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감히! 벼락출세한 천한 놈 주제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거냐?!”
제2 황자 엔지의 얼굴은 낙일관의 어둠 안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잔뜩 달아올랐다.
아렌의 말은 두 황자의 노여움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한 말.
그 목적은 어느 정도 정답에 근접했지만, 엔지가 저만큼이나 흥분해서야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한다.
지금은 순순히 사과하는 게 맞을 듯해 아렌이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만 두십시오, 엔지 형님. 다른 자도 아니고 레온나토스의 서기관입니다. 레온나토스의 최측근에게 그러한 폭언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엔지와 동행한 제3 황자, 루카스는 아렌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아렌 공이 한 말은 아마, 그러한 점괘가 나왔으니 유의하라는 그런 말이었겠지요. 어떤가, 내 말이 맞나?”
“네, 맞습니다. 제 설명이 부족해 괜한 오해를 불러올 뻔했군요. 루카스 전하 덕분에 오해가 풀릴 것 같아 다행입니다.”
“흠, 역시 그랬군.”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설마하니 아렌 공이, 점괘를 빙자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그런 사람은 아닐 테니까.”
“물론입니다. 설마하니 제가 그러겠습니까.”
아렌이 맞장구를 쳤지만, 역시 아렌에게는 루카스가 더 어려운 상대다.
모든 일에 공정하고 철저하다는 면에서만큼은 레온나토스와 비슷하다는 평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몸에 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 그것이 바로 제국의 제3 황자 루카스였다.
비록 능력만큼은 확실하나 너무도 융통성 없는 모습에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가신도 많지 않았고, 궁인들에 좋은 인상을 남겨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만약 황제가 되기만 한다면, 내정만큼은 가장 잘할 황자라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레온나토스로서는 가장 성가신 상대지.’
루카스의 비호 아닌 비호에 엔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흥, 점괘? 난 그런 알량한 미신 따위 믿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렌의 눈에는 엔지가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게다가, 점복술이란 원래 나쁜 점괘를 피해 가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나?”
엔지의 말대로였다. 흉괘가 나오고 그것이 끝이라면, 점술을 보는 의미가 없다.
앞으로 닥칠 흉조를 피하고 싶기에 많은 사람들이 점괘를 보는 것이다.
“네. 그 말씀대로, 점술은 그 점괘를 피해갈 방법도 마찬가지로 제공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아렌은 어둠 속에서 싱긋 웃어 보이곤 말했다.
“그 미래를 피해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제가 알려드릴 리는 없지 않습니까?”
“…이놈이!”
제2 황자와 제3 황자, 둘이 한꺼번에 아렌을 찾아왔지만 아렌에게 그리 버거운 상대는 아니었다.
둘이 동시에 찾아온 것은 달리 말하면, 그래야 할 정도로 두 황자가 궁지에 몰려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평소 견원지간처럼 적대시하던 둘이기에 더욱 그렇다.
궁지에 몰린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렌의 주인, 레온나토스 때문이겠지.
“꽤나 기고만장하구나, 아렌. 레온나토스에게 사소한 공을 세워줬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제2 황자의 비아냥거림도 아렌에겐 와닿지 않는다. 아렌의 권위는 레온나토스의 권위에 기대고 있고, 레온나토스의 권위는 저 두 황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어쩌면, 지금의 레온나토스는 가웨인보다도 높을지도.’
물론 저 두 황자도 얕잡아볼 건 아니다.
가령 제2 황자 엔지는, 빈말로도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언변이 뛰어나다거나 무력이 출중하다거나, 머리가 좋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짤막한 몸에 살까지 쪄 잘생기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제2 황자 엔지에겐 누구보다 강렬한 권력욕이 있었다.
첫번째 황자이자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인 라이안과 태어났을 때부터 비교당했고, 항상 열등한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황제가 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시들지 않고 더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오직 권력이 목적인 엔지의 곁에는, 마찬가지의 목적을 가진 수많은 자들이 항상 모여들었다. 마치, 썩은 고기에 파리가 꼬이듯.
“…확실히, 요즘 레온나토스의 기세가 매섭다는 건 인정하지. 이번에 은광산을 받는 것도 모자라, 선페일 제역의 영주 임명권까지 행사하게 되었으니.”
엔지가 언급한 사실들은 아직 밖에 공표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엔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받은 영주 임명권이지만, 정작 밀어줄 만한 귀족이 있나? 없겠지. 너무도 고고해서 사람이 꼬이지 않는 것. 그게 레온 녀석의 약점이니까.”
엔지는 옆의 루카스를 가리켰다.
“옆의 벽창호 놈과 마찬가지야. 비록 이놈은 고상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결벽에 가까운 심성 때문이겠지만.”
엔지의 비꼼에 루카스가 반박했다.
“어폐가 있군요. 전 상식대로 행할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엔, 다른 이들이 상식대로 못하는 것에 가까워요.”
반면 제3 황자 루카스는 아렌의 주군인 레온나토스와 많은 면을 공유했다.
내정 쪽으로 유능한 것부터, 자신의 세력을 그리 많이 취합하고 있지 않은 것까지.
그런 루카스가 직접 아렌에게 말했다.
