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인사가 늦었군, 아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다른 용건부터 처리하나?”
황제와 만난 후 곧바로 레온나토스를 찾아왔음에도, 레온나토스는 짓궂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황제폐하를 기다리게 하고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레온의 가벼운 장난에 아렌도 가볍게 응수했다.
“제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평소에도 비서관 업무를 하는 건 아니니, 업무상 바쁜 점은 없었겠지만.”
“…여행에서도 그런 식이었나? 타린 공에게 실례야.”
“당연히 타린 공에겐 전하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않죠.”
“그래, 어련하겠어?”
“그런데,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아렌은 최근의 근황을 물었다.
황궁을 나와 있던 건 두 달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며칠 만에 손바닥 뒤집히듯 변하는 것이 황궁 안의 분위기였다.
“글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굳이 꼽자면 형제들 사이에서 조금 소외되는 느낌이라 할까.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건 테오드릭 형님 정도뿐이니까.”
‘과연. 내가 없는 동안 테오드릭이 잘 하고 있었나보군.’
아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력한 황권 경쟁 후보 중 하나였던 제9 황자 테오드릭은, 자신의 역량 한계를 깨닫고 몰래 레온나토스를 지지하기로 아렌과 협의했다.
비록 레온나토스 본인은 모르는, 오직 아렌만 알고 있는 비밀 동맹이었지만 아렌이 없는 와중에도 테오드릭의 행동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온나토스 전하께서 형제들로부터 경원시 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자에겐 항상 질투라는 멍에가 따라붙으니까요.”
“금칠이 과하군, 아렌. 하지만, 이제야 가웨인 형님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아.”
굳이 가웨인이 아니더라도 유력한 황태자 후보들은 모두,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가려진 고독과 싸워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필 지금 안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만.”
“안 좋은 소식?”
형제들의 시샘이 그리 달갑지 않은 레온나토스에게, 그 상황을 더욱 진행시킬 사실이 전달된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말씀입니다. 문제가 있는 선페일 지역의 영주를 교체하고, 그 임명은 레온 전하께서 직접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또, 선페일 지역의 세 은광산 중 두 번째로 산출량이 많은 은광을 전하께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안 나오는군.”
보상도 어느 정도라야 기뻐할 수 있다.
마치 다른 황자들 더러 물어뜯으라는 듯한, 노골적인 보상을 받아봐야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다.
“새로운 영주의 임명이라. 후보가 몇 있긴 하다만…”
레온나토스는 곧바로 생각에 잠겼고, 아렌은 그런 레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렌은 조용히 자리를 비워주려고 했지만.
“…아, 깜빡할 뻔했군요.”
아렌이 멈춰섰다.
사실은, 평소라면 레온나토스가 먼저 물어볼 법한 일이었지만 레온나토스가 의식적으로 그쪽 화제는 피하고 있었다.
아렌과 레온나토스의 저격 후, 실각해 머나먼 북쪽 끝 선페일 로 유배되듯 떠난 고드프리에 대해.
“그곳에서 고드프리 전하가 저희를 안내해줬습니다. 교단에 몸을 의탁해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더군요.”
“…그렇구나. 잘 지내고 계셨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고드프리 전하께선 저희가 체류해있는 동안 갑자기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해당 원인은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
레온나토스의 말이 없어졌다.
사실은 전혀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5년 만에 황궁의 무리가 고드프리를 찾아가고, 마침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고드프리는 실종된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그렇구나. 수고 많았다.”
레온나토스는 굳이 고드프리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
발커스나 기사들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바로 임무에 복귀한 모양이지만, 아렌은 그들같이 무골이 아니다.
쌓인 여독을 풀 겸 며칠 쉬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금 쌓여있는 궁금증이 너무 많았다.
용한 점술가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렌으로선, 자리를 비운 동안 황궁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든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한 점괘란 상대의 정확한 정보에서 오기에.
아렌이 가장 먼저 부른 건, 자신의 점괘에 흠뻑 빠져있는 황녀 세리엔이었다.
아렌은 살짝 먼지가 내려앉은 낙일관을 정리한 후, 몰래 멜로익을 보내 세리엔을 불러들였다.
잠시 뒤. 낙일관 안으로 들어온 세리엔은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네가 여기 있고 나를 부르는 거, 역시 마음에 안들어.”
