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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점괘는 흉으로 끝난다-81화 (81/227)

#081화

불량배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지만, 발커스와 아렌은 태연했다.

“죽이지 말라니, 할 말은 그게 다에요? 참 간단하게 말 하시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요.”

발커스는 포위한 불량배들의 면면을 보면서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흔히들 변경의 사람들은 강하다고도 하는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네.”

“그야 국경을 맞대지도, 미개척지와 가깝지도 않았으니까요.”

흔히들 말하는 속설이 있다.

척박한 변경의 사람들은 강하다고 하는 속설.

그건 삶이 안정된 수도나 대도시 사람들의 선입견이지만, 반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삶에서 길러진 억척스러움은 분명 존재하니까.

하지만 북쪽 끝에는 국경도, 미개척지의 야만인도 없다.

얼어붙은 산맥 너머로 미답지가 끝없이 펼쳐져있지만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그곳을 방황하는 유랑족들은 정주민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제국 황자의 전속 기사로서 어려 훈련병과 적들을 상대해본 발커스로서, 변경 출신들 특유의 강함은 몇번이고 느껴본 바였다.

하지만 이곳 불량배들에게선 그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건 아렌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불량배에게 돈 몇 푼 쥐여준 걸로는, 발커스를 상대하지 못할 텐데.’

발커스는 칼을 검집에서 빼지 않은 채 들어 올렸다.

“우리 나리께서 죽이지 말라니 죽이진 않으마. 사양하지 않아도 돼.”

발커스가 장검을 뽑았다면 기다란 칼날에서 오는 위압감에 절로 위축됐을 테지만, 검집으로 숨겨놓자 불량배들의 기는 더욱 살았다.

“어차피 한 사람이야! 단번에 에워싸!”

“아무리 고수라도 팔은 두 개밖에 없다고!”

단번에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발커스.

아렌의 작은 키에는 단숨에 발커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딱, 따닥!

“아악!”

“으아악!”

불량배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신병들에게 한꺼번에 덤비게 한 다음, 실력의 격차를 보여주는 건 황궁에서도 종종 써먹는 훈련이다.

발커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에서라도 충분히 통용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 이자식! 고수다!”

불량배 중 누군가가 외쳤다.

‘가웨인이나 더글라스를 봤다면 기절이라도 했겠군.’

비록 발커스의 실력이 가웨인이나 더글라스같은 황궁 내 최고 실력자에는 한 끗 못 미치지만, 저런 열 명 남짓한 불량배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실력자인 건 변하지 않는다.

발커스를 향한 포위는 금방 와해되었다. 달려드는 상대를 한 명씩 쓰러뜨리면 되었던 발커스로서는 오히려 아쉽게 되었다.

그리고, 고수인 발커스 대신 만만한 아렌에게 두 명의 불량배가 달려들었다.

아렌을 인질로 삼거나,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아렌의 손에도 어느새 자기 키만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아이들이 돌치기를 하다 놓고 간 나무 막대를, 아렌이 주워든 것.

아렌의 지팡이가 단숨에 불량배의 발목과 옆구리, 턱을 훑고 지나갔다.

따닥!

불시에 세 군데를 가격당한 불량배는 그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어, 어라?”

다른 불량배는 아렌을 앞에 두고 멈칫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판단력이 아쉽네요. 그대로 뒤로 도망쳤으면 무사했을 텐데.”

아렌을 노린다고 앞으로 달려온 통에, 지금은 오히려 아렌과 발커스 사이에 낀 꼴이 되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불량배는 눈을 질끈 감고 달려들었다.

*****

“-일곱, 여덟. 둘은 도망갔네요. 거기 죽인 건 아니죠?”

“…아렌 공은 날 어떻게 보는 겁니까?”

“협박이랑 공갈을 잘하는 사람으로요. 이제 저 녀석들을 앵무새처럼 조잘대게 해야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대… 지체 높으신 분이 그런 말을 함부로 써도 되는 거예요?”

“이래 봬도 천한 출신이라 상관없거든요?”

“나참…”

발커스는 쓰러진 불량배의 뺨을 짝짝 때렸다.

“으, 으으…”

슬슬 정신을 차리는 불량배.

“어이, 네가 두목이냐?”

“네, 네에? 제가요?”

“아닌가 보네. 그럼 여기 쓰러진 놈들 중 두목이 누구냐. 없으면 가장 지위가 높은 녀석. 지목해.”

“…….”

