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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93화 (93/227)

#093화

라이안이 반대에 대해 언급하자, 아렌은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아, 이건,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마지막 물건이라 습관처럼 끼고 있습니다.”

“그렇군. 어디 자세히 봐도 되겠나?”

“네, 그러시죠.”

보통의 경우라면 다른 이의 장신구에 대해 이만큼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역시, 라이안은 아렌의 반지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잖아!’

아렌은 왼손을 내밀었고, 라이안은 아렌의 왼손 검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말했다.

“저런, 겉에 실금이 가 있군. 불편하지는 않은가?”

“-네. 괜찮습니다.”

‘…뭐지?’

아렌은 라이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아렌의 흑옥 반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던 라이안이, 반지의 실금을 확인하자마자 흥미가 확연히 사라진 것이다.

‘분명, 운명석이었다고 의심했던 게 아니었나?’

라이안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하나다.

라이안이 보기에 금이 간 흑옥은 운명석이아니거나, 적어도 더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

어느 쪽이든 라이안이 운명석에 대해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황궁 서고에서는 거의 정보를 찾을 수 없었는데. 제국 곳곳을 누빈 만큼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건가?’

라이안은 이내 아렌의 반지에서 흥미를 잃었고, 다른 황자들 역시 신경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실례가 많았군. 그럼.”

대회견장 안의 신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때쯤, 라이안은 자신의 방을 향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황제와 독대하기 위해 걸어나갔다.

*****

레온나토스의 집무실.

아렌과 레온나토스는 새로이 결정한 선페일 지역의 통치 문제를 두고 세부사항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럼 영지민들 사이에서 선출된 지사를 뽑는 게 먼저겠군.”

“권력이 집중되면 임기가 있는 또다른 영주가 되겠죠. 권력은 분산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비밀 조사관도 보내야겠지. 어느 빈도로 보내는 것이…”

“태양교에도 협력을 해야겠지요. 그들 역시도 전에 했던 제안대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니 만족하겠지요. 그리고 조사관이 회유되지 않을 만한 장치도…”

지금껏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통치방식인 만큼, 생각할 것도 많았다.

도국 연합 안의 여러 도시 역시 돌아가며 시장을 선출한다지만, 후보자들은 대부분 도시 안의 유력한 두세 가문의 일인. 자연히 시장 역시 몇몇 가문이 돌아가며 선출된다.

“…후우!”

머리를 싸매던 레온나토스는 한숨을 쉬며 철필을 내려놓았다.

“집중이 안 되십니까?”

“그래. 라이안 형님 말이야. 설마 이런 타이밍에 오실 줄은 몰랐는데.”

기존의 통치 체제와 다른 방법을 시험해보고 싶다고 제안한 건 레온나토스였고, 아렌 역시 황궁 안에 가져올 극적 효과를 생각해 그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회견장에 등장한 라이안이 레온에게 가야 했을 모든 이목을 독식했다는 건 뼈 아픈 부분이었다.

“확실히, 당분간 황궁에 오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최근엔 대부분 서부 국경에 가 계셨으니까요.”

서부 국경. 라두크 도시 국가 연합과 맞닿은 곳이었다.

대륙의 서쪽, 톱날처럼 들쭉날쭉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자리 잡은 열아홉 개의 도시국가 연합이 바로 라두크 도국 연합이었다.

경제 구조상 상업에 능해 온갖 정보들이 화폐와 함께 도국 안으로 흘러들었고, 자연히 도국에는 수많은 정보들의 경중과 허실을 가리는 기관 역시 발달했다.

특히 라두크 도국 연합의 밀정은 천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대륙 전역에 악명높았다.

‘만약, 라이안이 도국 연합과 손을 잡았다면, 그곳에서 운명석에 대해 알았어도 이상하지는 않아.’

대륙 전역의 온갖 소문들이 흘러가는 곳이니, 그곳에서 알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좀 더 알아봐야겠어.’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분명 라이안 전하는 강력한 경쟁자이지만, 전하께서도 지금 상승세이시지 않습니까. 이전에 미리 은 유통망을 준비해뒀는데, 지금은 마차를 채울 은괴 역시 전하의 것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준비하든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점이 아니다.”

“그렇다면…”

“라이안 형님이 앞에 있으면, 과연 내가 라이안 형님을 제쳐두고 황태자가 되는 것이 옳은가 생각할 수밖에 없어.”

“전하께선 분명 성군이 되실 겁니다.”

“그 성군이라는 건, 나만이 될 수 있는 건가? 라이안 형님 역시도 성군이 되실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레온나토스의 말대로였다.

라이안이 황제가 되어도, 필시 제국의 입장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그림일 것이다.

어느 곳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 아니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팔방미인 황제가 아렌의 눈에서 선명하게 그려졌으니까.

‘…그리고, 권력만을 원하는 엔지 같은 자들에게는 또 다르게 보이겠지.’

레온나토스처럼 제국을 위해 황제가 되려 했던 자들에게는 왜 굳이 이겨야만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자신의 영달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자. 그게 제국의 제1 황자인 라이안 브륀할트였다.

“내가 황제가 되려 했던 것들, 가령 동쪽 아티스 지방의 발전 역시 라이안 형님이 잘 해나가실 수 있을 거다. 내가 곁에서 도움을 드려도 되겠지.”

“…아닙니다.”

