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아렌 일행이 다시 사원에 들어온 후.
태양교의 대사원 안의 분위기는 일순 달라져 있었다.
몇몇 신도들이 같은 신도들에게 열성적으로 서명을 받고 있었고, 처음엔 난색을 보이던 신도들도 점점 지금의 태양교가 나아갈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의 제안을 받아들인 태양교 개혁파로서는 목숨을 내놓는 짓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오히려 숨기지 않고 활발히 활동하라는 조언이 잘 먹힌 듯했다.
일반 신도들에게 드러내놓고 활동하면, 아무리 개혁파가 눈엣가시라도 몰래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태양교 내부는 썩어있고 경직되어있지만, 문제가 있는 건 소수야. 나머지는 그들에 따라가고 있을 뿐.’
서명을 받고 있는 콜론은 왜 먼저 나서서 서명을 받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황궁 안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과, 조사관이 방문한 광산의 의문스러운 붕괴로 태양교 내부에서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그 반응은 훨씬 적었을 테지만.
지금까지 그늘 아래 숨은 채 극소수의 동지하고만 의견을 나누던 콜론으로선 점점 늘어나는 서명이 감개무량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우님.”
그리고, 콜론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곱슬곱슬한 금발에 섬세한 이목구비. 한눈에 고귀한 혈통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외모였다.
‘…고드프리.’
제국의 다섯 번째 황자이면서, 태양교에 귀의한 자.
북부의 조그만 종교였던 태양교는 고드프리가 귀의한 다음부터 점점 더 세력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혁파에게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
하지만 태양교 대주교가 감싸고 도는 자라서 어떻게 하기도 쉽지 않다.
…이제까지는.
“태양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진 교우님들의 뜻을 모아 잠시 의견을 모았을 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라, 지금 하고 계신 행동이 자칫 이단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까?”
‘이단’이라는 말에 몰려든 신도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콜론은 아렌의 말대로 일이 진행되어가는 걸 신기하게 여겼다.
“대체 누가 우리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존귀하신 태양신께서 규정하신단 말입니까?”
“당연히 모든 교인의 총의를 이끄시는 대주교께서 규정하시죠.”
“대주교님의 권위를 무시할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주교께서는 우리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받았을 뿐, 사물의 옮고 그름을 판단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콜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도들의 앞에서 부드럽게 타이르려 했던 고드프리의 인내심에 점점 한계가 오고 있었다.
“교우님들이 하는 말은 자칫 이 교단을 내부에서부터 철저히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말입니다.”
“뜻이 다르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맞춰가면 될 일입니다. 우격다짐으로 탄압하는 것은 옳지도 않을뿐더러 효과적이지도 않지요.”
“어차피, 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고드프리가 뒤로 신호를 보내자 뒤쪽에서 우락부락한 신도 넷이 걸어나왔다. 대주교나 고드프리가 밖을 순방할 때 주로 대동하는 무사들이었다.
조금은 강압적일지라도, 한번 교인들의 눈에서 멀어지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준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손이 콜린의 목덜미를 잡으려고 하는 찰나.
“호오, 지금 같은 신도에게 위력을 동원하는 것입니까?”
“…….”
사원에 남아있던 황제의 감찰관, 타린이었다.
타린은 병사들과 함께 콜론과 고드프리 사이의 갈등을 모조리 지켜 보고 있었다.
아무리 고드프리라도 황제 직속의 조사관 앞에서 교의 치부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는 못했다.
고드프리와 그의 무사 신도들이 주춤하는 사이 콜론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하기만 한다면, 그곳에 발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의견이 아니라 그릇된 의견입니다. 발전이 아니라 변질이고요.”
“의견의 옮고 그름을 대체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처음으로 되돌아온 질문. 고드프리는 외통수에 몰리는 기분 나쁜 감각에 휩싸이면서 겨우 말했다.
“…그야, 존귀하신 태양신께서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드프리 주교님, 설령 대주교님이라 해도 태양신의 의견을 대신할 수는 없죠.”
“…….”