불량배는 살짝 망설였다.

하지만 발커스가 난리통에도 뽑지 않았던 장검을 살짝 뽑은 것만으로도 불량배의 손끝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 저 사람입니다.”

“음, 아렌이 보기엔 어때요?”

“거짓말인것 같진 않네요.”

불량배의 표정을 살핀 아렌이 첨언했다. 발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나리께서 그렇게 말하니, 넌 가도 좋아. 나머진 저 녀석이 말해줄 테니까. 가는 김에, 네 동료 녀석들도 다 깨워서 썩 꺼져.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발커스의 으름장에 불량배는 대꾸도 못한 채 동료들을 깨워 사라졌다.

그리고, 두목으로 지목당한 불량배.

그가 서서히 깨어난다. 그 앞에는, 아직 젊음에도 경험 많은 기사단장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야, 니가 두목 맞냐?”

“…….”

엄습해오는 기세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불량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제, 제발 그만두세요! 이대로라면 전 죽고 만다고요!”

“아, 그래? 죽는 게 무서워? 하지만 우리 손에 죽는 것도 무서워해야 할 텐데?”

허름한 옷을 벗어 던진 발커스는, 손을 뒤로 묶은 불량배 두목을 압송하듯 끌고가고 있었다. 다운힐 사람들이 점점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렌이 원하던 바였다.

‘우리를 잡아오라고 하기엔, 너무 어설펐어. 더 고수들로 준비하거나, 숫자를 두 배쯤 늘렸어야지. 이건 고드프리가 한 짓은 아닐 거야.’

고드프리와 발커스 사이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지만, 고드프리라면 황궁 직속의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정도는 알고도 남는다.

이 지방의 불량배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한 위치이면서, 평생 선페일 지방을 나간 적 없어 황궁 기사의 강함을 모르는 자.

“카로나 윈더포드가 시켰겠죠. 맞나요?”

“그, 그건-”

아렌의 입에서 선페일 영주의 이름이 나오자 두목의 말문이 막혔다.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우린 당신을 이대로 이 도시에 놓아줘도 상관없어요. 그럴까요?”

“…….”

“분명 다운힐 성문을 나가보지도 못하고 위병에게 붙잡히겠죠. 그 뒤 소리소문없이 실종당할 테고. 증인은 저승으로 숨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 제발 자비를-”

아렌은 두목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당신과 내 이해관계는 일치하니까.”

시킨 일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의뢰를 누가 시켰는지 알고 있는 두목은 이제 영주의 골칫거리일 뿐이다. 언제든 틈을 봐서 죽이려 들 것이다.

그리고, 아렌은 살아있는 증인을 원했다.

“이 도시 안에 있는 건 불안하겠죠. 그러니 일단은 도시를 나가야겠죠.”

“…그런데, 절 이렇게 태울 겁니까?”

두목은, 아렌의 말안장 뒤편에 탔다.

앞이 아니라 뒤를 보고 앉혀진 자세는, 꽤나 우스꽝스럽고 굴욕적이었지만 그만큼 눈에 더 띄었다.

“네. 불시에 화살 맞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 시선을 끌어야죠. 아무리 눈엣가시라도 이렇게 많은 눈이 보는데 대낮에 죽일 순 없을 테니까.”

“…그러면 저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사원으로요.”

“-대사원이요?!”

“왜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니, 그야-”

당연히 그로서는 문제가 차고 넘칠 것이다.

영주로부터 살려준다는 듯이 굴었는데, 정작 대사원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원흉이었으니까.

아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불량배 두목을 보호하기에 대사원만 한 곳이 없었다.

“발커스, 지켜야 할 사람이 둘에서 셋이 되었지만 상관없겠죠?”

“까짓거, 하는 수 없겠죠.”

말 등 뒤에 거꾸로 탄 두목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발커스를 돌아봤다.

아렌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한 발커스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이해했다.

고작 10대 중반의 어린놈에게 마음껏 휘둘리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

아렌이 대사원을 떠나있는 동안, 지금까지 숨죽여 때를 기다리고만 있던 개혁파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교가 터무니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한 목소리로 움직일 것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오전동안 서명을 한 신도는 전체의 2할이 조금 안 되는 숫자.

아직은 개혁파를 경계하는 자들이 다수고, 주위의 눈을 살피는 자들도 있어 그 이상 숫자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래였다면 그조차도 서명을 낼 수 없었겠지.”

“…기류가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까, 황자 전하.”