레온나토스를 설득하기 위해, 이내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라이안 전하께서도 좋은 황제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역량도 자격도 충분하시죠. 하지만, 그 방향이 정말 레온나토스 전하와 완전히 같은 방향일지는 미지수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고, 레온나토스 전하가 절대 하지 않았을 실책할 수도 있겠죠.”

“…그런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보네만.”

“하지만 레온나토스 전하가 즉위하신다면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레온나토스 전하가 황제가 되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

분명 라이안은 모든 부분에서 약점이 없다. 반면 레온나토스는 군사 역량에 있어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약점은 보완하면 그만이다.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보완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흠결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다면 테오드릭 전하를 중용하셔도 되고요.”

“테오 형님은 나와 황권 경쟁을 벌이는 분이다. 그런 분께 즉위 이후 제안 드리는 건 실례가 아닐까?”

‘테오드릭은, 진작에 이쪽에 붙었지만.’

“저 역시 테오드릭 전하께서 받아들인다는 가정 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테오 형님께서 받아만 주신다면, 당연히 나야 고맙지.”

“제국을 전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하께서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뿐입니다. 역량이 안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역량이 되는데도 물러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이안을 만나고 마음속에 생겨난 의구심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떨쳐 버려야 했다.

다행히 아렌의 말이 효과가 있었다.

“…그렇군. 여기서 포기한다면, 고향을 위해 내 아래서 5년 동안이나 힘써준 핀을 볼 낯이 없겠군.”

궁인으로 받아들였던 아티스 유민 출신의 핀은, 늦은 밤마다 황궁 곳곳을 누비며 숨겨진 비밀 시설을 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망자들로 가득 찬 아티스의 황궁을 뚫고 몇 번이나 드나든 실력은 여전해서, 이미 황궁 이면의 시설들을 거의 다 찾아낸 상태.

‘누군가를 엿듣거나 하지는 않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밀정이군.’

“그러고 보니, 요즘 핀은 뭘 하고 있습니까? 돌아오고 나서도 못본지 꽤 된 것 같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나도 꽤 되었구나. 황궁 아래쪽, 고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니 아마 그쪽을 조사하고 있을 거다.”

“고대 유적이요?”

“처음엔 고대에 지어진 수로인 줄 알았는데, 실은 복도에 물이 흐르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하더군. 훨씬 심부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했으니 아마 그쪽을 알아보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어쨌든, 지금 전하의 입지는 가웨인 전하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전하는 다른 황자들보다 10살가량은 젊으시고, 그 부분은 분명 가산점의 영역이겠죠.”

체력과 정신력 모두 나이에 따라 기량이 변한다. 황제가 지금 당장 권력을 이양할 것이 아닌 한, 맞이가 선호되는 것만큼 어린 나이 역시도 선호된다.

특히 황제로서 부족함이 없는 재목일수록, 어리면 더 오래 즉위해있을 수 있으니까.

아렌은 레오나토스에게 충고했다.

“물론, 가진 약점을 보완하는 것은 중요하죠. 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는 건?”

“아무리 약점을 보완한다고 하더라도, 비교 대상이 없다면 명확히 알기 어렵죠. 서로 대조할 수 있어야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테니까요. 그리고 비교하자면 역시 황자들 중 한분과 해야 합니다.”

아렌은 레온나토스의 옆에 세울 수 있는 자들을 하나씩 꼽아갔다.

“라이안 전하나 가웨인 전하는, 군사적 역량으로 넘기엔 아직 역부족입니다. 테오드릭 전하 또한 보수적인 가치관의 무관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고요. 다른 유력한 황자들 중에선 역시 엔지 전하와 루카스 전하, 두 분 중 한 분이 적합할 듯합니다.”

제2 황자와 제3 황자. 최근 아렌에게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 만큼, 레온나토스에게 본격적으로 날을 세우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흠, 루카스 형님을 상대로 군사적 역량을 뽐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군. 애초에 루카스 형님의 강점은 그쪽이 아니니 말야.”

“네. 그렇다면 남은 건 엔지 전하로군요. 비록 가신의 질적 역량은 떨어질지라도, 양적 역량만큼은 라이안 전하나 테오드릭 전하와도 비견되니까요.”

엔지 황자와 대결해 넘어선다면, 군사적 역량만큼은 약체라는 레온나토스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꿔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수단인데.’

아렌의 눈에, 문득 책상 위 펼쳐진 달력이 보였다.

“달력을 가져다 놓으셨군요.”

“그래, 조만간 수확제니까. 축제에 행진이 있을 텐데 시가지의 동선을-”

“…그렇군요.”

아렌의 머릿속에 무언가 그려졌다.

“곧 있을 수확제에서, 엔지 전하에게 모의전을 제안하는 건 어떻습니까?”

“…모의전?”

“네. 축제이니만큼 황도 시민들에게 볼거리도 선사하고, 황궁의 병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선전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엔지 형님을 통해 군사적 역량도 뽐낸다?”

“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부족할 뿐, 전략 전술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지 않습니까?”

선입견이란 무섭다.

확실히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10살 무렵의 레온나토스는, 다른 부분에는 해박할지언정 무술이나 전략전술에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황권 경쟁에 뛰어들고 5년간, 레온나토스는 원래 부족하고 약했던 부분조차 확실히 갈고 닦았다.

선입견은 달라진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지금이 보여줄 때였다.

“…하지만, 엔지 형님이 과연 받아주실까? 형님에겐 내 제안을 받아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아뇨. 분명 받아주실 겁니다.”

아렌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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