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후우, 다시 하늘을 보니 좋군요.”
광산에서 나와 말을 달리며, 발커스가 기진맥진한 채 말했다.
어둡고 좁은 굴 안을 헤매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을 보자 절로 마음이 풀린 듯했다.
하지만, 타린은 발커스처럼 ‘그저 운이 좋았다’라는 듯 웃어넘기려 하지 않았다.
“마침 은광산을 견학하는 동안에 광산이 무너졌다라. 우연이 지나치면 필연에 필적하는 법이죠.”
광산에서 나온 직후 얼굴을 굳힌 채 그렇게 말한 타린은, 굳은 표정 그대로 선두에서 빠르게 말을 달렸다.
위병이나 기사들이 함부로 말을 걸기도 어려울 만큼 기세가 사나워 보였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지위인 발커스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발커스는 앞서 달리는 타린을 보면서 소곤거렸다.
“…저기, 아렌. 혹시 그게 그거일까요?”
“그게 그거라니, 뭐가요?”
“그 왜, 아렌이 타린 공에게 그랬잖아요. 중요한 순간에 더러운 꼴을 참아 넘기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온몸에 검댕이 묻을 정도로 몸을 던져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 목숨을 구한 건 아닐까요?”
‘…응? 내 점괘가 그런 거였나?’
아렌의 기억상 세부적인 내용이 달랐지만, 일단 발커스가 이해한 내용은 그런 모양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그 점괘에 나온 대로라면, 저 양반은 목숨을 건졌네요.”
“…그렇군요.”
물론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만, 아렌은 본인이 한 점괘가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발커스가 멋대로 추리해가며 있지도 않은 속뜻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렇군. 이번 일이 그 점괘 내용이었다고 가져다 붙여도 괜찮겠는데?’
아렌이 광산 아래로 내려가 있는 사이, 지상에 있는 타린이 공격받아 죽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위병들과 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 속이었으니까.
설령 그가 죽는다 해도, 아렌에겐 그 나름대로 호재였다.
이번 일 이후 태양교가 더는 타린을 노리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더이상 타린을 노리지 않는다면, 아렌은 그에 맞는 다른 전략을 준비해둬야 한다.
선두에서 한참을 달리고 있던 타린이 속도를 늦추고 아렌 옆에 섰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렌 공. 너무 안심한 나머지 응당 했어야 할 질문도 이제야 겨우 하는군요. 광산 안에서의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성과라… 글쎄요. 광산 견학은 잘했죠.”
“짧은 시간이었고 도중에 그런 사건도 겪으셨으니까요. 이해합니다.”
그건 타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장갑에 검댕이 잔뜩 묻어난 정도로 정신을 잃었던 타란이지만, 의외로 금방 정신을 차려 정보를 수집한 모양이었다.
타린이 말했다.
“전 저 나름대로 밖에서 질문을 뿌려봤는데, 저곳 광부들 대부분은 태양교와 연관이 없다더군요.”
“대부분이요? 제가 얻은 정보로는 이곳 광부의 절반 정도만 서부에서 광부장을 따라온 자들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이곳 선페일 지방의 인부들이죠.”
“…아렌 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신자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파견 조사관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어느 쪽이든 별로 유쾌하진 않은데요.”
타린은 이번 광산 붕괴 사건이 명백히 아렌을 노리고 이뤄진 범행이라 속단하고 있었다.
“심증은, 거의 확실합니다. 태양교는 뭔가를 숨기고 있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선 사람 한둘 정도 죽이는 것은 눈도 깜빡하지 않을 자들이에요. 하지만 물증이 없다면 아무리 확실한 심증조차도 추측에 불과하죠.”
부족한 것은 물증뿐.
그리고, 황제가 직접 파견한 수사관인 타린에겐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이대로 수도로 돌아가 제국군과 함께 들어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렌 공.”
타린이 말하자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사제 콜론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제국군이 선페일 지방에 출병한다면, 뒤가 구린 종교 하나 정도는 아예 증발시켜버릴 수도 있다.
물론 제국 황실로서도 별다른 이유없이 종교를 탄압했다는 정치적 약점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 사실이 이미 사라진 통일교에 위안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확실히 타린이 말한 방법이 편하긴 하지. 하지만 황실과 이곳에 파견된 내 도덕성이 타격을 입을 테고.’
아렌은 확실히 태양교에게 행동으로써 천명했다.
자신들의 목적은 이곳 은광산에 있었고, 은광산을 관리하는 태양교 역시 수사의 대상이라고.
“타린 공만 허락하신다면, 다시 대사원으로 돌아갈까 하는데요. 괜찮을까요?”
“…그, 위험하진 않을까요? 우선은 황궁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서신으로 보낼까 합니다만, ”
서신이 황궁으로 도착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만으로도 조사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황궁에서 개입해올 명분이 생길 것이다.
그것도, 서신이 정말 황궁까지 도착할 수 있어야 가능한 말이지만.
‘선페일 지역은 영주까지 태양교의 입김이 들어갔으니, 서신이 무사히 도착할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것과는 별개로, 아렌은 태양교 사원 안이 그리 위험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나나 타린을 대놓고 죽일 수는 없었던 거겠지.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면, 태양교 사원 안에서 사람이 죽은 걸 얼버무리는 건 더 힘들겠지?’
