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뭐야, 증인은?!”
발커스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은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아렌이 물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거나, 접근한 사람이 있었나요?”
“방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도들 몇몇이 기웃거리긴 했지만, 일상적인 일이기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쪽의 숫자를 셌군요.”
아렌과 동행한 발커스, 타린과 동행한 위병들 넷.
그리고 방 앞의 기사 네 명을 확인한다면 자연히 방 안에는 증인인 불량배 두목 혼자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들어왔냐는 건데.’
타린과는 계단 도중에 마주쳤다. 방을 비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증인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터.
‘방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을 거야’
다행히 단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여섯 명이 한 번에 잘 수 있는 커다란 방에 가구는 몇 개 없었고, 그중 키가 천장에 닿을 만큼 커다란 서랍장 하나가 벽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랍장이 가린 벽에는 원래부터 통로로 쓰였을 법한 문이 있었고, 문밖은 휘장으로 가려진 어두운 복도였다.
‘…어디로 갔지?’
누군가가 증인을 강제로 잡아갔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것이다.
증인 자신도 협력했거나, 혼자 힘으로 그 방을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태양교의 총본산을 경계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어두운 복도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한번 길 잃으면 다시 나오기조차 쉽지 않다고 으름장을 놓던 고대의 복도.
‘-이 길은.’
기억에 있는 길이었다.
그리 달갑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아렌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길을 따라 달렸다.
이미 두 번이나 와본 적 있는 곳이라, 조명 없이도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태양교의 성지, 태양흔이라 불리는 거대하고 매끈한 수직 동굴.
그리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겨우 윤곽만 확인할 수 있는 짧은 금발의 사제.
“…고드프리 전하.”
“어라. 무슨 일이길래 그리 바삐 움직이나, 아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증인은 어디 있습니까?”
“누구?”
“당신이 잡아간 포로 말입니다.”
“자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한 발짝만 더 뒤로 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그 바로 앞에 아슬아슬하게 선 채 고드프리는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증인’인지는 모르네만. 어째서인지 방 밖에 나와 있는 수상한 자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긴 했네. 하지만….”
고드프리는 비어있는 양손을 활짝 펼치고 말했다.
“보시다시피, 결국 놓치고 말았어. 산맥 깊숙한 곳의 고대 사원은 거의 미궁이나 마찬가지거든.”
“…놓쳤다고요?”
아렌의 시선은 고드프리의 뒤쪽, 태양흔에 머물렀다.
“설마, 절벽 아래로 내던진 겁니까?”
“불쾌한 억측이로군. 우리가 던졌을 리도 없거니와, 본인이 뛰어내렸을 리도 없겠지. 기껏 도망쳐놓고 택한게 자살일리는 없으니.”
“…….”
분명 거짓말이다.
선페일 영주의 사주내용을 알고 있는 증인이 있음을 안 고드프리가 몰래 방에 침입해 중인을 납치한 것이겠지.
바닥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던져넣으면 시체조차 찾기 힘들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방의 또 다른 통로에 대해선 까맣게 모르고 있었겠지.’
밀실 안으로 몰래 들어올 수만 있다면, 잠에 빠진 아렌이나 타렌의 목숨을 끊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두운 복도 앞에 아렌은 혼자 있었다.
“지금 나도 저 어둠 아래에 던져넣을 겁니까?”
“꽤나 유쾌한 농담이군. 그럴듯한 제안이고. 하지만 그러지 않겠어.”
고드프리는 선을 그었다.
“제국 황자의 비서관을 성지 아래로 던져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나. 원한? 복수? 고작 그런 걸로 성지를 더럽혀선 안 되겠지.”
“…….”
분명 거짓말일 테지만, 아렌은 고드프리의 말에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아렌은 급하게 달려오느라 조명이 없었고, 고드프리의 표정은 어떠한 빛도, 음영도 없이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인가 보군.’
“제가, 실언한 모양이군요. 용서해주십시오.”
아렌은 방금 왔던 길을 향해 빙글 돌았다.
“어라? 잃어버린 사람은 찾지 않아도 되겠나?”
