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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86화 (86/227)

#086화

어두운 복도 속을 조사관 타린이 내달렸다.

“아렌 공! 어디 있습니까!”

“자, 잠깐만요, 타린 공! 아무렇게나 달리면 길 잊어먹습니다!”

뒤따라오는 발커스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검으로 모퉁이를 깎아내며 돌고 있었다.

태양교도들에게는 중요한 성지겠지만 발커스에게는 단지 오래된 유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복도의 벽이 두꺼운 암반이라 검으로 깎아내도 큰 티가 나지 않기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였다.

“고드프리 전하!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복도 너머에서의 희미한 외침.

타린은 그 목소리를 향했다.

몇 번의 모퉁이를 돌자, 횃불을 환하게 들고 있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사제가 보였다.

“…타린 공?! 여긴 어떻게?”

“아렌 공을 찾아 왔습니다만, 당신들도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면, 아렌을 은닉하기 위해 온 겁니까.”

방금 구조된 두 사제에게 고드프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사제들은 타린의 눈을 피하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저흰 그저… 수상한 사제 한 명이 달려가기에 고드프리 전하와 함께 쫓아온 것뿐입니다.”

사제들의 말은 담백한 사실로,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던 도중 고드프리 전하가 앞서가셔서, 저희는 그대로 이렇게 길을 잃었습니다.”

대사원 유적은 미궁이라기엔 사방으로 뚫려있는, 단순한 구조의 복도였지만 쉽게 보고 들어왔다가 길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모퉁이를 돌았던 순서를 한번 틀리기만 해도 전혀 엉뚱한 방향을 빙빙 돌다가, 그대로 기력을 잃고 죽기 십상인 장소.

“아, 걱정 마시죠. 내가 왔던 길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발커스는 두 사제를 안심시키면서도,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고드프리가 쫓아갔다는 수상한 사제는, 아마도 아렌이겠지.

‘역시 이 안 어딘가에 아렌이 있는 건가? 아니면 이미 붙잡혔을지도.’

하지만 지금 찾으러 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미궁 안에서 구조한 두 사제도 짐이 되었고, 고드프리와 한패라면 미궁 안에서 무슨 패악을 부릴지 모른다.

‘어째 난, 중요한 순간에 아렌을 포기하는 결정만 내리는군.’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정말 그게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내리는 결정이다.

발커스는 두 사제를 데리고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요량인 타린을 말렸다.

“그만 돌아가시죠, 타린. 저 두 사제까지 데리고는 제대로 수색할 수도 없습니다.”

“발커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저 안에서 아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타린은 완강하게 말했지만, 발커스는 부드럽게 타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는 말이었다.

“사실은 이게, 아렌의 점괘 내용이 아니었을까요?”

“…네?”

“전에 봤던 점괘 말이에요. 중요한 순간에 옳은 결단을 내려야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그게 지금 상황을 말하는 거라 쳐도, 왜 돌아가는 쪽이 옳은 길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지금 타린 공은 더 깊숙히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더 마음이 가는 선택이 있지만, 그것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결단’이라는 말에 더 걸맞지 않을까요?”

“그건-”

“또, 아렌은 저와 당신이 붙어있으면 좋을 일이 없다고 했었죠. 그게 만약 둘 사이의 친밀도를 말하는 거라면, 역시 이번 일과 관련이 있겠죠. 타린 공과 친해진 바람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타린 공의 의견에 그대로 따르게 되었을 테니까.”

“…….”

발커스의 말은 억측에 더 가까웠지만, 타린은 그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이미 아렌의 점괘에 꽤나 빠져있던 타린에게 그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돌아가죠. 어쩌면 지금쯤 아렌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돌아갔는데도 없다면, 다시 이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발커스도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네. 물론 그래야죠.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요.”

*****

태양흔의 바닥과 이어진 복도.

아마도 사원 유적의 최하층일 복도는, 갈림길도 없이 일직선의 길이었다.

마치, 태양흔의 바닥으로 향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공간.

한참을 걸어가고 나니,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층계. 드디어.”

애초에 목적은 유적 부분의 사원을 통해 최상층, 대본전으로 향하는 것.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당초의 계획대로였다.

아렌은 그대로 하염없이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헉, 헉.”

중간에 다른 곳으로 연결된 통로도 없었다.

오로지 위로 난 계단이 길의 전부.

빛없이 한참을 떨어진 아렌은 태양흔이 얼마나 깊은 구멍인지 몰랐다.

아렌은 천천히 계단 숫자를 세면서 하나씩 올랐고, 계단 숫자가 천 개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세지 않았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올라가고 나서야.

아렌은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계단 최상층의 복도 역시도 갈림길 없는 일직선이었다.

‘…가장 정상과 최하층으로만 연결된 계단이라니.’

아렌이 유적 안에서 찾으려 했던 계단은, 방금 올라온 계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렌은 앞으로 뻗은 복도 너머 희미한 빛을 따라 나아갔다.

곧,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반은 암반 속 공동, 반은 뚫린 야외인 대본전이었다.

“어라?! 당신은!”

대주교를 수행하던 사제 넷이 아렌을 보고 기겁했다. 마치 등장해선 안 될 곳에서 등장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지만 대주교는 자신에게 내려앉은 세월값을 하듯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핀 눈으로 아렌을 주시했다.

“모두, 자리를 피해다오.”

“…대주교님?”

