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88화 (88/227)

#088화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천년궁이라고도 불리는 제국의 중심, 황궁.

황제의 알현실 옥좌 위에 앉은 황제 브륀할트 8세는 타린 알레시오의 단독 보고를 받아들고 있었다.

“네. 혹시 선페일 영주가 습격해올까 해 내려오는 길에는 태양교 사제복을 빌려 입었습니다. 다행히 여정에는 큰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군. 지금 선페일 영주는 윈더포드 가문의 여식이었나? 조치를 취해야겠군.”

황제는 고개 숙인 타린을 치하했다.

“먼 길 수고 많았다, 타린. 이렇게 자처해서 궂은일을 도맡아주다니.”

“과찬이십니다, 전하.”

“이런 자리에선 숙부님이라 불러도 된다.”

황제의 말에 타린 알레시오, 본명 타린 브륀할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타린 브륀할트는 브륀할트 8세의 조카였다.

내원 시종장처럼 처음부터 황제를 지지한 경우를 제외하면, 황권 경쟁에서 탈락한 황자는 황궁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물론 황족으로서의 대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황자뿐 아니라 그 자식 또한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된다.

그리고, 더 이상 황권에 욕심낼만한 정황도 동기도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한해 실각한 황자의 자식들은 정체를 숨긴 채 황제 직속의 가신으로 활약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타린 브륀할트 역시 그런 경우였다.

비록 황권경쟁에서 패배한 쪽의 자식이지만 공정한 승부였기에 원한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정말 순수하게 황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었던 타린은 황제의 가장 믿을만한 눈 중 하나였다.

“타린, 자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자네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다면, 곧바로 태양교는 지상에서 지워졌겠지.”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타린은 고개를 들었다. 선페일 지역으로 떠난 사람은 총 열한 명. 그런데 황제는 굳이 타린만을 먼저 불러내었다.

“저만 먼저 불러내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자네의 첫 번째 임무를 듣기에 앞서서, 두 번째 임무를 듣고자 해서지.”

타린의 두 번째 임무.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태양교의 비리를 조사하는 것.

두 번째는, 최근 황궁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레온나토스의 비서관 아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단적인 보고보다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 드리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타린은 그간 아렌이 겪고 행했던 일들을 간추려 황제에게 보고했다.

여행길에서 모두의 점괘를 봐주며 구심점이 되었던 것.

은광산에서 매몰될 뻔했던 사건.

다운힐의 뒷골목에서 사주받은 듯한 불량배에게 습격당했던 일.

그리고, 대사원 깊은 곳에서 실종되었다가 무사히 귀환했던 것까지.

그 와중 황자 고드프리가 실종된 것을 보고할 때는 타린도 조마조마했다.

“…….”

고드프리의 실종을 보고받은 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자는, 태양교에서 손을 쓴 것 같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정황상 오히려-”

“오히려?”

“-고드프리 전하가 역으로 아렌을 노리다, 제풀에 화를 입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물론 이 경우 진실은 알 수 없다.

타린의 경우, 자신의 사촌 형제가 눈앞에서 실종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서 정체를 밝힌 뒤 백방 고드프리를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태양교 안에서는 태양교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겼기에 그러지 않았다.

“…아렌이 실종되었다가 나타났고, 반면 고드프리는 아렌이 나타난 직후 실종되었지. 그동안 아렌을 감금하고 있던 것이 고드프리였고, 탈출하는 과정에 고드프리를 죽이고 유기했다? 가능성 있는 가정이군.”

“하지만, 확정된 진실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조사관을 다시 보내셔도 됩니다만.”

“아니. 이미 끝난 일이다. 황제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다른 혈족도 아니고, 본인의 친아들이 죽었다. 황제의 마음이 헛헛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브륀할트 8세는 아버지로 살아온 세월보다 황제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

절연한 것이나 다름없는 황자의 죽음에 황제가 연연한다면, ‘절연’의 의미 자체가 퇴색된다.