“네. 이곳에 더 오래 있다간 또 다른 사람이 실종될지도 모르니까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설마하니 그 억측을 황제 폐하께 보고할 생각은 아닐 거고.”
“있었던 일들은 간략하게 정리한 후, 늦어도 내일 밤중에는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그런가. 오랜만에 만난 황궁의 사람인데, 빨리 가게 된다니 아쉽군.”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고드프리였다.
이제 아렌 일행에게는 선페일 영지 내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야영하는 도중 주변에 불이 난다거나, 의문의 화살이 한두 개 날아와도 대응하기 쉽지 않을 터.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작은 어깨를 보며, 고드프리는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혔다.
“…아니, 안되지. 이대로 만족해선.”
태양교가 개입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은 상태로 아렌을 죽여야 완전한 승리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 고드프리는 여겼다.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 보고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
“-전하! 고드프리 전하!”
다음날 이른 아침. 고드프리는 다소 무례한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타린 조사관께서, 이런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렌 공을 어쩌셨습니까?!”
“…네?”
가라앉아 있던 고드프리의 정신이 빠르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렌 공의 모습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고드프리 전하께서는 짐작 가는 것이 없습니까?!”
“…….”
고드프리는 말문이 막혔다.
이번 아렌의 실종은, 정말 고드프리와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렌 공이 실종되었습니다! 그것도 태양교의 총본산 한복판에서요! 태양교에서는 협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타린은 눈에 핏발이 잔뜩 서린 채 말했다.
당초 태양교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타린이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에 온 손님이라는 입장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렌이 실종되자, 타린은 이제껏 없던 고압적인 자세로 태양교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물론 타린의 태도에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온 사원에 신도들을 풀어 찾겠습니다. 분명 어디선가 길을 잃은 것이겠지요. 무사하실 겁니다.”
고드프리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 말대로 아렌은 무사해야만 했다, 고드프리의 입장에서는.
아렌을 직접 죽인 후 실종 처리하는 것과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렌이 살아있고 이 어딘가에 숨어있다면, 아렌을 죽이지도 못한 채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그보다 최악은 사실 황궁 기사들과 위병들이 아렌을 숨겨두고 있고, 실종을 빌미로 태양교의 체면을 깎은 다음 아렌을 숨긴 채 유유히 대사원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렌 그 새끼를 노리는 다른 자들이 있었나? 아니면 아렌 놈의 자작극?’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고드프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태양교 사제 콜론은 조심스레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아렌은 그곳의 침상 한곳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어때요?”
아렌은 몸에 딱 맞는, 태양교의 보라색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콜론이 빌려준, 어릴 적 입던 사제복이었다.
아렌을 숨겨준 개혁파, 콜론은 방문을 닫고 소곤거렸다.
“아렌 공을 찾으려고 온 사원을 다 뒤집을 기세에요.”
“그렇겠죠. 고드프리로서는 어쨌건 내 시체라도 확인해야 덜 억울할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일행까지 속인 건 너무하지 않나요? 이건 타린 조사관도 모르는 일이죠?”
“괜히 알려줘서 부자연스레 행동하는 것보다 알리지 않는 게 낫겠죠.”
애초에 타린은 아렌이 태양교 개혁파를 포섭한 일도 모르고 있다.
물론, 그가 알게 되면 태양교 수뇌부에 자신의 사람을 꽂겠다는 아렌의 계획 자체가 무산되는 이유도 있지만.
‘교단이 날 잡아갔다고 생각하면 타린은 좀 더 거침없이 행동할 테고, 태양교도 제풀에 찔리는 게 있어 크게 반발 못 할 테지.’
아렌이 스스로 몸을 숨겼다는 건 기사 한둘과 발커스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명목상 아렌은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방 밖을 나온 후, 그 새 행방불명 되어있는 상태.
아렌의 실종으로 대사원은 마치 벌집을 들쑤신 듯 들썩이고 있었다.
증인을 뺏어간 고드프리에게 정치적인 압박을 주기 위한 실종 공작이었지만, 아렌은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두 개의 모닥불. 그리고 추락하는 탑이라.’
대주교와의 짧은 만남에서, 그에게 선보인 점괘 카드들이었다.
