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레온나토스의 한마디에 대회견장 안은 경악과 침묵속에 휩싸였다.
그 침묵을 깰 수 있는 건, 오직 황제뿐.
황금 가면을 쓴 브륀할트 8세는 두 명의 금면병 사이에서 고고하게 레온나토스를 내려다봤다.
“지금 한 말이 선페일 지역을 네가 다스리겠다, 그리 말한 것이냐?”
“조금은 다릅니다. 영주는 저이지만, 통치는 제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험?”
“그렇습니다. 선페일 지역의 주인으로 우선은 저를 세워두되, 영지를 통치하는 건 영지 안의 제국민 중 대표를 뽑아 그에게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영지의 통치를, 제국민에게 맡긴다?”
대회견장 안의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황제는 조용히 손을 들어 약간의 웅성거림을 곧바로 막았다.
한층 조용해진 가운데 레온나토스는 다시 말했다.
“선페일의 전 영주, 카로나 윈더포드는 한 영지를 도맡을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단지 윈더포드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난 이유만으로 영주의 자리에 올랐을 뿐이지요.”
“지금 수백 년을 이어온 제국의 통치체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을 하고 있군.”
“물론, 세습을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제 몸에서부터 선황 폐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레온나토스는 앉아있는 황자들을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제국 전체를 다스릴 황제조차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는데, 정작 이를 뒷받침해줘야 할 영주들이 자격이 없다면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럴듯하군.”
합리만을 추구하는 제3 황자 루카스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너무 급진적인 방법인데. 다른 지방 영주의 반발이나 선페일의 혼란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묻고 싶군.”
“물론 다른 영지 모두에 적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명목상의 영주로 존재하는 한, 언제고 적임자에게 영주 자리를 맡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문제가 생긴 영지의 영주를 언제고 쳐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면 각지의 영주에게도 본보기가 될 겁니다. 좀 더 제국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게 되겠지요.”
“물론, 그리된다면 영지민들의 삶은 더 좋아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제국의 힘이 분열될 수도 있겠지. 굳이 영주들의 불안을 자초해 하나로서의 제국을 약하게 한다면?”
“저에게도 하나의 실험일 따름입니다. 정기적으로 상세한 보고를 받을 것이며, 이따금 비밀 조사관도 보내 현황을 파악할 예정입니다. 지금도 각지에 조사관이 파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황제의 앞에서 루카스와 레온나토스 간의 조용한 설전이 이어졌다.
“…말도 안 되지.”
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제2 황자 엔지는 고개를 저었다.
엔지가 보기에는 황제의 권력을 뒷받침해줄 영주들의 불안을 굳이 사는 하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지. 황자의 뜻대로 해보도록.”
“폐하!”
황제의 말 한마디에 회견장 안이 단숨에 들썩였다.
회견장 안의 소란에도 황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짐은 레온나토스 황자에게 영주 임명권을 일임했다. 그리고 영지를 어떻게 다스릴지는 순전히 영주의 몫이지. 레온나토스의 선페일 영주 임명을 반대한다는 건 곧, 짐의 명령을 불복한다는 뜻이라 봐도 되겠지. 어때, 지금도 반대하는 자 있나?”
“…….”
황제가 다시 물었을 때, 이번에는 누구도 감히 헛기침조차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야.’
부복한 채로 아렌은 생각했다.
영주의 임명권은 실로 커다란 특혜이지만, 그와 동시에 황제가 보기에 영 아닌 결정을 내린다면 오히려 레온나토스의 황권은 멀어지게 된다.
‘진짜 문제는, 황제는 레온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인데.’
황제가 레온나토스의 제안을 수용한 것과, 그 결정을 얼마만큼 기꺼운 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만큼은 아렌에게도 여전히 미지수다. 황제는 황금 가면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 또한 넓은 회견장 곳곳을 메아리치느라 웅웅 울렸으니까.
레온나토스의 제안이 지나치게 급진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밀어붙인 이유는 있었다.
파격적인 제안일수록 황궁 안에서 오래 회자되며, 여러 사람의 화두에 오를 테니까.
주목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레온나토스의 방법에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한동안 레온나토스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 되겠지.
‘이걸로 레온나토스의 황궁 내 입지는 더 확고해지겠지.’
아렌이 속으로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일 때쯤.
벌컥!
굳게 닫힌 대회견장의 문이 열렸다.
한번 시작된 어전회의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절대 열리지 않는다.
열릴 리 없는 문이 열리자, 자연히 모두의 눈이 뒤쪽으로 쏠렸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백색 망토를 걸친 채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
아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안?!’
제국의 제1 황자, 라이안 브륀할트였다.
“…라이안 전하?”
“서부 국경으로 간 전하가 어째서 여기에?”
그가 등장하자 다른 신료나 황자들도 혼란스러워했다.
주변의 웅성거림은 묵살한 채, 라이안은 황제의 단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황제에게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수고했다, 라이안.”
황제 또한 라이안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황제가 받아들이고 인정한 이상, 라이안의 태도는 무례가 될 수 없다.
‘…제1 황자, 라이안.’