황태자를 옹립하면 그제야 황제는 황금가면을 벗고, 동시에 황제로서 뒤집어썼던 무거운 굴레들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타린 네가 느끼기에 아렌의 성정은 어떻지?”

“뒤에서 암약하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동료들에게조차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고, 자신만의 계획을 펼친 뒤 필요한 부분만 알려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흠, 그렇군.”

꽤나 신랄하게 보이는 타린의 보고였지만, 사실 황궁에선 그리 큰 흠결이 아니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아렌은 경계할만한 자인가?”

황제의 물음에 타린은 고개를 저었다.

“야심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흑막 뒤에서 물러난 채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자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타린은 아렌이 그간 몇 번이나 위험에 빠졌었던 것을 이유로 삼았다. 때론 스스로를 미끼 삼기도 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렌은 몇 번이나 위험에 빠졌었다. 불가항력적인 피해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아렌이 자처한 것.

“야심은 있으나 비겁한 자는 아닙니다. 레온나토스 전하를 뒤에서 조종하는 그림도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레온나토스에게 해가 되는 음모를 꾸미지는 않겠지요.”

아렌에 대한 타린의 평가는 꽤나 우호적이었다.

“흠, 그렇군.”

“…저, 그런데 폐하.”

“뭐지?”

“정말 세 은광산 중 한 곳을, 레온나토스 전하께 양도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일이 잘되어 은광산을 모두 얻는다면. 애초에 그러한 약속이었지 않나.”

타린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너무 큰 보상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주변의 질투와 경계심을 부추겨, 레온나토스 전하에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황태자란 본디 누군가의 질투와 원한을 사는 자리지. 그것을 견뎌내지 않으면 제국을 통치할 수 없어.”

황제의 속마음을 엿본 타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레온나토스를 시험할 생각이시로군.’

황제는 가장 마음에 든 황자를 더욱 험하게 굴리곤 했다.

당장 실질적인 대외 업무를 도맡으며, 여러 국경을 떠도느라 거의 황궁에 없는 제1 황자 라이안처럼.

황제가 지금껏 라이안 외에 다른 황자들에 그렇게 대한 점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레온나토스가 라이안에 이어 두 번째 황태자 유력 후보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레온나토스 본인만을 본 평가는 아니겠지. 아마도, 그의 등 뒤에 있는 아렌도 같이 묶은 평가.’

황제는 타린이 내린 평가의 당사자, 아렌을 만나볼 차례였다.

“수고했네, 타린. 이만 물러가 보게. 이제, 그 무모한 흑막을 만나볼 차례군.”

*****

타린의 직후 황제는 아렌을 불러들였다.

황제의 앞에 부복한 아렌은 가장 먼저 간직하고 있던 서신을 황제에게 전했다.

“이것이 태양교의 대주교가 직접 작성한 서신이옵니다.”

황금 가면을 쓴 세 사람은 돌아가면서 밀봉을 뜯고 서신을 찬찬히 살폈다.

“…그렇군. 대주교가 큰 결단을 했어. 어떻게 알았는지 짐의 가려운 부분만 골라서 긁어준 것도 같다만. 이러면 마치 은광산 때문에 조사관을 보낸 것 같지 않나.”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오해입니다.”

“사실, 그렇긴 하다만 말이다.”

“…….”

황제는 서신을 덮어놓고 아렌에게 말했다.

“아렌, 너에 관해서 먼저 보고한 조사관에게 들었다. 꽤나 활약했다고 하던데.”

“과찬이십니다, 폐하. 전 단지 타린 공이 제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운 것뿐입니다.”

황금 가면 뒤에 있는 황제의 속마음을 유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렌은 선페일에서 황도로 내려오는 동안 타린의 표정만큼은 유심히 살폈다.

