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고드프리는 더이상 태양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렌의 제안은 확실히 태양교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것이다.
“…아니, 말을 잘못했군요.”
아렌은 방금 한 말을 정정했다.
“선택권은 그쪽에 없습니다. 제 손을 잡거나 몰락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요.”
꽤나 광오한 말. 하지만 그 말에 대주교는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원하는 건 선페일 지역의 은광산 뿐입니다. 교국으로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은광산을 지켜내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이곳에 온 것 또한 은광산 소유권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니까요.”
태양교가 선페일 영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은 꽤 선명했다. 비록 그 사실을 확인해줄 증인이 실종되었지만, 그가 태양교의 신전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는 것 또한 아렌이 확인한 뒤였다.
아렌의 증언과 타린의 보증만으로도 잔뜩 벼르고 있는 제국군이 출동하기 충분하다.
“우리가 황궁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이곳에서 본 모든 것들을 증언할 겁니다. 설령 피치 못할 ‘사고’가 일어나 이곳에서 행방불명된다면, 그건 그것 자체로도 명분이 되겠죠. 대주교께서도 알고 계셨겠죠.”
“…네. 고드프리 전하께서 한 말과 같습니다.”
“그럼 고드프리가 거기에 대한 해답도 말했나요?”
“네. 아렌 공을 없앤 후, 그 해명을 위해 다시 궁으로 돌아가 복권된 뒤 실권을 잡겠다고 하셨습니다.”
“터무니없어요. 황궁 내 실권은 어떤 업적도 없이, 황궁 밖에서 5년이나 허송세월한 자가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전에는 저 위로 연결된 것만 같은, 고드프리라는 밧줄이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대주교는 그 밧줄이 끊어지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 듯했다.
“제가 전에 봐드린 점괘, 기억하십니까?”
“아… 대강은 기억합니다만-”
“그때는 너무 급한 일이 있어 미처 설명을 못드렸습니다만. 분명 ‘둘로 나누어진 모닥불’과 ‘추락하는 탑’ 카드였습니다. 카드 자체의 의미도 물론 있습니다만, 마치 지금 이곳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아렌의 말대로 대주교의 앞에는 두 개의 큰 화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산맥의 경사를 따라 올라진, 암반의 안쪽까지 깎아나가 만들어진 성지.
보기에 따라 산맥 암반 안쪽에 지어진 탑이라 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만약 그 두 카드가 태양교의 대사원을 이르는 말이었다면, ‘추락하는 탑’이란 괜한 욕심을 부리다 몰락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죠.”
물론, 몰락을 피하려면 은광산을 포기하라는 말은 너무 거칠다. 아렌으로선 대주교가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제안을 해야 했다.
“…그러니, 무턱대고 위를 향하다 무너져 추락하느니 차라리 아래의 기반을 다지는 건 어떻습니까?”
아렌의 제안은 이랬다.
무리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또 황궁에까지 손을 뻗으니 사지 않아도 될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러리 황궁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사과하고, 사죄와 보상으로 은광산을 황제에게 진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아래의 기반을 닦는 게 되겠습니까?”
“황제 폐하는 은원에 대한 맺음이 확실한 분이시죠. 제국군을 동원해 태양교를 박해하는 것은, 황제폐하로서도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는 일입니다. 먼저 숙이고 들어와 부담을 줄여준 태양교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시겠죠.”
거기서, 직접 그곳에 파견되었던 자들의 의견을 물어올 것이다.
“그때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불미스러운 일들은, 선페일 영주에게로 돌릴 겁니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죠. 태양교나 고드프리가 어떤 제안을 했든, 그것에 현혹되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른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렌 공은 본교에 도움이 될만한 제안을 한다, 그 말씀이시군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종교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며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종교를 굳이 해코지할 필요는 없겠죠. 강압적이지 않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준다는 전제하에 우선 선페일 지역부터 확실히 태양교의 세력으로 만들어보시죠.”
실상은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제안.
다른 점이 있다면, 제국과 황제가 공인한 상태의 지배라는 점이었다.
대주교의 당초 계획과는 단계가 많이 낮아진, 제법 소박한 계획이지만 아렌의 말대로 대주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3개의 은광산을 포기하면서 얻는 것이라기엔 조금 아쉬울 수 있겠지만, 헛된 꿈을 꾼 것에 대한 벌이 이 정도로 그친다는 것에 만족해야겠군요.”
“쉽지 않은 용단을 내려주신 것,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주교와의 제안도 모두 끝났으니, 이제 실종되었던 아렌이 다시 모두의 앞에 나타날 차례였다.
대주교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나려던 그때.
문득 생각난 아렌이 물었다.
“아. 태양흔 바닥에 있는 고드프리, 아직 살아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밥과 물을 준다면 꽤나 오래 연명할 수 있을 테죠.”
아렌의 말에, 대주교는 검버섯이 잔뜩 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태양흔의 바닥은 저 외에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됩니다. 저는 이렇게나 늙어서, 마지막으로 저 계단을 내려가 본 게 20년 전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고드프리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 방금 끊어졌다는 것을 모르겠지.
아렌이 대본전을 나오고 난 직후.
-쿵.
무언가에 선고를 내리듯,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
“아렌! 무사했군요!”
“네. 덕분에. 근데 뭐예요? 그 우스운 꼴은?”
사원 안에 있는 밧줄이란 밧줄은 모두 가져와 어깨에 칭칭 동여맨 타린과 발커스였다. 아마도 긴 밧줄을 조금씩 풀어가며 미궁 안을 탐험하려 했던 모양.