호랑이의 입안 깊숙한 곳이 오히려 더 안전한 법이다.
“서신에는 너무 큰 기대하지 마시죠. 도착할지 어떨지 모르니까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만 있다면 오히려 태양교 사원 안이 더 안전할 겁니다. 그들의 동향을 살피기에도 가장 좋은 곳이고요.”
“…아렌 공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린 공.”
그리고, 다시 대사원으로 돌아온 아렌.
타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아렌은 콜론에게 말했다.
“그리고 콜론. 괜찮으시다면, 신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서명을 받아주시겠어요?”
“서명, 이요?”
“네. 교가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이 확실할 때, 기꺼이 개혁파를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서명을요.”
“…그게, 은밀하게 될까요?”
콜론은 회의적이었다. 태양교 내부에서 개혁파의 입지는 그야말로 바늘 끝처럼 좁았고, 대부분의 신도들은 최근 교세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지금의 태양교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황궁에서 일어난 사건조차 황실이나 아트마 교국의 함정이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콜론은 다소 민망한 말을 하는 것처럼 쭈뼛거렸다.
“저, 안타깝지만, 그리 많은 이들이 응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만, 저희 개혁파가 도리어 배척당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가요? 지금은 단지 계기만 없을 뿐, 계기가 생긴다면 개혁파가 주도권을 쥐는 것도 허황된 일만은 아닐 텐데요.”
“…말씀드리긴 민망하지만, 외부의 적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 내부의 적이죠. 지금 태양교의 주류 세력에게 개혁파란 자신들의 혐오스러운 부산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태양교를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콜론에게 아렌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는 것이라 해도, 아렌의 말을 따르게 할 이유를 쥐여 주는 것은 간단했다.
“제가 중앙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간단합니다. 사실은 이대로 선페일 지방을 떠나도 될 정도죠.”
“…아렌 공께서는 이곳에 금방 들르신 것 아닙니까? 태양교의 허물에 대한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셨을 텐데요.”
“그것이 사실은 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공식적으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황실에서 원하는 건 단지 구실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작은 증거 하나를 발견하는 것보다,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황제로서는 더 기꺼울 거라는 말이죠.”
아렌은 콜론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저로서도 위험부담을 안고 다시 사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을 안은 것이지,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에요. 하물며 내부에서 스스로 변하려 하지 않는 태양교를 제가 위할 이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렌이 이대로 돌아가면 아쉬운 건 태양교 개혁파, 저들일 뿐이다.
콜론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나만 말씀해주시죠. 저와 동료들이 서명을 받아 낸다면, 그것으로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입니까.”
“의지죠.”
“의지… 말입니까?”
“해방된 노예를 생각해보시죠. 주인이 선심 써서 하사받은 자유와 주인과 직접 투쟁해 쟁취한 자유의 가치는 전혀 다르죠.”
“…이것이 단지 비유라는 것은 압니다만, 태양교를 믿는 자들은 노예가 아닙니다.”
“물론입니다.”
아렌은 자신의 말이 콜론에게 담뿍 스며들 수 있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어쩌면, 노예보다 훨씬 못한 상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
이제는 사양할 것이 없었다.
비록 아렌이 최대한 공격을 유도한 것이었지만, 어쨌건 먼저 강하게 얻어맞은 건 이쪽이었으니까.
“저런, 괜찮은가? 소문은 들었네.”
말에 실어뒀던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아렌에게, 고드프리가 다가와 말했다.
“소문, 이라고요?”
“제2 은광산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면서?”
“그 소문, 참 빠르네요. 우린 그 직후 말을 타고 달려왔는데.”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고 하지 않나.”
“하긴. 근데 그런 말도 있죠. ‘떼지 않은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
아렌을 지긋이 바라보던 고드프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뭔가 오해가 있다면, 훌훌 털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야.”
“걱정 마시지요. 전 무턱대로 남을 의심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흠, ‘그러니 의심하지 않는다’로도, ‘괜히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로도 들리는군.”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실지는 고드프리 전하 뜻대로입니다.”
밖으로 대놓고 천명하지 않을 뿐, 서로의 입장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주고받았다.
아렌이 말했다.
“수직동굴 앞에서 전하가 말했죠. 그 동굴이 곧, 자신의 믿음이라고.”
“평범한 수직동굴이 아니다. 지상에 현현한 태양의 흔적, 태양흔이라 부르지.”
“어차피 그 믿음은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이 없지요.”
“진리라는 건, 본디 변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 사실 자체가 편향된 누군가에겐 폭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 그 자체가 폭력적이군요.”
“…역시, 너와 나는 여전히 각자의 의견을 좁히지 못할 것 같군.”
“그렇겠지요. 아마도.”
아렌의 눈앞에 있는, 악연 많은 황자.
이 자를 죽인다면 아렌에게는 평생 ‘황손을 죽인 자’라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니게 된다.
‘…받을 수밖에 없다면, 기꺼이 받아주지.’
아렌은 각오를 다잡았다.