타린은, 적어도 아렌에 대한 악감정이나 경계심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없던 일을 지어내 보고하지는 않았을 터. 아렌에 대해 보고할 내용 중 황제에게 해가 될 내용이 있었다면 일말의 경계심이라도 내비쳤을 것이다.

“어떤가. 레온나토스는 뒤에서 조종할 만한가?”

황금 가면 뒤에서 툭 내뱉듯 말한 황제.

아렌은 움찔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레온나토스 황자께서 그리 쉽게 조종당하시는 분은 아니죠.”

“흠, 그렇겠지. 적어도 태양교 대주교보다는 나을 테니.”

황제는 아렌에게 설명하듯 서신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렸다.

“글자 너머로 납작 엎드리는 것처럼 대주교는 저자세로군. 이전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모두 사죄한다는 의미로 은광산 세 개의 경영권 모두를 황실에 반납하고, 일선에서 있었던 강제적인 포교도 전면 금지한다라.”

요약하자면, 국가를 통치하는데 유리한 교리만을 설파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모든 것을 마음대로 집행하지는 못한다. 그 나름의 명분과 절차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대주교는 그 면에서 황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대주교가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군. 황제인 짐 또한 나름대로 화답해야겠지.”

적당히 운을 뗀 황제가 이어 말했다.

“아렌, 자네는 선페일의 새 영주로 천거할만한 자가 있는가?”

“…전, 추천할 만한 귀족을 알지 못합니다, 폐하.”

“그런가? 그럼 레온나토스에게 의견을 물어보도록. 레온나토스 황자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삼을 테니.”

“…말씀 받들겠습니다, 폐하.”

“아, 아울러 제12 황자 레온나토스에게 선페일에서 발견된 세 은광 중 산출량이 두 번째로 많은 은광산을 양도하겠다.”

“…….”

‘-이런.’

은광산의 소유권 양도는 원래 있던 약속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이 잘 풀렸을 경우’에 한정된 말이었기에 정말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거기에 더해 선페일 영주의 임명권까지 레온나토스에게 떠맡겼다.

그럴듯한 후보를 추천하거나, 후보군이 결정된 후 사후 접촉해 포섭하는 정도를 생각했던 아렌에게는 상정했던 것 이상의 지나친 보상이었다.

마치, 다른 황자들의 시기를 사도록 종용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 그것도 보겠다는 건가?’

아렌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해와 같은 은혜 감읍하옵니다, 폐하. 레온나토스 황자도 기뻐할 것입니다.”

“따로 전령을 보내거나 하진 않겠네. 자네가 레온에게 직접 전달해도 무리는 없겠지.”

아렌이 예를 갖추고 나가려고 하는 찰나.

“…아, 그렇지.”

황제가 불러세웠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북부에서 이상한 일을 겪거나 하지는 않았나?”

“이상한 일이라니, 무엇 말씀입니까?”

“모르겠다면 되었다.”

아렌은 예를 마치고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이상한 일? 태양흔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황제의 말은 ‘태양흔’이라는 장소를 알고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가, 정말 불현듯 떠올라 던진 듯한 질문.

하지만 갑자기 질문이 떠오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북쪽이라.’

북쪽.

제국의 시조인 건국왕 브륀할트 1세의 최초 진격로가 향한 곳이었다.

진격로의 끝에는 태양교의 신전인 대사원이 있고, 태사원이 품고 있는 건 운명석이 연루된 태양흔의 기적.

운명석은 얼어붙은 산맥 북부, 밟지 못하는 땅이 원산지이며 태양흔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대주교만이 유일하다.

‘…그렇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렌에게 무언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건국왕이 북쪽으로 향한 건, 북쪽 어딘가에 있을 운명석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건국왕의 업적은 모두 운명석을 통해서 이뤄낸 것이고, 그 사실은 황제가 된 자에게만 전승처럼 내려왔다면?

‘태양흔에 대한 건 대주교만이 알고 있었어. 당연히, 황제에게만 내려오는 사실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