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아렌 한 명을 찾기 위해 대사원 안의 모든 신도가 부산스러운 그때.
“젠장! 어째서 아렌 공을 놓친 거지! 이미 한 명을 잃어놓고도, 얼이 빠진 것도 정도가 있지!”
타린은 심하게 자책했다. 아렌이 실종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많이 느끼는 모양. 그걸 본 발커스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실상은 아렌과 짜고 타린을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아렌은 타린에게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했었지.’
그도 명색이 황제의 수사관이다.
지금은 제대로 된 단서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그라면 하나의 단서만으로 실제 있었던 사실들을 줄줄이 뽑아낼 가능성도 있었다.
“저, 결국 제가 불침번을 선 동안 일어난 일이니, 절 탓하시길 바랍니다. 제 잘못-”
“아닙니다! 당연히 아렌 공에게도 더 주의를 줬어야 했고, 불침번도 늘려야 했습니다! 하다못해 이곳을 나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죠! 이런 위험한 곳에 기어코 머물렀던 결과가 이것입니다!”
이미 발커스는 아렌의 실종에 태양교가 개입했음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아직 찾아보지 않은 곳이 있지 않습니까!”
“잠깐만요, 타린 공!”
“기다릴 수 없습니다!”
타린은 벽에 걸린 등잔을 뽑아 들고, 상대적으로 수색이 덜한 사원의 유적 부분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위험합니다! 타린 공은 저와 병사들을 지휘해야지요!”
“못 기다립니다! 지금 순간에도 아렌 공은 죽어가고 있을지 몰라요!”
복도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타린.
“…에이, 젠장!”
그리고, 여분의 기름과 등잔을 챙긴 채 발커스 또한 타린을 뒤따랐다.
“같이 가요, 타린 공!”
그리고 멀리서도 어둠 속에서 뚜렷이 빛을 발하던 발커스의 등잔 불빛은, 한번 모퉁이를 꺾는 것만으로도 훅,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쳤다.
*****
“헉, 헉…”
아렌은 어두운 복도 속을 달렸다.
발밑을 전혀 볼 수 없기에 전력으로 달리기는 버겁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오히려 다 큰 성인이기에 아렌보다 몸집이 커 신경 써야 할 게 더 많았다.
낮은 천장이나 모퉁이 등, 이제는 가지고 있는 불빛이 없으면 주변 지형지물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에까지 이르렀다.
‘난 이곳 지리를 모르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야.’
이 안의 지리를 쉽게 알 수 있다면 매년 안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나올 리 없다.
복도의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고, 아렌은 몸을 낮춘 채 숨을 죽었다.
이미 천을 내려놔 약하게 비춘 호롱불을 아예 꺼뜨렸다.
아렌은 순식간에 완연한 어둠 속에 짓눌렸다.
잠시 뒤.
복도 너머에서 횃불을 든 세 명이 나타났다.
아렌은 그들의 횃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로 물러나 숨을 죽였다.
일제히 발을 멈추고 소리를 듣는 세 사람.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동을 멈춘 아렌의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발소리가 사라졌군.”
“불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자가 정말 아렌이 맞을까요?”
사제의 의문에 고드프리는 달리느라 가빠진 숨을 골라 쉬었다.
“확실히, 자신에게 딱 맞는 사제복을 시기적절하게 훔쳤을 것 같진 않아. 하지만 누군가 도와줬다면 이상할 것 없지.”
“도와줬다면 누구-”
“얻어맞아 쓰러진 개혁파 사제, 콜론이었나? 역시 그자가 도와줬을 수도 있지. 그것도, 도망친 녀석을 찾으면 해결될 일이야.”
“하, 하지만 전하.”
고드프리를 따라온 사제 하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다시 못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뭐가 걱정이냐. 별로 권장할만한 행각은 아니지만, 방향이라면 예전 이곳을 방황하던 자들이 남긴 화살표가 있지 않나.”
“그야말로 대략적인 방향일 뿐 아닙니까. 실종자들이 헤매다 남긴 표식에 방향을 착각해 잘못 적은 것까지, 자칫하면 더 헤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게, 게다가 어둠 속에서 빛이라도 잃어버린다면, 벽의 화살표조차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길을 잃었던 자들 태반이 불을 밝히지 못해 헤맸습니다.”