“레온나토스와 난, 제법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레온이 날 지원해서 내가 황위에 오른다면, 레온나토스를 중용할 것이라 약속하지.”
그 말에 엔지는 어이없어했다.
“…지금 그 말을, 내 앞에서 해도 되는 거냐?”
“형님이 없는 곳에서 말하면 그건 뒷공작이 되지 않습니까.”
루카스는 이런 순간에도 답답할 정도로 솔직했다.
“…루카스 전하께서 해주신 제안은, 제가 레온나토스 전하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러던지. 어차피 아렌 네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한가지 여쭤보고 싶군요.”
“뭐지?”
“왜 레온나토스 전하가 스스로 황자가 되지 않고, 루카스 전하를 선택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레온나토스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황자들의 지독한 견제와, 생명에 다다르는 위협을.”
“아뇨, 그 위협이라면 이미 겪어보신 적 있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없었다.”
루카스는 단언했다.
그의 말이 지금까지 있었던 레온나토스에 대한 암살기도를 모르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단순한 협박과도 거리가 있는데. 직접 이쪽을 노리겠다는 말과도 조금은 다른 것 같고… 아, 그렇군.’
아렌은 곧바로 이해했다.
대화가 끝나가는 와중에도, 루카스와 아렌을 불타는 듯한 눈으로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제2 황자 엔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권력욕에 미친 황자라. 확실히 그의 표적이 되어본 적은 없지.’
*****
제2 황자 엔지의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모인다.
문제는 그 양은 제법 될지언정, 질마저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령 가웨인의 경우 그 스스로가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정도의 고수이기에 모이는 자들 역시 그 무를 동경하는 고수들 뿐이다.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라 여겨진 제1 황자 라이안의 경우 수많은 신하들이 모여들기에, 능력에 따라 추려도 가신들의 양과 질 모두 다른 모든 황자들보다 우위에 있다.
비록 엔지의 세력이 라이안과 가웨인에 이은 3번째로 많다고 하지만, 그건 찾아오는 궁인들을 되는대로 받아들여 형성된 세력일 뿐.
가신들의 능력이나 됨됨이 등은 미지수였다.
“…루카스 형님의 말은, 엔지 형님이 날 노린다는 것인가?”
낙일관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레온의 집무실로 들어온 아렌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레온나토스에게 보고했다.
“굳이 엔지 전하를 지칭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포상 건으로 레온나토스 전하의 주목도가 단숨에 올라간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간 5년 동안 착실히 세력을 구축해 유력한 후보군에 들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 극적인 성장은 드무니까요.”
두각을 드러내는 황자에겐 언제나 암살 위협이 뒤따른다.
일례로 가웨인은 철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줄곧 살해 위협에서 싸워왔다고 하니까.
‘…잠깐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폐가 있다.
가웨인이 유력한 황태자 후보이기에 살해위협이 있었다면, 가장 유력한 제1 황자 라이안에게는 어째서 살해위협이 뛰따르지 않았을까.
물론 가웨인과 달리 라이안은 자신을 향한 살해 위협들을 굳이 세간에 공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레온나토스 전하. 라이안 전하께 살해 위협이 있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응? 그러고 보니, 생소한 것 같기도… 하지만 보통은 라이안 형님께 가장 많은 위협이 가해져야겠지.”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요?”
“뭐라고?”
“적어도, 루카스 전하는 그리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제2 황자 엔지는 권력욕이 특출난다.
하지만 그가 발톱을 드리우는 건 주로 바로 옆 터울인 제3 황자 루카스이고, 라이안과의 직접 다툼은 항상 피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
레온나토스도 곧바로 아렌의 말을 이해했다.
“…엔지 형님이 버거운 상대인 라이안 형님은 피하고, 상대적으로 할만한 상대인 루카스 형님이나 어릴 적 가웨인 형님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인가?”
“어디까지나 루카스 전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루카스 전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오히려 위헙합니다.”
제2 황자와 제3 황자는 서로를 가장 큰 적으로 인식한다.
자신들의 위아래로 너무도 유력한 황태자 후보들이 포진해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실각해도 나머지가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다.
루카스로서는 이쪽이 엔지 황자를 주목하게 한 다음, 갈등을 부추기기만 해도 그 사이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다.
심할 정도로 고지식한 루카스가 설마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러고 보니.’
아렌은 문득 루카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레온나토스 전하. 선페일 영주로 생각해두신 분이 계십니까?”
“적합한 자는 몇 있어. 하지만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는 않단 말이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비어있는 영주 자리에 누구를 천거하느냐도 황제 폐하의 평가에 들어갈 것입니다.”
“알고 있어. 문제는, 그 기준을 모른다는 것이지. 폐하께서 원하는 자를 내가 임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니까.”
“물론입니다.”
황제는 자신의 복제품을 후계자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황제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결정을 한다 해도, 그를 설득만 한다면 상관없을 터.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선페일 영주 건은 좀 더 생각해보지. 그런데 아렌.”
레온나토스의 표정이 조금 엄해졌다.
“낙일관에 방문한 두 형님께, 절대 황태자가 되지 못할 상이라고 했다면서? 그건 점괘가 그렇게 나와서 한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렌.”
아렌을 부르는 레온나토스의 말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렌은 전혀 꿀릴 것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어차피 전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둘일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