뿌드득.
고드프리의 표정은 아주 미미하게 굳었을 뿐이지만, 그의 표정 아래 이빨은 분노로 인해 급격히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신도들 사이의 갈등이 커져 가고 있는 동안.
아렌은 대사원에 없었다.
*****
“어서 오시지요. 아렌 비서관 각하.”
다운힐의 영주 저택.
카로나는 발커스와 함께 방문한 아렌을 극진히 모셨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름 아니라 레온나토스 황자 전하의 비서관이신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야지요.”
레온나토스의 이름은 이런 벽촌에까지 퍼져 있었다.
고드프리 역시 그 나이 때문에라도 황자 중의 서열이 그리 낮지 않은데, 레온나토스는 12번째 황자임에도 오로지 실력으로 유력한 황태자 후보에까지 올라갔으니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그리고, 황자 레온나토스가 끼고 돈다는 또래의 어린 비서관 역시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다.
온갖 계략과 모사가 판치는 황궁 안에서 어린 나이에도 황자를 보필하는 유능한 비서관.
이곳에 아렌을 나이로 얕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 도와준다라. 얼마나 도와줄 수 있지?’
아렌은 영주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지금 고드프리는 태양교 개혁파의 서명에 정신이 팔려 대사원을 나오지 못하는 상태.
아렌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고드프리가 없는 곳에서, 영주의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레온나토스 전하의 이름으로 선페일의 병력을 빌린다면, 어느 정도를 빌릴 수 있습니까?”
여전히 아렌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카로나였지만, 그 표정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그건,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만, 태양교에 물리력을 행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선페일의 병력을 사용한다면 편할 것 같아서요.”
“그건… 그럴 수 없습니다.”
“왜죠?”
“교국같은 신정일치 국가가 아니기에, 정치는 종교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글쎄요?”
영주의 말에, 아렌은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사실은 지금도 교에 깊이 관여하시잖아요?”
“…네?!”
“발뺌할 생각은 마시죠.”
증거도 없이 영주를 도발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물증만 없을 뿐, 심증은 차고 넘쳤으니까.
“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군요. 아무리 아렌 비서관님이라 해도 방금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카로나. 아렌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가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괜한 말을 내뱉은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아렌에겐 카로나의 반응이 가장 큰 증거였다.
“…그렇군요. 영주님께서는 태양교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시죠. 병력을 빌려주시지도 않지만요. 그거면 됐습니다.”
아렌은 차게 식은 찻잔을 두고 일어섰다.
“영주님의 입장을 확인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아렌 비서관 각하.”
영주의 저택을 나올 때는, 들어갈 때 같은 환대가 아니었다.
‘이걸로 영주는 날 경계하겠지. 하지만.’
동시에 태양교와 영주 사이의 연결도 약해질 것이다.
황제의 조사관이 자신들 눈앞에 있고, 공공연히 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유착관계를 과시할 필요는 없으니까.
태양교 측에서 영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영주 쪽에서도 황제의 조사관이 눈앞에 있는데 유착관계를 과시할 필요는 없으니까.
영주의 저택을 나오자마자, 아렌은 으슥한 골목으로 가 미리 준비해둔 허름한 웃옷을 걸쳐 입었다.
“…지금 좀 춥긴 한데, 굳이 그런 허름한 옷이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도 되지 않나요?”
“거기 꾸러미 안에 발커스 당신 것도 준비해뒀어요.”
“…제것도요?”
“펑퍼짐한 누더기니까 갑옷 위에 걸쳐입으면 될 거예요.”
영문도 모른 채 누더기 같은 망토로 몸을 가린 발커스.
아렌은 발커스를 데리고 도시의 하천가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도시든 빈민가는 주로 하수가 모여드는 도시의 하천 주변에 생겨났다.
나무가 반쯤 썩었는데도 제대로 갈지 않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본 후, 아렌은 그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렌? 이런 곳에는 왜-”
“쉿!”
골목 안쪽에는 아이들 일곱 명이 돌치기를 하고 있었다.