공교롭게도 제2 황자와 제3 황자가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궁 안에서 넘어야 하는 가장 높고 험한 언덕이지만, 정작 외부 일정이 너무도 많아 황궁 안에서 본 적은 손에 꼽는 황자.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제4 황자 가웨인조차도 라이안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레온나토스에게 끌려야 했을 이목은, 한순간에 라이안에게만 쏠려 있었다.
*****
레온나토스가 화제와 논란의 중심이었어야 할 어전회견은 라이안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다소 어수선하게 끝났다.
신료들이 먼저 회견장을 나가는 동안 라이안은 형제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라이안.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
이미 첫 번째 삶에서 20년 동안 황궁 내부에 뿌리내렸던 아렌이었지만, 그조차도 황궁 안에서 라이안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건 몇 번 없었다.
항상 황제를 대신해서 제국의 곳곳을 누비는 게 라이안의 일상이었으니까.
보통 황궁에 오래 있지 못한 황자는 그 지지기반이 약해지지만, 라이안만은 예외였다.
황태자가 누군지 정해지지 않은 지금 순간에도 라이안은 이미 황제 다음의 권력을 가진, 제국의 2인자나 다름없었으니까.
‘제국에는 큰 황제와 작은 황제, 두 명의 황제가 있다’라는 불경한 소문이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다.
‘작은 황제.’
“혀, 형님… 무탈하셨습니까?”
“아, 그래.”
제2 황자 엔지가 조금은 비굴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말했지만, 라이안은 그의 인사는 들은 체 마는 체했다.
“오, 루카스. 못 본 사이 얼굴이 더 딱딱해진 것 같구나.”
“제 피부와 골격은 평소대로입니다, 형님.”
“가웨인. 네 실력이 도국에까지 퍼져 있더구나. 그동안 녹이 슬진 않았겠지?”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줄까?”
“오, 테오드릭. 여전히 조각상처럼 우락부락한 몸뚱이구나.”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라이안은 모든 황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황자만 언급한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온나토스. 최근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테오드릭 사이의 황자들을 건너뛰고, 라이안은 곧바로 레온나토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거의 대놓고 무시당한 엔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격려 감사합니다. 형님께서도 몸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뭘. 그나저나, 내가 중요한 순간에 물을 흐린 모양인데. 네게 미안한 짓을 한 것 같구나.”
“아닙니다, 형님.”
레온나토스는 라이안의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몸을 꼿꼿이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이안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그건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라이안의 존재감에 대항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존재감이 상당한데?’
건장한 체격에 다부진 몸, 각이 져 있지만 온화한 얼굴. 이제 곧 서른에 접어드는 라이안은 지금 당장 황제에 즉위해도 이견이 없을 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아렌은 첫 번째 삶에서는 라이안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황자들이 라이안의 앞에서 위축될 때 왜 저러나 싶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아렌의 첫 번째 삶에서는 권력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었고, 라이안과 경쟁할 필요 또한 느끼지 못했기에 그 찌르는 듯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모두와 대강 인사를 나눈 라이안은 황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막 도국과 인접한 서부 국경에서 돌아온 참인데, 그 주변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듣자 하니 동부나 남부,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더군. 지난 수십 년간 안정되어있던 정세를 생각하다간 누가 황제가 되든 큰코다칠 것이다. 앞으로 제국은 어떤 형태로든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러니, 혼란을 극복할 확실한 황자가 즉위해야 한다?’
라이안의 말에는 누가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의견은 쏙 빠져 있지만, 오히려 그 태도 자체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안의 속내를 한 번이라도 가늠하고 싶은데. 이번 생에선 라이안의 점괘를 볼 수 있을까?’
라이안은 아렌의 점괘를 전혀 믿지 않았기에 한 번도 점을 본 적이 없었다.
무사 안일주의였던 아렌 또한 굳이 몇 번 보지 못하는 라이안에게 점술을 권하지 않았다.
레온나토스의 곁에 있는 아렌으로선, 지금이 라이안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기회였다.
아렌의 시선이 라이안의 얼굴을 훑었다.
‘누구나, 아무라도 라이안에게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답하는 라이안의 표정 변화로 그 속내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 라이안의 꿰뚫는 듯한 시선이 아렌을 향했다.
‘이크!’
아렌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얼버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뭐지? 꽤나 당돌한 시선이군. 레온나토스 네 가신이냐?”
“제 비서관 아렌이 무슨 결례라도 저질렀습니까?”
“아, 이 자가 점술가 아렌인가?”
라이안의 시선을 더욱 느끼며 아렌은 머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전하의 존안을 뵐 기회가 적은지라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례는 무슨. 그냥 본 것뿐인데.”
하지만, 이번엔 라이안이 레온나토스의 뒤에 물러나 있는 아렌을 훑어봤다.
드러누운 개구리를 노려보는 매와 같은 시선.
“황궁에 있는 동안 언제 레온나토스를 찾아가지. 그때 너도 동석해줬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전하.”
아렌으로서도 라이안은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기회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야 했다.
라이안의 제안을 아렌이 조용히 기뻐하는 찰나.
“그런데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는 뭔가 특별한 물건인가?”
라이안이 툭 내뱉은 말은, 아렌을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