황권 경쟁에서 빠져있기에 오히려 황궁 내 권력에서 자유로운 세리엔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하는 건 황제 말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제가 세리엔 전하의 거처로 가거나,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게 몇 배는 더 이목을 끌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일단은 축하한다고 해둘까? 북부에서 제법 공을 세웠다고 들었어.”
“저야 조사관이 할 일을 거든 것뿐인데요. 수고라면 조사관 타린 공이 다 했죠.”
“흐음. 처음 듣지만 제법 유능한 사람인가 보네.”
아렌은 그간 타린에 대해 묻고 점을 치는 과정에서 그가 꽤나 고등의 예법을 익혔음을 알았다.
아렌만이 모를 뿐 제법 높으신 귀족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세리엔이 금시초문이니 아마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날 이렇게 불러낸 걸 보니 또 뭔가가 궁금한 모양이네. 날 불러낼 때는 항상 그랬잖아?”
“제가 그랬나요?”
“봐봐, 또 모른 척하잖아?”
“…….”
그녀의 말이 맞기에 아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렌이 알고 싶은 건 제국의 건국사.
물론, 대략적인 내용은 모든 제국민이 알고 있다.
건국왕 브륀할트 1세의 신화적인 무용이나, 항상 건국왕과 같이 거론되는 현자 솔티르의 지모웅략을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하지만 아렌이 알고 싶은 건 그 이면의 이야기들이었다.
왜 건국왕은 첫 진군을 북쪽으로 잡았으며, 솔티르는 북방 원정 이후부터 현자라 불리게 되었는가.
황제의 반응으로 보아 황족들만이 아는 무언가 있을 터였다.
“황궁 내원 깊은 곳에는, 황족에게만 개방되는 창고가 있죠?”
“…있기는 한데, 그게 왜?”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아무리 아렌이라 해도, 황족에게만 개방되는 창고를 덜렁 구경하고 싶다고 떼를 쓸 수는 없었으니까.
“…레온나토스 전하의 점괘에, 현사 솔티르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 몇 번이고 나오더라고요. 혹시 남아있는 유물이라도 있으면,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 그래? 안됐지만, 황가의 창고는 오직 황족에게만 열려. 몰래 숨어들어 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군요.”
아렌이 단념하려던 순간.
“그리고, 네가 봐서 별로 좋을 게 없을걸? 대현자 솔티르의 유물은 반으로 쪼개진 수정구밖에 없으니까-”
세리엔의 말에 아렌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수정구, 혹시 검은색인가요?”
“어? 뭐야, 어떻게 알았어?”
와락 달려들듯 다가온 아렌에, 세리엔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했다.
“수정구는 어쩌다 반으로 쪼개진 거죠?”
“나, 나도 몰라! 지금의 수도를 수복하고, 제국이 될 기틀을 닦은 직후에 그대로 금이 가 버렸다고 해! 나머진 나도 모르니까 좀 떨어져!”
세리엔의 손바닥에 아렌의 뺨을 꾹꾹 밀어댔다.
‘…그렇군.’
역시, 현자 솔티르는 운명석과 계약한 자였다.
아티스 궁전의 흑옥 피리, 그리고 아렌의 반지처럼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깨져버리는 것도 똑같았다.
만약 솔티르가 운명석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직접 북부로 올라갔다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만약, 황제는 대대로 운명석에 대해 전해 듣고 있다면-’
그러면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북부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없었냐고 묻던 질문이나, 브륀할트 6세가 멸망시킨 아티스의 궁전을 그토록 쉽게 내버려 두고 만월강 서쪽까지만 취한 이유도.
‘운명석에 대해 미리 알고 있으니 한눈에 그 위험성을 알았던 거지. 만월강을 철저히 봉쇄한 것과 아티스의 유민을 받아주지 않은 것도, 운명석을 최대한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고.’
아렌은 아티스에서 복귀한 뒤 황제를 알현했다는 레온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쩐지, 황제는 아티스를 둘러싼 안개에 대해 알고 있던 눈치였다고 했지.’
“저기, 아렌?”
“네?”
“저 북쪽 끝, 선페일까지 간 거잖아? 혹시 선물같은 건 안 사왔어?”
세리엔이 물었지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아렌은 대충 대답했다.
