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85화 (85/227)

#085화

‘…젠장, 역광이.’

다가오는 고드프리의 모습은 아렌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벽에 꽂아놓은 횃불 때문에 고드프리의 모습은 역광 속에 있었고, 횃불 불빛과 등진 고드프리의 모습은 그 대비 때문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

‘고드프리는, 강했던가?’

그렇지 않다. 아렌의 기억 속 고드프리는 무력과는 거리가 먼 황자였다.

모든 분야에 대해 교육을 받는 만큼 기본적인 소양은 있겠지만, 뚜렷이 두각을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물론, 고드프리는 26세의 창창한 나이. 아렌보다 10살은 더 많으며 육체적으로도 최전성기에 가깝다.

아렌이 비록 또래 중에선 상당히 강한 축이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무술 교육을 받은 고드프리가 저잣거리의 불량배와 같을 수는 없다.

‘지금 내가 불리한 점은 두 가지.’

하나는 방금 언급한 절대적인 실력.

나머지 하나는 지형지물이었다.

아렌의 뒤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고드프리가 벽에 끼워 넣은 횃불은 아렌이 그의 행동을 파악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우선, 위치라도 바꾼다.’

그때, 아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드프리가 말했다.

“뒤쪽에 절벽, 신경 쓰이나 보군.”

고드프리는 어디까지나 신중했다.

그대로 달려들어 아렌을 절벽으로 밀쳐도 될 텐데, 소검의 이점을 살려 확실히 베어버리려는 움직임.

‘…그렇군. 만에 하나 발버둥 치는 나와 같이 떨어지면 죽도 밥도 안될 테니.’

만약 우격다짐으로 덤벼들었다면 오히려 상대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일말의 행운이라면 행운. 아렌은 손에 든 대퇴부 뼈를 기습적으로 던졌다.

고드프리라면 손에 든 소검으로 쳐낼 수도 있겠지만, 신중한 고드프리는 고개를 숙여 던진 뼈를 피했다.

“뭐냐, 고작 그게-”

그 순간.

고드프리의 시야가 단숨에 어두워졌다.

아렌이 던진 뼈는 처음부터 고드프리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노린 것은, 벽에 걸려있는 횃불.

뼈에 맞은 횃불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순간 불의 위치가 낮아져 복도 안이 어두워진 것이다.

어둠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아렌과 달리, 고드프리에겐 일말의 틈이 생겼다.

아렌은 어두워진 순간 고드프리의 뒤로 스쳐, 바닥의 횃불을 집어 들었다.

횃불은 그 자체로도 둔기이지만, 타오르는 횃불은 그 열기만으로도 훌륭한 무기다.

서로 서 있는 위치도 훌륭히 역전.

“어때, 고드프리. 사제복은 횃불에 잘 타겠지. 시험해볼까?”

“…해보시지!”

횃불과 소검의 길이는 거의 같다. 아렌은 야생 동물을 모는 것처럼 횃불의 열로 차츰차츰 고드프리를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고드프리의 뒤쪽에는 떨어지면 뼈도 추릴 수 없는 절벽.

더이상 물러설 수 없던 고드프리가 불을 무릅쓰고 소검을 휘둘렀다.

칼은 횃불에 반쯤 박혔고. 고드프리는 그대로 소검을 끌어당겼다.

횃불을 놓쳐버린 아렌. 고드프리는 검과 횃불을 통째로 태양흔 안으로 던져넣었다.

아렌이 급하게 단검을 뽑았지만, 고드프리의 손이 아렌의 오른손을 꽉 틀어쥐었다.

오른손과 멱살을 붙잡힌 아렌.

“이젠, 네 차례다.”

아렌의 두 발끝이 살짝 공중에 떴다.

조금만 걸어가도 아렌의 발밑은 수직 동굴, 태양흔 아래.

고드프리는 아렌을 그대로 태양흔으로 집어던지려는 듯했다.

“미안한데, 두 번 죽기는 싫거든?”

발끝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와중에도 아렌은 입만 살아 말했다.

한번 죽어본 경험이 있는 아렌이기에 또다시 죽기 싫은 것도 맞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면도 있었다.