꼬박 하루 동안 실종되어있던 아렌은 오자마자 밥부터 찾았다.
“…뭐 먹을 것 없어요?”
“아, 기다려요, 아렌. 지금 당장 식당에-”
“못 참겠으니 일단 당장 씹을 거라도요.”
여행용으로 구비해 둔 말린 고기를 씹으며, 아렌은 천천히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타린과 발커스는 모르지만,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한 뒤였다.
“저, 그게… 일단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뭐죠, 발커스?”
“아렌 공을 수색하던 와중에, 이번엔 고드프리 전하가 실종됐다더군요.”
“아, 그렇군요.”
발커스의 말에 아렌은 놀라지 않았다.
발커스는 고드프리의 실종에 아렌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어라, 그럼 이번엔 고드프리를 찾으러 가겠네요? 그런 것치고는-”
아렌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렌의 얼굴을 보고 안도하며 스쳐 지나가는 신도들 사이에, 또다시 수색을 준비하는 자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래 궁 안에서 사제들이 실종되면 지금처럼 샅샅이 찾지 않는다더군요. 너무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전통이라면서요. 현실적인 건지, 정이 없는 건지.”
“확실히 비효율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쓰지 않는 복도가 있다면 벽으로 막아두면 될 텐데… 마치 누군가 실종되도록 부추기는 것만 같잖습니까?”
발커스의 말에 타린도 툴툴거렸다. 듣자 하니 아렌을 찾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오려고도 했었던 모양.
타린 역시도 그 위험을 모르고 한 결정은 아닐 것이다.
아렌은 대답했다.
“이곳에 뿌리내린 오래된 종교에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죠.”
암흑이 길게 이어진 복도와 그 한복판에 도사리고 있는 사람을 삼키는 구덩이.
거대한 식충 식물을 떠올리며, 아렌은 평소보다 일찍 준비된 식당에 먼저 들어갔다.
*****
아렌이 북쪽 끝 대사원에 와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
그간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조사관 타린에게도 대강 밝혔다. 모든 부분을 밝힐 순 없지만, 돌아가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을 만큼은.
“…그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개혁파? 그자들과는 또 언제 손을…”
타린은 아린이 겪은 일들의 상당 부분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타린은 타린대로, 교단 안에서 그들의 비리를 수사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과연 유능하기는 한지 타린은 태양교가 영지 내 사람들을 대상으로 억지로 포교하던 내용의 서신을 몇 장이나 확보하고 있었다.
아렌도 짐 속에 고이 넣고 있던 서신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여기, 황제 폐하께 보내는 대주교의 서신이 있어요. 타린이 조사한 내용도 보고하면 되겠지만, 아마 이 서신이 있는 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죠.”
“그럼 이 경우, 처벌되는 건 습격을 교사한 선페일 영주뿐인가요? 먼 길을 온 것치곤 의외로 싱겁게 끝났군요.”
“그러게요. 흉흉한 점괘가 나와서 걱정했는데, 잘 됐잖아요?”
아렌이 너스레를 떨었다.
흉괘는 이럴 때 특히 좋다. 길괘와 달리, 빗나가더라도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점괘를 보고 충실히 대비해 예정된 흉조를 비껴갔다고 변명하기도 좋다.
실수로 무난한 길조를 말했다가 단번에 목이 잘린 아렌이 목숨을 대가로 얻은 교훈이었다.
‘그러니, 점괘는 언제나 흉으로 끝나는 게 제일이야.’
아렌과 타린, 그리고 기사들은 다시 머나먼 남쪽으로의 채비를 끝마쳐두고 있었다.
아렌은 마지막으로 콜론을 찾아갔다.
“아, 아렌 공. 이제 떠나시려는 거에요? 전에 얻어맞은 덕분에 뒤통수에 혹이 생겼다고요.”
“그건, 죄송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콜론도 의심을 살 것 같았거든요.”
콜론에게도 이곳에서 있던 일들의 전말을 알려줘야 했다.
대주교를 포섭했지만, 그가 이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기존의 기조에 반하는 자들이 힘을 가져야 했다.
“…그러니, 대주교께도 개혁파의 일부를 중용하도록 말씀드릴 거에요. 그때 콜론이 힘이 되어주세요.”
“어… 하지만 대주교께서 개혁에 그리 쉽게 찬동할까요? 동지 중에는 대주교조차도 폐지하고 오직 교리만 지킨다는 이들도 있는걸요?”
“적어도 공격적인 확장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콜론은 정말 대주교가 그래 주고 있는지, 제게 알려주세요.”
완전히 개혁파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대주교를 위시한 정통파와 개혁파는 불안한 동거를 이어나가야 했다.
대주교, 그리고 개혁파의 일원 콜론.
아렌은 둘 모두와 연이 닿은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다.
대강의 설명을 마치고 물러가려던 그때.
콜론이 물었다.
“-당신이 죽였나요?”
“그게 무슨 소리죠?”
아렌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당신이 고드프리 사제를 죽였다는 소문이, 신도들 사이에 파다해요.”
“나올 만한 소문이긴 한데, 그만큼 웃긴 소문이네요. 열다섯밖에 안된 제가, 저보다 열 살은 더 많은 건장한 고드프리 전하를 죽인다고요? 그것도 그 사람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죽이기 힘든 이유만 말하지, 죽일 이유가 없다고 말하진 않네요?”
‘…제법 날카로운데?’
항상 빛이 제한된 사원에서 기거하기에,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이 단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쎄요. 고드프리 전하는, 대사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어둠에 집어 삼켜진 거 아닐까요? 지금껏 다른 신도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아렌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