“선물요? 제가 왜 사와야 하죠?”
“…이제 됐어.”
“네? 아직 점괘도 안 받으셨는데요”
“…….”
아렌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세리엔이 저만치 앞서 걸어간 뒤였다.
*****
세리엔이 나가고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개방하지 않은 낙일관에 세리엔만 들어오면 눈에 띄니 모두에게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번거롭긴 하지만, 황궁 안 온갖 사람들의 사건과 고민을 들을 수 있으니 아렌으로서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게다가, 가끔은 의외의 만남을 가질 수도 있고.
낙일관으로 들어온 두 황자가 들어왔다.
키가 작고 통통한 제2 황자 엔지와, 깡마르고 키가 큰 제3 황자 루카스였다.
‘…별일이군.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을 텐데.’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실은 원수에 더 가까웠다.
황태자 1순위로 꼽히는 제1 황자 라이안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자신들의 동생인 가웨인이 자신들보다 황태자에 가까이 있다는 건 확실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의 화살을 라이안이 아니라, 자신의 지지 세력을 비슷하게 양분하고 있는 서로에게로 돌렸다.
‘엔지와 루카스. 지지자들의 성향은 비슷하지만 둘의 성향은 정반대였지.’
이 둘이 나란히 서는 그림 자체가 희귀한데, 굳이 함께 낙일관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렌은 어두운 촛불 조명 아래서 예를 갖췄다.
“비서관 아렌이 엔지 황자 전하와 루카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두운 실내에 적응하듯 두 황자는 자리에 앉았다.
사실은 이 공간 안에 두 명 이상 들어오는 것은 금지였지만, 어째서 제2 황자와 제3 황자가 같이 움직였는지에는 흥미가 갔다.
‘분명, 원래 역사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도 역사가 바뀌어서 생긴 현상.
그렇다면 그 원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키가 작고 젊은 나이에도 머리가 벗겨진 통통한 황자, 엔지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네 점괘가 정말 용하다면, 우리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도 알고 있겠지?”
“…절 높이 평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오나, 점을 보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 현자 솔티르의 현신이라더니 의외로 별것 아니었군.”
“…….”
본인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렌이 불평할 수는 없는 위치다.
아렌 대신 제3 황자 루카스가 대신 사과했다.
“형님의 무례를 사과하지. 보다시피 생긴 것만큼 옹졸한 인간이니.”
“이놈이 그걸 말이라고!”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깡마른 몸에 훤칠한 키.
머리까지 덥수룩한 루카스는 엔지와는 달리 매사에 꼼꼼하고 깐깐했다.
그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가졌고, 그 잣대는 스스로에게도 적용된다.
“설명이 부족했군. 우린 점괘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네 의향을 묻고 싶어서지.”
“…말씀하시지요.”
단순히 아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직접 올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면 될 일이다.
굳이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방문한다는 건,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적게 알리고 싶어서다.
“레온나토스는 정말 황제가 되려고 하나?”
“…물론입니다. 그건 황권 경쟁에 참여하길 천명하신 후부터 한번도 변한적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레온나토스는 황태자가 되나?”
“…….”
“왜지? 황권 경쟁에 정말 진심이고, 아렌 네 점괘가 정말 용하다면 레온나토스가 황태자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부터 가장 먼저 점쳐야 하는 것 아닌가? 반응을 보니 한번도 점친 적 없는 모양이군.”
제3 황자의 질문은 아렌에게 무례했지만, 사실이었다.
레온나토스는 점괘에 의지하지 않겠다며 점괘를 보지 않았고, 물론 사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없는 아렌 역시도 점을 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렌이 정말 용하다면 레온에게 알리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자신만 아는 점괘를 봤을 터.
하지만 이제 와 둘러대는 것도 늦었다.
‘이제 와 얼버무릴 수 없다면-’
아렌의 이름값은 충분히 올라갔다. 지금 아렌이 무시당하는 건 곧, 주군인 레온나토스가 무시당하는 것과 같았다.
“확실히, 그 부분은 점을 쳐본 적이 없습니다. 레온 전하께서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족한 표정의 루카스.
하지만 뒤이은 아렌의 말에 잔뜩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다른 사실은 알 것 같군요. 제 앞의 두 분이 황제가 되는 미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