇴하는 인파 속에 숨은 가면 쓴 병사.

그 광경을 본 엔지 진영 병사가 외쳤다.

“-고수다! 적 안에 고수가 섞여있다!”

“더글라스다! 더글라스가 이중에 있다!”

아렌이 테오드릭에게 말했던 ‘레온나토스에게 있지만 엔지에겐 없는 것’.

그건 바로, 검성과 비견될 만큼의 고수인 레온나토스의 근위기사, 더글라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라도 검은 하나. 미리 정해둔 대로 더글라스를 여러 명이 여럿이서 에워싸 대응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황하지 마! 정해둔 대로 행동해!”

엔지의 병사들은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에 숨은 더글라스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가면을 쓴 병사와 가면을 쓴 병사.

가면을 쓴 병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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