아렌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누더기보다도 몇 배는 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이들 표정은 밝았다.
아렌이 천천히 다가가자 나무 작대기로 돌을 내려치던 아이들은 일제히 경계했다.
“…형아는 누구야?”
“못보던 사람인데? 어디서 왔어?”
“여행자? 굳이 이런 곳까지?”
‘…이런.’
중부나 다른 지역의 도시였다면 흘러들어온 뜨내기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대륙의 북쪽 끝이나 마찬가지인 선페일 지방까지 올라오는 뜨내기는, 거점도시인 다운힐에서조차 희귀한 모양이었다.
아렌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삼촌이랑 같이 저 동쪽 아티스에서 여기까지 왔어. 이곳에 태양교의 성지가 있잖아?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
“…여기 그런 게 있었나? 그걸 굳이 보러 왔다고?”
아이들은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드프리는 태양흔이라 불리는 신전 안의 수직동굴을 교단의 성지라고 말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 존재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모르니? 너희들은 태양교를 믿지 않는 거야?”
순간 아이들의 얼굴이 흐려졌고, 아렌의 눈은 반짝였다.
“아니, 믿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 믿는 사람은 없니?”
“이곳에선 태양교를 안 믿으면 안 돼-”
아이들 중 열 살쯤 되어보이는 꼬마가 중얼거릴 때.
“야!”
아렌과 또래 정도의, 뒷골목 아이들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소리쳤다.
“타지 사람들하고 말 많이 섞으면 안되는 것 몰라!”
“아, 알아…”
“그리고 너도. 이상한 것 묻지 말고 얼른 꺼져버려. 아니다, 여기 있든 말든 마음대로 해. 우리가 멋대로 떠날 테니까.”
아이들은 돌과 나무 막대를 챙기고 뒷골을 나갔다.
마을 밖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말라는 교육이 잘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아이들이 거짓말을 잘 못하는 법이지.’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능숙하지 않다는 의미로.
아이들은 아렌의 격앙된 태도를 보였고, 그것 자체가 하나의 지표였다.
‘태양교를 좋아서 믿는 것도 아니고, 태양교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맞고. 뭐야, 그 도적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었잖아?’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 삽시간에 횅해진 골목길.
아렌은 뒤쪽에 넝마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있는 발커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발커스?”
“뭐가요?”
“…….”
“생각하는 건 오로지 아렌 공의 몫 아니에요?”
자신의 어설픈 머리로 어설픈 생각이나 하느니, 차라리 아렌에게 전권을 위임하자.
그게 발커스의 판단이었다.
“…우선 이 지방에서 강제적인 포교가 있었던 건 맞는 듯해요. 그걸 믿지 않은 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이 지방에서 쫓아낸 것 같고요.”
“쫓아냈다고요? 무슨 수단으로요?”
“다른 신도들을 이용한 따돌림이든 영주의 부당한 조세든, 방법이야 많겠죠.”
물론 이정도로는 3개의 은광이라는 막대한 자산을 압수할 사유로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사유들이 계속 모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선 재료 하나 모은 거라 생각하죠. 나머지 재료는…”
아이들이 나가 텅 비어있던 골목길 안에,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길까 말까한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마을에나 있는 조금 껄렁한 분위기의 난폭한 청년들.
“어라? 그 꼬마들이 부른 건가?”
열 명 이상의 불량배에게 포위되었음에도 발커스는 태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불량배가 꼬박꼬박 칼을 들고 다니진 않겠죠.”
골목의 유일한 통로를 막은 불량배들의 허리춤에는 정강이 길이만 한 소검이 칼집도 없이 매달려 있었다.
“정체 모를 불량배에게 죽는 것도 ‘불의의 사고’에 들어가긴 하겠죠. 머리 잘 썼네요.”
하지만, 아렌에겐 저들 또한 또 하나의 ‘재료’일 뿐이었다.
아렌은 아이들이 흘리고 간 나무 작대기 하나를 주워들며 말했다.
“죽이지 말아요, 발커스. 소중한 증거들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