죽음을 경험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될대로 되라는 심산.

아렌은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고드프리의 손을 와락 깨물었다.

“크아악!”

고통과 함께 밀치며 손을 놓은 고드프리.

하지만 이번엔, 아렌의 손이 고드프리의 옷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렌의 발밑은 깎아지른 절벽 바깥이었고.

아렌은 추락함과 동시에 고드프리까지 길동무로 끌어들였다.

‘결국, 이렇게 되나.’

둘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직굴, 태양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

끝도 없는 추락.

그 와중에도 아렌은 고드프리의 옷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얼마나 깊이, 어느 속도로 추락하는지도 아렌은 모른다.

다만 느껴진 건, 일순 손에 느껴진 묵직한 감각.

“뭐, 뭐야!”

비명에 가까운 고드프리의 고함과 동시에.

순간 고드프리의 몸은 부표처럼 둥실, 떠올랐다.

무거운 추를 안은 채 물속으로 잠수하듯 천천히 가라앉는 고드프리의 몸.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지만, 아렌의 몸은 여전히 무거운 채였다.

아렌은 뒤로 누운 고드프리의 등 뒤 옷을 꽉 붙들고 매달렸다. 아렌 자신의 몸은 떠오르는 느낌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손을 놓으면 자신은 추락할 게 분명해 보였다.

당황한 건 아렌만이 아니었다.

“아렌, 네놈 짓이냐?!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버둥거리는 고드프리.

고드프리는 오히려 아렌이 무슨 수를 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드프리도 모르는 일인가? 그런데, 왜 고드프리의 몸만 붕 뜨는 거지?’

다른 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상한 일이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아렌은 이전에 겪어본 적 있었다.

‘이것도, 운명석인가?’

아렌이 아는 한 무언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곳엔 항상 운명석이 관계되어 있었다.

고드프리는 어떻게든 아렌의 몸을 떨어뜨리려고 발버둥 쳤지만, 누운 채 등 뒤에 매달린 아렌을 떼어놓기는 쉽지 않았다.

그대로 얼마나 떨어졌을까.

끝이 없을 듯이 아래로 하염없이 가라앉던 아렌과 고드프리는 마침내 겨우 바닥과 만날 수 있었다.

허공에 발을 버둥대던 아렌은 발이 닿자마자 얼른 기어가듯 고드프리와 거리를 벌렸고, 잠시 뒤 고드프리의 몸 역시 바닥에 닿았다.

“…….”

“…….”

지금 아렌이나 고드프리나, 둘 다 무기랄 것이 없다. 이런 순간 불리한 건 육체적으로 유리한 고드프리.

바닥에는 아까 떨어뜨렸던 횃불이 반으로 부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횃불 끝에는 아직 용케 불이 붙어있었다.

“이봐, 고드프리. 위로 올라가는 길은 아나?”

“…….”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렌에게 곧바로 덤벼들 경황은 아닌 듯, 바닥에 착지할 때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렌은 충분히 경계하며 행낭 속 넣어뒀던 등잔에 횃불의 불을 붙였다.

단숨에 밝아진 태양흔의 바닥.

바닥이 평평한 원형의 공간을 빼곡히 메운 건, 그동안 이곳에 착지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유골들이었다.

길을 잃고 절망해 이곳에 몸을 던진 건지, 혹은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떠밀렸는지.

사원에서 사라졌다는 인원의 상당수는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했다.

아렌이 증인으로 삼기 위해 데려왔던 불량배 두목 역시 그곳에 있었지만, 낙하시 큰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의 뼈가 뒤틀려 몰골이 엉망이었다.

“이봐, 고드프리. 너희가 납치한 사람은, 이곳에 던지기 전에 죽였나?”

“…….”

여전히 대답 없는 고드프리.

그 대신, 아렌은 증인의 배에 깊게 찔린 창상을 발견했다.

‘죽은 사람이나 물건은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고, 산 사람은 죽지 않을 세기로 바닥에 내려오는 구조인가?’

등잔을 더 높이 들어 올리자 사람이 파놓은 듯한, 유적의 복도와 양식이 같은 통로가 모습을 보였다.

태양흔의 바닥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인 듯했다.