사제들의 말에 고드프리가 조소했다.
“지금 태양교의 신전에서, 태양교의 사제라는 자들이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그, 그것은 아니지만-”
“도망친 놈이 아렌이 맞다면, 불신자조차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신자라는 놈들이 두려워한 꼴이다. 정녕 그것을 원하나?”
“…….”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주저할 시간에 당장 놈을 찾아!”
고드프리의 불호령에 사제들은 다시금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런.’
비교적 가까운 어둠 아래에 숨죽이고 엎드려있던 아렌은, 얼른 복도의 모퉁이 너머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복도는 막힌 곳 없이 바둑판 모양의 격자식으로 뚫려있었다. 적어도 막다른 길에 몰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일은 없었다.
‘올라가는 계단이면 분명, 오른쪽으로 가보라고 했었지.’
이 복도가 얼마나 가지런히 놓여있을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반듯한 바둑판 모양이라 생각하면, 두 번 연속 같은 방향으로 돌지만 않으면 일정하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사실상 신도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미신에 더 가깝다. 모퉁이를 돈 회수를 한 번이라도 틀리면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니까.
“아렌! 들리나!”
어둠 속에서 고드프리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히 뚜렷한 수도 없이 숨어들고만 있는 건 아닌가?! 더이상 들어갔다간 시체조차 찾지 못할 거야!”
당연히 아렌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고드프리의 목소리는, 두꺼운 암반을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지 가까운 거리인지조차 모를 만큼 모호하게 울렸다.
“-대답하기 싫다 이건가! 그건 좋네만, 만약 실종을 가장하고 우리 사제 복장을 몰래 입은 이유는 똑똑히 설명해야 할 거다!”
‘설명이라. 설명할 기회를 주기는 할까?’
아렌은 묵묵히 걸어 뒤쫓아오는 술래와 거리를 계속 벌렸다.
한 줌의 빛도 없는 암흑 속 술래잡기는 그렇게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
어둠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아렌은 이따금 걸음을 멈춰 숨을 죽였지만, 뒤따라오는 자들의 목소리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혹 저 멀리에서 희미한 횃불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몇 번 모퉁이를 돌면 곧바로 사라졌기에, 아렌은 마치 우주 한복판에 뚝 하니 떨어진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덜걱.
무언가 아렌의 발에 걸렸고, 아렌은 거의 넘어질 뻔했다.
‘…이건 뭐지?’
가볍고 단단한 물체가 발아래에서 덜그럭거렸다.
아렌은 몸을 숙인 채 한참을 숨죽이고 있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용히 부싯돌을 집어 들었다.
탁, 탁.
‘이런, 소리가-’
최대한 소리를 낮출 생각이었지만, 부싯돌이 부딪치는 가볍고 날카로운 소리는 꽤나 멀리서까지 들릴 것 같았다.
아렌의 등잔에 불이 붙었고, 아렌은 발에 걸린 물체에 빛을 비췄다.
그건, 보라색 사제복에 감싸인 백골이었다.
이미 목숨을 잃은 지 수년은 된 것 같은 깨끗한 백골 상태. 어느덧 아렌은 태양교 신도들이 실종자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걸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안쪽으로 지금까지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들이 훨씬 많겠지. 어쩌면 수십, 수백 년 전 실종자라도.’
백골의 주변에는 기름 없이 심지까지 바짝 태운 등잔이 있었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아렌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불을, 꺼야 해.’
불을 켜둔 채면 추격해오는 고드프리에게 단서를 줄 뿐이고, 또 최대한 등잔의 기름을 아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렌은 차마 등잔의 불을 끌 수 없었다.
아렌에게 줄곧 빛이 없었다면 모를까, 짓눌릴 것만 같던 어둠을 스스로 몰아낸 후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려는 결정에는 꽤나 단호한 결단이 필요했다.
아렌이 등잔의 불을 끄지못해 망설이는 사이.
“저기 있습니다!”
직선으로 쭉 뻗은 복도 너머에서 누군가 횃불을 높이 들고 외쳤다.
그제야 아렌은 등잔을 끄고 일어섰지만 이미 늦었다.
고드프리와 두 사제는 대략적인 아렌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마치 사냥개처럼 포위해 아렌을 몰아붙였다.
