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94화 (94/227)

#094화

어떻게 할지 결정됐다면 괜히 미적거릴 필요 없었다.

레온나토스는 아렌을 대동한 채 곧바로 제2 황자 엔지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레온나토스의 제안을 들은 엔지는 단번에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모의전이라고? 레온나토스 너와 말이냐?”

레온나토스가 다른 이도 아니고 엔지 자신을 콕 짚어 지목한 건 너무 의도가 투명한 짓이었다.

이길 수 있을 만큼 만만하면서, 이겼을 때 확실히 이득을 볼 수 있을 만한 인물로 자신이 지목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엔지 형님. 모처럼 라이안 형님께서도 참석하시는 수확제입니다. 저희 둘의 모의전이라면 좋은 여흥 거리가 되겠지요. 부디 못난 아우에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레온나토스의 원래 의도야 어찌 됐건, 명분은 그럴듯했다. 어디까지나 도발이 아니라, 엔지에게 부족한 부분을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라이안 형님이?”

레온의 입에서 제1 황자 라이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엔지의 표정이 급변했다.

‘역시.’

레온나토스의 뒤에 있던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지는 제1 황자 라이안에게 공공연히 무시당하고 있었고, 그의 면전에서는 찍소리 못하더라도 언제고 라이안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형제들 중 라이안을 가장 오랫동안 봐왔던 엔지였지만, 라이안은 별다른 실력도, 역량도 없는 엔지를 경계조차 하지 않았으니.

‘엔지 너로서도, 라이안에게 한 수 보여주고 싶겠지? 레온나토스 정도면 할만한 상대일 테고.’

“모의전이라… 때에 따라서는 괜찮을지도-”

‘걸려들었어.’

아렌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레온나토스도 엔지의 말에 환히 웃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제안은 제가 먼저 한 것이니, 방식은 엔지 형님께서 정해주시지요. 달게 받겠습니다.”

“…단순히 여흥을 위한 놀음이라면, 전개나 승패까지 미리 짜놓고 해도 되지 않겠냐?”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이번 기회에 경험 많은 형님의 군사 지휘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려면 조작은 없어야지요!”

“그, 그래?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엔지는 여러 모의전 방식 중 하나를 조만간 확정해 알려준다고 말했다.

거기에, 레온나토스가 마지막으로 조건을 달았다.

“아, 혹시 괜찮다면, 모의전은 수확제가 가장 무르익었을 4일째에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훨씬 중요해 보이는 모의전의 형식까지 엔지에게 일임했고, 또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기에 엔지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날짜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아렌은 생각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

며칠 뒤 엔지가 알려온 모의전의 방식은,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두건 빼앗기였다.

엔지와 레온나토스가 각각 차출한 200명의 병사들이 흰색과 검은색 두건을 쓰고, 상대에게 두건을 빼앗기면 전사 판정이 되어 모의전에서 빠진다.

양 진영 모두 한 명의 지휘관을 두고, 그 지휘관의 두건을 빼앗긴 쪽이 패배하는 간단한 룰의 모의전이었다.

“200명이라.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모의전치고는 꽤 많은 수인데요?”

“내 가신 중 모의전에 참가할 수 있는 숫자는 기껏해야 백 명 조금 넘으니까. 나머지 인원을 다른 곳에서 빌려온다면 수나 질로나 엔지 형님에 열세일 테니. 그걸 노린 거겠지.”

레온나토스는 모의 훈련용으로 제작된 목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얇고 길게 잘라낸 나무 다발을 속이 텅 빈 형태로 짜 맞춰 묶은 훈련용 목검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전력으로 치더라도 뼈를 다치지 않게 해준다.

그만큼 실제 검보다 가볍기에 평소의 훈련이나 일대일 대련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이런 대규모 모의전에서는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어 자주 쓰였다.

“무기는 훈련용 목검으로 한정 짓는다더군. 창보다 검이 개개인의 역량에 크게 좌우되니, 엔지 형님은 확실히 승부수를 던지신 것 같아.”

“…저도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죠.”

레온나토스의 집무실에서, 아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의전의 전장이 될 시가지를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무언가 쓸만한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혹시 모르니 호위를 꼭 데려가게, 아렌.”

“네, 전하. 아. 그리고.”

아렌은 굳이 기사들과 위병까지 듣고 있는 동안 레온나토스에게 말했다.

“수확제의 4일째가 되는 날, 기록적인 폭우가 갑작스레 쏟아질 겁니다.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센 빗줄기 말입니다.”

“4일째면, 모의전 중이지 않나!”

“그러니 저희 병사들은 복장에 미리 우의를 덧대고, 두꺼운 장화까지 갖춰 신어야 합니다.”

“그렇게 껴입으면 움직임이 제한될 텐데-”

“비에 흠뻑 젖어 옷이 몸에 잔뜩 달라붙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이건, 절대 비겁한 짓이 아닙니다. 날씨를 미리 파악하는 건 전장의 기본 중 기본이죠.”

“…….”

역사에 기록된 명장들이 전장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과, 아렌이 말한 것은 그 방법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 같았지만, 레온나토스는 그걸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시가지에 다녀올 동안 절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의를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지. 그럼 됐겠지?”

“그냥 우의를 뒤집어쓰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싸움 중 벗겨질 수도 있으니, 아예 우의를 옷에 꿰매도록-”

“알았어, 알았다고.”

극성인 아렌에게 손사래 치는 레온나토스.

그리고, 레온나토스를 지키는 위병들 중 둘의 대화에 유난히 귀 기울이는 병사가 있었다.

*****

아렌은 축제 준비가 한창인 시가지를 꼼꼼히 살폈다.