그때는 단지 대주교가 고드프리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아무 카드나 꺼내 든 것에 가까웠지만.
“…콜론?”
“네. 말씀하시죠.”
“지금 제가 대주교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아렌은 그의 속내 깊숙한 곳의 탐욕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주교님이요?! 글쎄요, 평소에도 저같은 평사제가 함부로 만나뵐 수 있는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같이 어수선할 때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대사원의 최정상인 대본전으로 향하는 계단은 산의 사면을 따라 이어진 한 곳뿐이라는 점이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야 할 테고, 더욱 삼엄해진 그곳을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채 통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대주교와 독대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개혁파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를 이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반응을 보니,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닌가 보죠?”
콜론의 반응을 본 아렌이 정곡을 찔렀다.
“…대사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어진 유적이니까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 그 유적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어둠 속에 잠긴 나머지 절반 중에는, 분명 위로 올라가는 층계도 있어요.”
콜론이 자신 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곧 미궁이나 다름없는 유적 안쪽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괜찮겠어요?”
“지금도 매년 사원 안에서 실종되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제법 되죠. 대부분 살아서 찾긴 하지만, 몇몇은 미궁 속을 헤메다 죽어서 발견되기도 해요. 영영 찾지 못하는 사람도 일 년에 한두 명 정도는 나오고요.”
“…충분히 빈번하네요.”
콜론은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자는 말이었지만.
“그렇다는 말은, 대사원의 유적 부분은 태양교 사람들도 완전히 파학 못했다는 뜻이네요? 당연히 감시하는 눈도 없을 거고요.”
“…….”
아렌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
“…자, 이 부근에는 아무도 없어요.”
아렌을 어두운 복도 안쪽으로 안내한 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원 안의 전 신도가 아렌을 찾느라 분주했고, 당연히 사원의 미궁 부분도 수색의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본인들조차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만큼, 수색은 한정적이었고 다른 곳보다는 인적이 뜸했다.
아렌은 두꺼운 천과 함께 호롱불을 받아들었다.
“자, 받으세요. 아렌 공. 급하게 불을 줄이고 싶으면 이 천을 덮어씌우면 돼요.”
“같이 가주시는 건가요?”
“어쩔 수 없잖아요? 혼자 보냈다가 정말 실종되면 어떡해요.”
확실히 암반을 깍아 만든 복도는 다른 곳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고드프리가 태양흔 근처로 안내했던 곳보다도 더 오래된 듯한 공간.
어둠은 그 자체로 으스스한 위압감을 뽐냈다.
아렌과 콜론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찰나.
“거기 누구 있습니까?”
횃불을 높이 치켜든 고드프리. 그리고 그를 수행하듯 따라다니는 두 명의 덩치 큰 사제들이었다.
‘…고드프리? 미행하고 있었나?!’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서명을 받으면서 콜론이 개혁파라는 사실은 알려졌으므로, 당연히 미행이 따라붙을 걸 예상했어야 했다.
“콜론이라 합니다, 고드프리 사제님. 이 안쪽을 아직 확인해본 적 없어서 수색해보려는 참이었습니다.”
콜론은 태연함을 가장해 말했다.
하지만 고드프리의 시선은 처음부터 아렌을 향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옆에 분은 대답이 없으시군요.”
“아, 이 사람은-”
‘안돼!’
퍼억!
“-크헉!”
아렌은 깍지 낀 양손으로 콜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콜론이 여기서 변변찮은 변호를 하면, 아렌이 붙잡혔을 때 콜론조차도 공범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아렌이 콜론을 기만했다는 정황을 만들면, 설령 아렌이 붙잡히더라도 콜론은 변명할 여지가 생긴다.
“아렌!”
그리고, 아렌은 콜론이 준비해준 호롱불과 기름을 가진 채 어두운 미궁 속으로 달렸다.
그 뒤를 따라서 고드프리와 덩치 큰 두 사제도 쓰러진 콜론을 무시한 채 아렌을 따라왔다.
원래 예정과는 사뭇 다른 추격전이 시작됐지만.
‘…오히려 잘됐어.’
인적 없는 고대의 미궁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묻히고 만다.
아렌은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