문제는, 그 통로가 고드프리의 뒤쪽에 있어 어떻게든 고드프리를 거쳐서 가야 한다는 것.

“…….”

그런데, 고드프리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언가에 당황한 듯,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고드프리?”

“…몸이 안 움직여.”

“뭐라고요?”

“몸이 안 움직인다고! 어떻게, 너는 그렇게 움직일 수가 있지!”

고드프리의 외침이 넓은 공동 안을 메웠다.

‘몸에 힘이 빠진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기만인가?’

하지만 고드프리는 정말 착지했을 때의 자세 그대로 꿇어앉은 채 조금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설마. 그런 구조인 건가?”

아렌은 등불을 들어 바닥에 널브러진 유골들을 살폈다.

옆으로 웅크려 있거나 앞으로 고꾸라져 있거나.

뼈가 산산이 조각난 유골들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비교적 정상적인 유골들은 공통적으로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착지한 후 그러한 자세를 잡게 설계된 것처럼.

“그런 구조라니, 뭐가! 아렌 너는 뭔가를 알고 있나? 네놈 짓이 아닌 건가?!”

“아니,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유추는 할 수 있겠지. 아마 너희가 태양흔이라 부른 수직 동굴은, 산 사람이 죽지 않을 속도로 낙하시키는 구조야. 그리고, 무사히 착지한 사람은 이곳에 무릎 꿇은 채 움직일 수 없어.”

고약한 공간이었다.

무사히 바닥으로 착지했지만, 정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기도하는 자세로 어둠 속에 남겨져야 한다니.

고드프리는 아렌의 추측을 믿지 않았다.

“아렌 네놈이 드디어 미친 거냐! 설령 그 말이 맞다고 해도, 왜 너는 무사히 움직인단 말이냐! 역시 네놈의 수작인 거지!”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아렌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 중, 충격에 완전히 찌그러진 등잔을 주웠다. 기름은 완전히 동나 있었고, 남은 건 짧은 심지뿐.

아렌은 완전히 망가진 등잔을 무릎 꿇은 고드프리의 앞에 놓았다.

“…지금 뭣 하는 거냐, 아렌?”

“아니, 지금 올라갈 거라서. 어두운 건 싫잖아? 하지만 많이는 못 줘.”

아렌은 찌그러진 등잔에 아주 약간의 기름을 부은 후, 심지에 불을 붙여줬다.

고드프리의 앞에 어둠을 밝힐 미약한 불빛이 타올랐다.

“자, 잠깐만. 올라간다고?”

“왜, 너와 같이 여기 남아줄 줄 알았나?”

고드프리는 무릎 꿇고 조아린 자세 그대로 아렌에게 외쳤다.

“말도 안 된다, 아렌! 설마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둠 속에 혼자 남겨두진 않겠지?!”

“뭐야, 태양교 신자면 어둠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며? 그래도 매정하니 기름을 조금 나눠줬잖아?”

아렌이 찌그러진 등잔 안에 담은 기름은, 기껏해야 십분 남짓 지속될 아주 작은 양.

그게 아렌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이었다.

“잠깐만! 날 데려갈 수 없다면 아래에 사람이라도! 내가 여기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다오! 그럴 수 있겠지? 아렌!”

고드프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아렌은 벽에 난 통로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그럼, 어둠 속에서 기도해. 고드프리. 이 구덩이를 만든 누군가는 그걸 원한 것 같으니까.”

아렌의 모습은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고드프리.

그의 앞에는 흐릿하게 타오르는 찌그러진 등잔. 그것이 보이는 빛의 전부였다.

고드프리는 잔뜩 탁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수그린 채 굳어있는 백골들 뿐.

아니, 개중에는 아직 살이 붙어있는 싱싱한 시체도 있었다. 바로 자신이 찌른 후 아래로 던져넣은 불량배 두목이었다.

남은 기름을 거의 다 빨아먹은 듯, 등잔의 불꽃은 점점 더 작아지기만 했다.

이윽고-

“…아아.”

고드프리의 탄식과 동시에 훅, 하고 마지막 불빛이 사라졌다

태양흔의 바닥에는 적막같은 암흑만이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