옷감의 들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격자 모양으로 짜인 복도. 추격자는 각자 한쪽 들실을 맡은 후 아렌을 몰았다.
아렌은 그들을 피해 무작정 한 쪽 방향으로 달렸다. 등불도 키지 않았고 모퉁이를 돈 순서도 이미 잊었기에, 이젠 자력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바람?’
미궁이나 마찬가지인 사원 유적 안에 들어온 후 느껴본 적 없는, 시원한 바람이 아렌의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렌은 반사적으로 발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전에 느껴본 적 있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쩌면-’
“다 도망 친건가?”
복도 안쪽에서 높이 치켜든 횃불과, 그 아래의 고드프리가 모습을 보였다.
고드프리가 들어 올린 횃불에 의해, 비로소 아렌 주변의 상황이 보였다.
아렌과 고드프리 사이는 갈림길 따위 없는 일직선의 복도였고, 아렌의 뒤에는 어디서 본 듯한 깎아지른 절벽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막다른 길에 절망하고 죽어간 또 다른 백골의 실종자가 있었다.
“이제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나? 아렌?”
“…….”
고드프리의 주변에 다른 신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렌은 대답하지 않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백골이 된 시신의 대퇴부 뼈를 비틀어 끊어냈다.
“뭐냐. 그걸 둔기로 쓸 셈이냐? 조야한데다, 천박해. 산맥 너머의 야만인이나 마찬가지구나.”
아렌은 숨죽이고 다른 사제들의 인기척을 살폈지만, 다른 이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신도는?”
후드를 벗고 아렌이 물었다. 사실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셈이었지만, 어차피 막다른 곳이라 아렌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글쎄. 단순히 늦을 뿐인 건지, 아니면 길을 잃은 건지.”
“꽤나 여유인데? 괜찮겠어? 이 뼈 주인처럼 이곳에서 영영 못 나갈 수도 있을 텐데.”
“그래봤자 신앙심이 부족한 자일 뿐이지. 진정한 태양교의 사도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 엉터리 같은 신앙심이, 정말이었나?”
고드프리가 한걸음 다가왔지만, 아렌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뒤쪽은 아래가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 낭떠러지 절벽의 매끈한 면은 아렌이 봤던 태양교의 성지인 태양흔과 똑같았다.
“말로 날 흔들어보려는 노력은 소용없다, 아렌.”
고드프리는 가져온 횃불을 통로의 벽에 뚫린 구멍에 꽂아 넣었다.
만들어질 때부터 횃불을 거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구멍은, 오랜 세월을 거쳐 다시금 원래의 목적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뼈 몽둥이도 마찬가지지. 항상 단검을 차고 다니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시신의 뼈를 수습해 무기로 쓸 필요는 없겠지. 아마 내가 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단검으로 기습할 생각이겠지?”
“-글쎄?”
태연하게 말했지만, 실은 고드프리의 말이 정답이었다.
사제복의 로브 아래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의 묵직함을 느끼며, 아렌은 물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정성이 대단하군. 내가 길이라도 잃을까 봐 걱정한 건가?”
“그러는 너야말로 왜 우리 사제복을 입고, 또 날 피해 도망친 거지? 선량한 우리 사제를 기절까지 시켜서 말이야·.”
벽에 꽂아놓은 횃불을 등진 채 천천히 걸어오며, 고드프리는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소검을 뽑아 들었다.
“피차 입바른 소리는 관두는 게 어떻겠나.”
“…그러지. 어차피 이런 깊숙한 곳에선 누가 어떻게 되어도 알기 쉽지 않을 테니.”
“깊숙한 곳이라… 하하.”
고드프리의 메마른 웃음소리.
“넌 네가 아주 깊은 곳까지 흘러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럼, 아닌가?”
“네가 서 있는 그곳, 넌 여기 와본 적 있다.”
고드프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렌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깊은 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그래. 정확히는, 네 뒤쪽에 있는 거대한 구덩이. 그 건너편이었지만.”
“…….”
아렌은 뒤쪽의 절벽을 곁눈질했다.
“그럼, 여기가 내가 봤던 태양흔의 반대편이라고?”
“그렇다. 네놈의 무덤으로 쓰기에는, 과분한 곳 아닌가?”
비로소 속내를 비친 고드프리는, 천천히 아렌을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