“다시 말하지 않겠네. 그리고 이곳에서 아렌 공을 본 것은 당분간 함구해주게.”

“…알겠습니다.”

대주교를 수행하던 사제 넷이 대본전 밖으로 나갔다.

텅 빈 대본전에서 대주교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곳에서 오셨다는 말은, ‘그것’을 보셨다는 말이시군요.”

“네. 봤습니다. 이 사원의 가장 깊은 장소를요.”

“후우…”

대주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곳엔, 어떻게 가게 되었습니까.”

“긴말 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떨어져서죠.”

“…그렇다면 제게 듣고 싶은 얘기가 있겠군요.”

태양교의 성지, 태양흔에 얽힌 신비한 현상에 대해.

아렌은 지금껏 몇 번이나 봤던 일들이 그랬듯, 이번에도 운명석과 관련된 일이라 생각했다.

생각했고, 그것이 맞는 듯했다.

“…이 사원은 우리 교단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먼 오래전부터 비어있던 곳에 우리가 들어와 쓰고 있을 따름이지요. 원래는 멀쩡히 이어져 있었을 복도를 잘라내듯 뚫려있는 구멍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원은 넓어서 신도와 사제들을 수용하기 충분했다.

문제는, 산맥 깊숙한 땅속으로 넓어 거의 채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는 밝은 곳에서 해를 찬양하던 태양교 사람들은 어두움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종국엔 마음에 병이 들어 사원 안쪽의 거대한 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자들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그때 보다 못한 교단의 사제 하나가 나섰습니다. 스레딘이라 불린 성자는, 자신의 몸을 공양물 삼아 구덩이로 몸을 던졌습니다.”

‘…과연. 그 소신이 ‘소망’이 되어 운명석과 엮인 건가? 애초에 죽음을 각오했기에 죽어서도 운명석의 힘이 남아있었던 거고.’

어쩌면 스레딘이라 불린 사제는 태양흔 외벽에 조각된 흑옥이 운명석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뒤에도 구덩이 아래로 추락하는 자들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달랐죠. 산 사람이 떨어질 때는 추락하지 않고 깃털을 단 것처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죠. 하지만 성자께선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래에 내려앉은 자들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의도였나요?”

“…네. 바닥에 도착한 자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죽을 때까지 꼼짝하지 못하죠. 교리에 어긋나는 자살을 택한 자들에게 실로 어울리는 죽음입니다.”

‘…과연.’

아렌이 직접 본 현상과 설명이 일치했다.

또 다른 운명석과 계약된 아렌에게 그 힘이 적용되지 않은 것 또한 아렌이 알고 있는 사실과 동일했다.

“그러고 보니, 아렌 공께서는 어찌 움직여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대주교의 당연한 의문.

“글쎄요? 전 그냥 움직여지던데요?”

“…아, 설마-”

대주교는 뭔가를 생각한 듯 탁한 눈을 크게 치켜떴고, 아렌은 아렌대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렇군. 왜 태양교에서 실종자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는지 알겠어.’

다른 지방에 있는 태양교의 사원에서는 개를 잘 기른다고 알고 있었다. 황자 돌멘을 죽일 때 이용했던 늑대들 역시 태양교의 사원에서 훈련시켰다는 의혹이 있다.

그런데, 정작 총본산이라 불리는 이곳 대사원에는 개를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마치, 일부러 배제하기라도 한 것처럼.

‘개가 있었다면 실종자를 수색하는데 큰 도움이 됐겠지. 그뿐 아니라 복잡한 유적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는 와중에, 태양흔의 바닥으로 향하는 길이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드프리의 반응으로 보아 일반 신도들은 태양흔의 비밀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자신들의 성지에 그런 꺼림칙한 저주가 걸려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말끔하지 않을 테니까.

태양교는 태양흔에 대해 숨겼고, 이곳 대본전을 쓸 수 있는 대주교만이 대대로 사실을 전해 들은 듯했다.

아렌이 나름대로 수긍하는 동안, 대주교가 아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마치, 새로이 나타난 성자를 보는 듯한 시선.

아렌도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착각이라. 그래, 멋대로 생각하라지.’

지금부터 할 제안을 생각하면, 아렌을 좋게 봐서 나쁠 것 없다.

“길이 이곳으로 이어진 줄은 몰랐습니다만, 마침 잘 되었습니다. 애초에 이곳에 제안을 하러 왔으니까요.”

“그럼, 실종되신 건 스스로 모습을 감추신 겁니까?”

“네. 특히 고드프리는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요.”

“허… 그럼, 고드프리 전하는-”

“저 아래 지하에서 기도하고 있던데, 만나보시겠어요?”

“아아!”

대주교가 탄식했다.

그가 한 말이 맞다면 고드프리는 더이상 되돌아올 수 없다. 누군가 꾸준히 식사를 넣어준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권력과는 영원히 멀어진 채다.

아렌에겐 잘된 일이다.

‘위로 연결된 줄 알았던 끈이 끊어져 버렸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끈이 덜어지면 새 끈을 찾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아렌 공께서 제게 하실 제안이란 무엇입니까.”

절망했던 대주교는 곧이어 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애초에 고드프리를 이용하려 했을 뿐, 그에게 인간적인 정은 없었던 것.

아렌 역시 그에게 말을 빙빙 돌릴 생각이 없었다.

아렌은 대뜸 말했다.

“고드프리는 없습니다. 이제, 저와 손잡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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