대사원 정상에 있는 대주교의 대본전.

절반은 산맥 안쪽으로 들어와 천장이 있고, 반은 밖의 하늘이 보이는 넓은 테라스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장성한 황자 고드프리와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듯 노쇠한 대주교 단둘이 독대했다.

고드프리는, 대주교에게 서슴없이 하대하고 있었다.

“그렇다. 아마도, 아렌 그 자식이 부추긴 것이겠지.”

“아렌이라면 그 조사관과 동행했다는, 다른 황자의 서기관 말씀입니까?”

“그렇다. 물론 그 조사관도 진짜 신분이겠지만, 그 일행의 실세는 십중팔구 아렌이야. 5년 전, 내게 이빨을 드리울 때도 그랬다. 직접 움직인 건 레온나토스 녀석이었지만, 그 녀석을 구워삶은 건 아렌이었지.”

“…그 악연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황제가 직접 보낸 조사관을 죽이는 건 너무 큰 도박이야. 사실, 실패할 확률이 큰 도박이지. 하지만 이대로 아렌을 살려서 돌려보내도 이쪽에 승산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건, 그 아렌이라는 자가 레온나토스 황자의 실세이기 때문입니까?”

“레온나토스 녀석도 까다로운 상대인 건 맞지만, 그보다도 아렌이다. 내가 보기에 그놈은 전면에 직접 나서지도 않은 채, 직접 군림하려고 하고 있어.”

아렌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의식으로 잔뜩 왜곡된 발언을 쏟아내는 고드프리.

문제는 그가 한 말이 거의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럼… 그 타린이라는 조사관은 어떠실 생각이십니까.”

“아렌과 조사관, 모두를 죽이는 건 도리어 황궁이 개입할 여지를 주겠지.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아렌이 죽었다는 걸 조사관이 증언해준다면 의혹은 다소 풀리겠지.”

이곳에 온 것이 조사관 타린 뿐이었다면, 태양교도 도박하는 심정으로 타린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표적이 타린과 아렌, 둘이 되자 고드프리는 더 성공확률이 높은 도박, 아렌을 죽이는 방향으로 정했다.

“…전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그 미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헌데 그러면, 개혁파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 노구가 비록 대주교 자리에 있다고는 하나, 명분도 없이 신도들을 탄압하지는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지금의 태양교에는 뚜렷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이 없는 곳에는 단결도 없지.”

고드프리는 단언했다.

“예전의 제국이 그러했다. 사방에 실존하는 위협이 있던 선대의 제국은 그만큼 강했고, 드넓은 영토를 개척했지. 반면 지금은 어떤가. 제국을 위협할 만한 적이 없으니 그만큼 제국도 나약해지는 거다. 지금의 제국에는 강한 지도자와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해.”

강한 지도자는 고드프리.

강력한 구심점은 태양교.

그게 고드프리의 머릿속에 그려진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저희 종교에 무슨 적이 있단 말입니까. 아트마 교는 이미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지금도 알음알음, 하고 있지 않나.”

“…네?”

“불신자 놈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몰아 알음알음 영지 밖으로 내쫓는 것 말이다. 그것을 좀 더 대대적으로 하면 돼. 교를 믿는 자들에게는 꿀을 주고, 그럼에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에겐 타고 남은 재를 주면 그만이지. 그리고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한 자들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거다.”

“하, 하지만 아직 태양교는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태양교는 감당조차 버거운 힘을 절로 가지게 될 테니까.”

“…….”

물론 대주교는 바보가 아니다.

중앙 정치에서 철저히 배척된 고드프리 황자에게, 다음 기회가 남아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황제, 내 아비는 선대가 이뤄놓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범부다. 교국이 조그마한 국토로 도국 연합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하는 건, 광신도들의 단결된 힘 때문이야. 그 좁은 땅덩어리와 사람들조차도 그런데, 제국 전역에 태양교가 퍼진 미래를 생각해봐라.”

“오, 오오!”

“그리고 내 인가 아래, 네가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거다.”

어떠한 이성도, 그걸 덮고도 남을 만큼의 압도적인 탐욕 앞에선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

이미 노쇠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대주교이지만, 그의 눈앞은 극단적인 감언이설로 더욱 흐려져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어떻게 하느냐인데-”

그때, 대본전 안으로 측근인 신도가 들어왔다.

그에게 보고를 받은 직후, 언제나 태연해야 할 고드프리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렌이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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