별다른 경기장 없이, 사람들을 물린 거리에서 그대로 진행되는 모의전이기에 사전 시찰은 필수였다.

황도의 시민들은 모의전이 진행되는 동안 각자의 집이나 가게로 들어가, 2층 창문을 통해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가전을 응원할 것이다.

늦가을, 한 해의 작물을 모두 수확한 후 그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벌어지는 축제이니만큼 집 앞, 가게 앞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수확제 전에 이렇게 나와본 게 처음이야.’

수확제는 매년 벌어지지만, 축제가 준비 중인 동안 황궁 밖을 나올 일이 없었다. 그저 준비된 축제를 높은 단상에서 즐기기만 할 뿐.

그렇기에 곧 닥쳐올 축제의 열기가 미열처럼 남아있는 거리는 마치 연극 무대의 뒷면을 엿본 것같이 묘한 긴장감을 가져다줬다.

‘이 골목은 안되겠군. 너무 좁아. 발이 걸려 넘어질 만한 곳은 없는 것 같고… 옆 건물의 옥상에 병사들을 배치할 수 있으려나?’

아렌이 시가지의 지도에 이것저것 표시하며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괜찮아요, 병사님들. 저 위험한 사람 아니거든요?”

사복을 입은 위병들이 아렌을 향해 다가오던 여자의 접근을 막았고, 후드를 쓴 여자는 병사들을 향해 맥빠지게 웃었다.

모두 사복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병사인 줄 알았을까.

아렌은 그늘이 져 어두운 후드 안쪽 얼굴을 주시했다.

“…어라?”

“이런 곳에서 또 보네. 오랜만이야?”

놀라는 아렌에게, 아트마 교국의 주교 아르테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니까.”

아렌은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병사들을 조금 멀리 물렸다.

“…뭐죠? 교국과는 아직 우호관계가 아닐 텐데, 이렇게 적국 한가운데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아직은 적국 아니거든? 그리고 당연히 비공식이지.”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놓죠? 이전엔 높였잖아요?”

“그편이 병사들에게 둘러대기 좋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이게 더 편하기도 하고.”

아르테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게 편하다면야.”

아렌 주변에는 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아르테에겐 의미 없는 위장이었다.

아렌은 골목 곳곳을 걸어가며 지도에 표시했다.

“당신 수행원들도 고생이 많겠네요. 한가하게 축제 구경이나 하려고 온 거에요?”

“어머. 수확제는 제국의 1년간의 작황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사인걸? 이 축제가 얼마나 성대하냐로 한 해 거둬들인 수확물들의 양을 유추할 수도 있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도국 연합의 높으신 귀족들도 벌써 축제 전야제를 즐기러 들어왔을걸?”

아르테는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놨지만, 결국은 축제를 즐기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었다.

‘…마침 잘됬어.’

“주변에 당신 호위도 있겠죠. 가까이 있나요?”

“음, 아니? 지금은 네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걸 아니까, 병사들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을걸?”

“할 말이 있어요.”

아렌은 그대로 걸으며 라이안에 대해 알렸다.

오랫동안 서부국경에 있던 황자였고, 어쩐지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다고? 운명석 사용자도 아닌데?”

“운명석 사용자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운명석에 대해 아는 것 같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고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추측이라, 그거지?”

“네. 도국 연합엔 온갖 정보가 흘러들어간다고 하죠. 어쩌면 도국에 운명석에 대한 정보가 있고, 그걸 라이안 황자가 들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아렌의 추측에 따르면 건국왕의 참모였던 현자 솔티르는 높은 확률로 운명석 사용자였다. 그 사실을 황제가 대대로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던 라이안이 황제에게 그 사실을 몰래 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아르테가 황도에 들어와 있는 이상 어떤 경로로 라이안을 마주할지 모른다.

아르테는 아렌의 속 생각은 읽지 못하지만, 무언가를 걱정한다는 것은 분위기로 읽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궁금하면, 내가 알아봐 줄까? 날 라이안 앞에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아뇨.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겠죠.”

단지 흑옥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만으로 접근해 세세히 살피고, 이것저것을 질문한 라이안이었다.

한번 과거로 되돌아온 후였기에 반지에 실금이 가 있었고, 그 덕에 의심을 피할 수 있었지만 아르테에게도 그 행운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혹시나 들킨다면 둘 다 위험해지니까요. 병사들 중 누군가 당신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음…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모의전은 나도 구경할 테니 열심히 해?”

아르테는 인사하곤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모의전을 구경한다고?’

교국의 주교인 아르테 뿐만 아니라, 도국의 유력 가문 사람들도 미리 도착해 있다고 한다.

모의전에서 이긴 쪽은 황실과 시민들뿐만 아니라, 몰래 숨어든 이웃 국가에게도 그 역량을 뽐낼 수 있다.

이제는, 실수로라도 져서는 안되는 승부가 되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수확제의 4일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다는 점괘는, 새빨간 거짓이었다.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도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점괘를 흘려, 엔지의 병사들에게도 우의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렌의 작전이었다.

기다리던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고, 당일 직전에 몰래 우의를 벗기 쉽게 조정한 레온나토스의 병사들은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엔지의 병사들을 기습한다는 것이 작전의 요지였다.

‘그것 한방으로 이길 수는 없겠지만, 효과적인 기습은 되겠지.’

시가전의 지휘는 근위대장인 가웨인, 그리고 레온나토스가 직접 나선다.

아렌은 레온나토스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알기에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럴듯한 점괘로 아군 사기는 높이고 상대방의 사기는 낮추는 것 정도지.’

그리고, 그건 아렌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거리의 시민들이 축제를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황궁 안의 시간도 분주하게 흘렀다.

그리고, 수확제의 첫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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